[나의 꿈 나의 인생] "깨지고 부딪치며 ‘길’찾았다”

평창 동계올림픽유치위 대변인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몰라 방황…"

2011년 7월 6일 오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 국민의 눈과 귀가 모아졌다. 대한민국 프레젠테이션의 첫 번째 발표자, 생소한 얼굴의 그녀는 평창 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대변인, 나승연이었다. 영어와 프랑스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며 대한민국 PT의 시작과 끝을 담당한 그는 단연 돋보였다.

대한민국 평창이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된 후 나 대변인은 ‘더반의 스타’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새로운 ‘롤모델’로 떠올랐다. 외교관 자녀로서의 삶, 한국은행 입사, 그리고 아리랑TV 방송기자 출신이라는 이력은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다섯 살 아들을 둔 슈퍼맘이다.

그녀의 인생과 꿈을 향한 여정이 궁금했다. 나 대변인 또한 대학생들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며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다.


평창 동계올림픽유치위 대변인 나승연
- 1995년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 졸업(영문학 부전공)
- 1995년 한국은행 비서실 입사
- 1996년 아리랑TV 입사(창립 멤버)-메인 뉴스 앵커, 기자, ‘퀴즈 챔피언’ MC, 국제행사 MC
- 2002년 Korea & Japan FIFA World Cup 리포터
- 2003년 Oratio(영어 커뮤니케이션 회사) 설립
- 2010년 평창 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입사
- 2002~현재 프리랜서 국제회의·행사 MC(서울평화상, 외국기업의 날 등 다수, 2010 여수 엑스포 유치 활동 중 메인 프레젠터 등)



나승연 대변인을 만나러 평창 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사무실이 있는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 7층으로 향했다. PT 때 본 당당한 커리어우먼의 이미지를 그려봤는데, 실제 첫인상은 생각보다 수수했다.

“안녕하세요, 나승연입니다.” 큰 키와 곧은 자세에 무채색 계열의 세미 정장이 잘 어울렸다. 빼어난 외모는 화려하기보다는 분위기 있어 보였다. 그의 정중한 응대에 자연스레 고개가 숙여졌다.

나 대변인은 인터뷰 내내 차분한 어조로 얘기했다. 평창 PT 때 그는 237.798~238.61㎐의 피치(성대 진동)로 거의 일정한 톤을 유지했다. 일정한 톤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신뢰감을 주는 효과를 지닌다. 나 대변인은 “철저하게 피나는 훈련으로 완성된 PT였다”고 했지만, 편안하게 대화를 할 때도 높낮이에 큰 변화가 없었다. 방송국에서 뉴스 앵커를 한 영향이리라.

간혹 차가운 이미지로 보일 찰나엔 부드럽고 환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더반에서 IOC 위원들을 사로잡던 나 대변인의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역시 그는 대한민국 PT 국가대표, 나승연이었다.


내 직함은 ‘커뮤니케이션 디렉터’

지난해 4월, 나승연 대변인은 평창 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에 합류했다. PT가 주목적이었지만 다른 업무도 수행했다.

“PT 준비 이외에도 IOC 위원들을 직접 만나고, 외신 기자를 상대하고 실사나 기자회견에서 질의응답을 중재하는 일을 했어요. 다른 프레젠터들의 PT 트레이닝도 맡았고요.”

대변인으로서 유치위원회의 입이 된 것뿐 아니라 세계를 상대로 한국과 평창을 효과적으로 홍보하고, 여러 문화권 사이에서 소통 창구 역할을 한 것이다. 그의 명함에 있는 직함은 ‘커뮤니케이션 디렉터’였다.

“김연아 선수의 경우 선수로서 그가 가진 영향력이 있듯이 저에게는 언어가 있었죠. 우리가 가진 장점을 최대한 살려서 좋은 인상을 심어줘야 한다는 사명의식이 있었어요. 외국인이 원하는 것은 부채춤이 아니라 젊은 모습, 새로운 모습이라는 것을 알았고, 이를 보여주는 일이 신났어요. IOC 위원들이 하는 얘기가 한국 사람은 언어가 다르고 문화도 다르다는 선입견이 있었대요. 후에 ‘한국 사람과도 재밌게 얘기할 수 있고 어울릴 수 있더라’는 말을 들었을 때 뿌듯했죠.”

나 대변인은 어린 시절 12년간 해외 생활을 하며 국가 홍보에 대한 욕구가 항상 있었다고 한다. 특히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의 위상이 달라지는 것을 보고 올림픽에 대한 도전 의식이 생겼다고. 그러고 보면 그는 지금 원하던 일을 하는 셈인데, 정작 20대 중반까지는 별다른 꿈이 없었단다.

“제가 뭘 잘할 수 있는지도 모르던 방황하는 청춘이었죠.(웃음)”


외모에 컴플렉스가 있었다?

어린 시절에 대한 주된 기억은 ‘잦은 이주’였다.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처음 해외에 나간 만 4세 이후로 12년간 해외 생활을 했다. 캐나다를 시작으로 말레이시아, 영국, 덴마크 등에서 살았다. 처음 배운 언어가 영어인 만큼 사실상 그는 네이티브 스피커다. 남들은 부러워할 법한 내용이지만 당시엔 해외 생활이 고달팠다고 한다.

“2~3년 만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게 힘들었어요. 친구 사귀는 게 힘들었고 외로운 것도 있었고요. 외교관이 선망의 대상이지만 외교관 자녀는 좋지 않았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한국으로 아예 들어왔는데 그때가 가장 힘든 시기였던 것 같아요. 한국어가 어눌하고 문화가 달라서 오해도 많이 받았고요.”

타지에서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도 있었지만, 가족 사이에서도 외로움을 느꼈다고 한다.

“아버지는 멋있고 존경할 만한 분이지만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보수적이셨고 저에 대해 잘 모른다고 생각했었죠. 형제가 셋이 있는데 저는 유독 자주 혼났던 것 같아요. 아버지와 대화를 안 하니 나를 몰라준다고 생각했었죠. 사회생활을 하고 결혼도 하니 그제야 ‘사실은 나를 가장 잘 알고 계셨구나’ 알게 됐어요.”

나 대변인에 따르면 그의 언니는 모범생에 무척 예쁘기까지 했다. 그래서 언니보다 인정받기 위해 더 노력했다.

“언니가 여섯 살 위인데, 사람들이 언니보고는 ‘예쁘다’고 했고 저한테는 그냥 ‘매력 있네’라고 했어요. 언니에 비해 공부를 잘한다는 얘기도 못 들었고, 콤플렉스가 좀 있었죠.”

나 대변인의 언니가 무척 궁금해지는 대목. 현재는 주부로서 행복한 가정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 한다.

뚜렷한 꿈 없이, 부모의 영향 아래 사는 우리네 모습처럼 나 대변인도 비슷한 십대 시절을 보냈다.

“어느 무렵엔 춤이 좋아 ‘댄서’가 되겠다고 선언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어요. 한때는 방송국에서 앵커를 하고 싶었지만 한국어 책을 소리 내어 읽는 순간 가능성이 없어졌어요.(웃음)”

나의 진짜 첫 직장 ‘아리랑TV’

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했고 영어영문학을 부전공한 나 대변인이 졸업과 동시에 입사한 곳은 다름 아닌 ‘한국은행’. ‘신의 직장’ 한국은행이었다.

“교수님 추천으로 특채 입사를 했어요. 동기가 6명이었죠. 비서실에서 근무했는데 사실 뭘 해야 할지 잘 몰랐어요. 프랑스어를 좋아하긴 했지만, 4년 대학 생활을 하면서 전공을 살릴 수 있는 관심 분야가 없었고, 언어 이외에 경제·경영 분야에도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취업을 했는데, 막상 일을 접하니 막막하더군요. 고민이 정말 많았어요.”

그리고 일 년 반 후에 아리랑TV 공채 1기로 입사를 했다. 은행원에서 방송기자라니, 파격에 가까운 이직이다. 높은 연봉을 내려놓고 개국 방송국에 취업하는 일이 불안하진 않았을까?

“저는 ‘일단 해보자’ 하는 성격이에요. 무작정 가서 시험부터 봤어요. 방송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한국에서 한국말로는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리랑TV에선 가능할 것 같았고요. 해외에 한국을 알리고 싶다는 사명감도 있었고, 개국 방송국이라 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26세에 입사한 후 4년 동안 나 대변인은 종횡무진 방송국을 누볐다. 8mm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직접 취재와 리포팅을 했고, 메인 앵커로도 활약했다. 심지어 아나운서의 영역인 프로그램 진행까지 맡았다. 말하자면 그의 역할은 ‘기자와 아나운서와 PD’의 어디 즈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1인 기자 시스템으로 하고 싶었던 것을 마음껏 할 수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영어 아나운서가 많지 않아서, 기자이지만 ‘퀴즈 챔피언’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었죠. 모든 경험이 소중하게 느껴져요. 지금도 아리랑TV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요. 지금 하는 일의 상당 부분을 그때 배웠죠. 제 마음속 첫 직장이에요.”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는 ‘제 길을 찾았다’고 한다. 몸에 딱 맞는 옷처럼 나 대변인을 잘 대변하는 그 일은 바로 ‘커뮤니케이션’. 이미 어렸을 때부터 여러 문화를 접하며 어려움과 필요성을 느꼈던 부분이요, 언어 능력과 방송으로 다진 기술까지 갖춘 터였다. 그는 2003년 아리랑TV 동기 몇 명과 ‘오라티오’라는 영어 커뮤니케이션 회사를 창업해 현재까지 파트너로 일하고 있다.

“제게 커뮤니케이션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이에요. 언어를 떠나 눈빛, 표정, 제스처 등 여러 요소로 상대방에게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고 상대방의 ‘언어’에 맞춰 본인이 원하는 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이죠. 기자는 사람을 만날 일이 많잖아요. 사람을 만나면서 새로운 얘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특권인데, 기자를 하면서 많이 해볼 수 있었죠. 글과 말로 표현하는 법도 배웠고요.”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몰라 방황했다’던 20대 청춘 나승연은 서른 살이 넘어 그렇게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갔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길이 열린다

나 대변인이 국민에게 확실히 각인된 시점은 더반에서의 평창 PT, 단 10여 분이다. 그 이전에도 여수 엑스포 등에서 유치 활동을 했지만 세상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묵묵히 길을 따라 살다가 그의 나이 41세인 지금, 세상의 중심에 섰다.

“‘모든 인연이 소중한 것 같아요. 사람을 통해 우연치 않게 길이 열리기도 하더라고요. 평창 유치 활동은 이전 여수 엑스포에서 저를 본 사무총장에게 연락을 받아서 시작했어요.”

나 대변인이 자신의 강점을 발견한 결정적 힘은 ‘부딪쳐보는 것’이었다. 경험을 통해 잘하는 것을 확인해나갔다.

“정말 많이 부딪치면서 배웠습니다. 현장에서 실제로 경험해보면서 이건 아니구나, 이것을 해야겠구나 선택했지요. 대학 시절 한국의 한 방송국에서 인턴 생활을 했는데, 그 경험이 없었으면 오랜 기간 한국 방송국에 취업하려고 했을지도 모르죠. 한국은행도 들어가 보지 않았으면 나와 맞지 않다는 것을 몰랐을 거예요.”

더반에서의 PT를 보면 하나도 떨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나 대변인은 ‘무대 공포증’에 시달린 적도 있다고 한다. 대학 시절 스피치 동아리를 통해서, 그리고 아리랑TV 방청객 앞에서 직접 진행을 하며 부족한 부분을 극복해나갔다.

“두려웠지만 부딪쳐보면서 ‘나도 할 수 있구나’를 깨달았어요. 경험이 강점을 발견하는 통로인 동시에 약이 되기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나 대변인은 대학생들에게 ‘고민하지 말고 뭐든 해볼 것’을 강조한다.

“좋아하는 것도, 두려워하는 것도 다 시도해볼 수 있는 시기가 바로 대학생 때예요. 그 시절만큼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때도 없잖아요. 하고 싶은 일이 없다고, 꿈을 모른다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해요. 여행이든 봉사활동이든 인턴십이든 일단 활동을 해보면 우연치 않게 길이 열릴 수도 있어요.”

나 대변인의 목표는 한국의 많은 장점을 잘 포장해서 해외에 알리는 것이다. PT에 관한 자신의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알려주는 일에도 관심이 있다. 당장 7년 후의 목표는 동계올림픽을 멋지게 치러내는 것이다.

“아직 한국의 아름다움에 대해 알릴 게 많이 있어요. 저뿐 아니라 앞으로 스포츠 외교 분야의 인력이 많이 필요해요. 대학생들은 한국을 넘어 세계를 상대로 꿈을 크게 품었으면 좋겠어요. 당당하게 가슴을 열고 외국인과 소통할 줄 아는 젊은이가 많이 진출했으면 좋겠습니다.”


->PT 준비, 기억에 남는 사람은?

모두 다 기억에 남아요. 연습을 통해 많은 부분에서 달라지는 것이 인상적이었고 ‘노력하면 다 되는구나’를 실감했어요. 다들 성공한 분인데도 잘 모르는 부분을 배우는 데 적극적이셨어요.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 영어로 해야 하나 한국어로 해야 하나 고민을 하셨는데, 한국말을 하면 IOC 위원들이 헤드폰도 듣지 않는다고 해서 영어를 선택했어요. 말씀하실 때 에너지가 대단했죠.

토비 도슨 선수는 영어를 잘 구사했는데 감정 표현이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탤런트 정준호 씨를 긴급 투입해서 코칭을 하게 했어요. 그런데 정말 확연하게 달라져서 저도 깜짝 놀랐어요.

김연아 선수는 실전에 더 강하더라고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법을 잘 알고, 표정 하나 눈빛 하나 쓰는 법도 한 번만 얘기하면 바로 받아들였어요. 배우는 속도가 놀라웠죠. ‘이래서 챔피언이구나’ 했어요.


->영어를 잘하는 비법?

12년간 해외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간혹 한국에 들어올 때는 영어 실력이 떨어지곤 했어요. 그래서 학습지도 하고, 소리 내서 책 읽기도 했어요. 뉴스나 드라마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나 정해서 따라 읽는 게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사실 외국어 익힐 때 제일 좋은 방법은 그 나라 이성 친구를 사귀는 것인데요. 굳이 이성 친구가 아니어도 친구들을 많이 사귀면 큰 도움이 되죠. 요즘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외국인들이 많이 와 있잖아요. 그들도 우리가 다가가면 좋아할 거예요. 서로 부족한 것을 배우고 또 알려주세요.


글 이현주 기자 charis@hankyung.com
사진 서범세 기자 joycin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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