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스케치] 그 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휴먼 라이브러리

이 도서관에서는 이런 질문이 어색하지 않다. “싱글맘 책 읽을 수 있나요?” “흑인 책은요?” 사람이 책이고 책이 곧 사람인 도서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2000년 시작돼 세계 40개국으로 전파된 휴먼 라이브러리(Human Library)의 이야기다.

이곳에선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살아 있는 책’을 만날 수 있다. 성소수자, 장애인, 페미니스트, 학생운동가, 싱글맘, 흑인 등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기꺼이 한 권의 ‘책’이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난 5월 11일 국내에서 첫 번째 휴먼 라이브러리 행사가 열렸다. 3일간 펼쳐진 행사에 150여 명의 독자가 다녀갔다. 기자도 독자의 한 명으로 도서관을 찾았다.

휴먼 라이브러리(Human Library) 행사가 열린 서울 성북구 고려대 중앙도서관에는 흰색 티셔츠를 맞춰 입은 10여 명의 학생이 모여 있었다. 행사를 기획한 고려대 문화이벤트 기획 동아리 KUSPA 회원들이다. 화이트보드에 대출 가능 책 목록을 적어 내려가던 오하연(고려대 사회 4) 팀장이 다가와 파일 하나를 건넸다.

“저희가 브레인스토밍하면서 만든 카탈로그예요.” 펼쳐 보니 성소수자, 싱글맘, 장애인, 학생운동가, 페미니스트, 멘사 회원, 시인, 모델, 슈퍼모델 등 ‘대출’할 수 있는 ‘책’ 목록이 나타났다. 각각의 인물에 대해 사람들이 가질 법한 고정관념이 적혀 있었다.

예를 들어 ‘성소수자(게이)’라는 단어 밑에는 ‘여성스러운’ ‘분홍 스키니진’ ‘여자친구가 많은’ ‘된장남’ ‘과다 스킨십’과 같은 단어가 따라오는 식이다. 휴먼 라이브러리를 찾은 독자들은 카탈로그를 열어보고 마음에 드는 책을 선택할 수 있다.


오 팀장은 영국 교환학생 시절 휴먼 라이브러리 행사를 처음 접했다. “종이책 대신 살아 있는 사람을 빌려준다는 게 재밌었어요. 다양한 연령, 성별, 직업,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과 만나 대화하며 이해의 장을 넓히자는 취지에도 공감했고요.”

국내에서 ‘리빙 라이브러리’ 등의 이름을 달고 비슷한 이벤트가 기획된 적 있지만 코펜하겐 본사의 라이선스(license)를 받아 공식 행사를 치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로비에는 이미 10여 명의 ‘책’과 독자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성소수자 책의 자리로 찾아갔다.

첫번째 독자 대학생 S 씨는 커밍아웃(coming out)한 동성 친구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대표인 박재경 씨가 ‘책’이 되어 그의 질문에 답했다.

“저도 33세 전까지는 제 자신을 부정했었어요. 친구는 저보단 빠른 편이네요.”

그는 “성 정체성이 다를 뿐 성소수자도 일반인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라며 “사회적 시선에 위축된 친구와 고민을 나누기 위해 노력하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방송을 통해 커밍아웃한 뒤 직장에서 긴급회의가 열렸던 에피소드, 인권 모임에서 활동하며 용기를 얻어 부모님에게 고백한 이야기도 이어졌다.

약속된 시간이 지나고 S 씨는 밝은 표정으로 일어섰다. “딱딱한 행사일 줄 알았는데 재밌게 얘기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도 전했다.

3일간 치러진 이 행사에서 모두 22명의 책이 150여 명의 독자를 만나고 돌아갔다. 책과 대화를 나눠본 독자들의 반응은 “시간 가는 걸 잊을 정도로 참신하고 재밌다”는 것.

유용재(고려대 사학 3) KUSPA 회장은 “낯선 이와 1 대 1로 대화하는 형식이 한국인의 정서에 맞을지 고민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고 말했다. 그는 “‘살아 있는 책’과 대화를 나누며 내가 어떤 편견을 갖고 있는지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글·사진 김보람 기자 bramvo@hankyung.com│사진제공 KU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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