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ICA 공동기획] “2년의 젊음 바쳐 평생 꿈 찾았어요”

해외봉사에서 천직을 찾다(3)

“누구나 인생에 한 번쯤은 터닝포인트가 찾아오잖아요. 제게는 KOICA 해외봉사가 그랬던 것 같아요.” 청정원(대상)에서 근무하는 경준영 씨는 5년 전인 대학 3학년 때 떠난 파라과이 해외봉사를 잊지 못한다. 봉사에 큰 뜻을 품고 파라과이에 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구의 반바퀴를 돌아 찾아간 타국에서 2년간 홀로 지냈던 시간은 그 나라의 냄새까지 생생히 기억할 정도로 그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오감(五感)으로 느낀 해외봉사. 그 이야기를 공개한다.

2006 년 7월 4일 파라과이 공항. 짧은 머리의 20대 청년이 배낭을 짊어지고 씩씩하게 걸어나왔다. 짐을 내려놓자마자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아, 덥다”. KOICA 해외봉사단원으로 파라과이를 찾은 스물셋 대학생 경준영 씨다.

대학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하던 그는 친척의 소개로 군복무를 대체할 수 있는 KOICA 국제협력봉사요원 제도를 알게 됐다. 어학연수를 겸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지원했지만 해외봉사에 대한 소명이 큰 것은 아니었다. 첫 번째 시험은 낙방. 1년 뒤 한 번 더 도전한 시험에서 그는 국제협력봉사요원에 선발됐다. 한국에서 합숙 연수를 하며 해외봉사에 대한 기본 개념을 익혔다.

파라과이에 가는 데 장장 3일이 걸렸다. 직항 비행기가 없어 호주와 칠레를 경유해야 했다. 그만큼 먼 나라에서 생활을 시작한 그의 마음속에는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했다. 파라과이의 첫인상은 지저분하다는 것.

가게에서 산 초콜릿을 뜯었을 때 개미가 기어나왔던 장면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남미 사람들은 마테차를 즐겨 마시는데, 빨대 하나를 꽂아 여러 사람이 돌려 마시는 모습도 충격이었다.

하지만 ‘아미고(Amigo·친구)’라고 부르며 다가오는 사람들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보름 정도가 지나니 빨대를 같이 쓰는 것이 익숙해졌다. 빠르게 파라과이의 문화에 스며들어간 것이다.

경 씨가 배정받은 근무지는 수도인 아순시온에서 3시간가량 떨어진 ‘코로넬 오비에도’라는 도시의 시청. 처음 일주일은 모두가 동양에서 온 외국인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가 알게 된 것은 남미 사람들의 인식에 뿌리내린 동양인에 대한 우월의식이었다.

“저를 ‘치노(중국인이란 뜻으로 동양인을 비하하는 말)’라고 부를 땐 기분이 나쁘기도 했어요. 일을 해보려고 해도 ‘어린 학생이 뭘 하겠어’ 하는 시선이었죠.”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그가 배정받은 곳은 기획부서가 아닌 시청의 민원실. 개인 책상도 없는 곳에서 가만히 앉아 있다가 퇴근하는 생활이 반복됐다. 자괴감이 들었다고 했다. “그곳에 가면 도와줄 사람이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없었어요. 대학생 신분으로 큰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요.”

경 씨가 겪은 어려움은 해외봉사를 떠난 단원들이 초기에 흔히 경험하는 일이었다. 그는 “한두 달이 지나자 이제는 스스로 나서기 시작해야 할 때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시작은 간단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일,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었다.


책상도 내주지 않던 시청 직원들, 사업 성공하자 “잉헤니에로!”

현지에서 봉사 아이템을 생각할 때 대부분은 컴퓨터를 사주거나, 강의실을 짓는 등 기부 사업을 떠올린다. 하지만 경 씨는 현지인들이 실질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을 고민했다. “제 전공인 식품가공을 현지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니 ‘잼’을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남미의 풍족한 농산물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거든요.”

제안서를 들고 시청, 농협, 농림부를 돌아다니며 관계자들을 만났다. 시청과 농협에서는 고개를 저었다. 농림부에서 만난 위생사 출신의 직원만이 지원을 약속했다. 한국 돈 200여만 원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현지 마을을 찾아가 잼 가공 사업에 참여할 수혜자를 정하고 잼 만드는 법을 직접 가르쳤다. 사업 수완이 부족한 마을 주민을 위해 라벨 만드는 법, 장부 관리하는 법까지 설명했다. 한 병에 2000원씩 판매한 잼 수익의 80%가 주민에게 돌아갔다. “적은 돈이었지만 자립에 도움이 되고, 현지 주민의 삶이 실제로 변화하는 것을 보니 뿌듯했어요.”

7~8개월이 지나자 서서히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경 씨의 제안을 외면했던 시청에서 거꾸로 협찬을 제안해왔다. 잼 가공 사업의 기증식이 열린 날에는 현지 방송국에서 찾아와 인터뷰를 하자고 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를 보고 “잉헤니에로(Ingeniero)”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잉헤니에로’는 남미에서 이공계 학사나 석사학위를 받은 높은 신분의 사람을 부르는 말이다. 잼 가공 사업의 성공으로 어린 학생이 공학자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해외봉사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의 친구들은 대부분 취업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다. “한국은 너무 많이 변했는데 나만 제자리인 것 같아 역(逆)문화 충격을 느꼈다”는 경 씨. 돌아온 지 한 달 만에 그도 취업준비생의 삶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초조하지 않았다. 파라과이에서 보낸 시간이 그의 마음속에 명확한 목표와 꿈을 새겨주었기 때문이다.

“해외봉사를 떠나기 전에는 졸업하고 식품생산 분야나 연구소로 취업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현지에서 외국인들과 일하면서 해외영업 분야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죠.”

면접에 갈 때마다 그의 KOICA 해외봉사 경험은 큰 관심거리였다. ‘왜 공대생이 해외영업부서에 지원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2년간의 해외봉사를 통해 느끼고 배운 점을 솔직하게 답했다. 마침 영어와 스페인어가 가능한 식품 전공자를 찾고 있던 청정원(대상)에서 그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졸업도 하기 전 대기업 해외영업부서에 당당히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파라과이에서 해외봉사를 한 이후 가장 많이 변화한 것은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라고 그는 말한다.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와 달리 느긋하게 인생을 꾸려가는 것이 행복일 수 있음을 알게 됐다는 것.

그러나 여유로운 삶의 방식이 게으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지인과 직접 부딪치며 일을 해본 경험은 진취적으로 해외영업 일을 풀어나가는 데 도움이 됐다. “지금도 힘든 일이 있으면 항상 생각합니다. ‘내가 파라과이에서도 일했는데 이것쯤 못하겠어?’ 해외봉사 경험이 저를 강하게 바꿔놓았어요.”

현재 바이오(BIO) 글로벌 사업본부에서 일본, 미국, 유럽을 대상으로 식품 소재 수출을 담당하고 있는 그의 다음 꿈은 언젠가 중남미로 돌아가 다시 일을 해보는 것. “파라과이에 있을 때 즐겨 먹던 아사도(남미식 바비큐)를 꼭 다시 먹어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도 전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어떻게 해외봉사를 하나’ 하고 머뭇거린다면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아이디어는 현지에서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거든요. 중요한 건 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을 해주는 겁니다. 현지인과 잘 어울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죠.”

ㆍ 경준영 씨는…

경희대 식품공학과 졸업
2006~2008년 KOICA 파라과이 해외봉사단 활동
2009년 대상 해외영업 파트 입사
2011년 현재 대상 BIO글로벌사업본부 근무


글 김보람 기자 bramvo@hankyung.com│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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