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 나의 인생] "지레 겁먹고 주저앉지 말것, 뭐든지 해볼 것!"

조윤선 한나라당 의원

1994년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2002년 한나라당 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 2007년 한국시티은행 부행장,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조윤선 한나라당 의원의 이력은 화려하다. 한 가지만 하기도 힘들다는 변호사와 기업인, 정치인 등 다양한 직업 세계를 넘나들었다.

대학 시절엔 외교학을 전공했고, 예술에 대한 관심이 지극해 오페라에 관한 책을 썼다. 법·정치·금융·문화 영역을 오가며 서로 다른 것의 융합을 뜻하는 ‘컨버전스’를 몸소 실천한 셈이다.

그는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에 소속된 이후 ‘문화산업’에 새롭게 관심을 두고 있다. 문화로 성장 동력을 일구는 것이 목표다. 조 의원을 만나 도전의 연속인 삶에 대해 들어보았다.

조 의원을 찾아간 때는 국정감사로 한창 바쁜 10월 중순이었다. 없는 시간을 쪼개 만든 인터뷰인지라 약속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질문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그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안녕하세요. 조윤선입니다.”

첫인상이 예상과는 달랐다. 거친 정치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환한 미소와 부드러운 말투였다. 사람을 많이 상대해본 내공이 묻어났지만 그보다는 이웃집 언니같이 편안한 느낌이었다. 내면이 잘 정돈된 사람에게서 나오는 여유라고 할까. 인터뷰 앞뒤로 스케줄이 가득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마침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 소나타’가 들려왔다. 그는 오디오 볼륨을 높였다.

“이 가을에 잘 어울리는 곡이죠.”

천천히 흐르는 묵직한 첼로 선율. 문을 열기 전의 부담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예술은 여유를 가져다준다’는 그의 지론이 눈앞에서 증명되고 있었다.

한때는 피아니스트 꿈꿔

대한민국 엄친딸로 불리는 그지만 오히려 어린 시절엔 주변의 엄친아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어머니가 학부모 모임에 나가셨는데, 줄곧 어머니 친구의 아들 얘기를 하셨어요. 사법고시에 여러 번 떨어졌을 때도 ‘다른 사람들은 유학을 간다더라’ ‘뭘 한다더라’ 하는데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조 의원은 어린 시절 한때 ‘피아니스트’가 되는 게 꿈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못 이룬 꿈이기도 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길지 않았다. 절개수술까지 고려했지만 결국 뜻을 접고 말았다. 중학교에 진학해 영어를 배우면서는 ‘외교관’을, 고등학교 땐 집안 어른들 뜻에 따라 ‘의사’를 생각해보기도 했다. 정작 대학 원서를 쓸 때는 OMR 카드 덕에 학과를 결정했다고 한다.

“원래 점수에 맞춰 법학과를 쓰려고 했는데 OMR 원서를 쓸 때 자꾸 틀리는 거예요. 마침 외교학과에 다니는 선배를 보면서 재밌게 공부한다는 생각을 했고 신의 계신가보다 했죠. 어렴풋한 꿈은 있었어도 그 당시만 해도 직업에 대해 깊이 생각하진 않다 보니 그렇게 사소한 것에도 의미를 부여했던 것 같아요.”

대학에서 그는 다시 법학의 매력에 빠졌다. ‘사회과학은 천재 한 명이 자신의 틀로 사회 현상을 해석하는 학문이지만 법은 이론이 실무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그중에서도 로펌 변호사가 잘 맞을 것 같았어요. 경영과 접목되는 부분도 좋아 보였고요. 변호사를 하려면 사법고시를 봐야 해서 그렇게 준비를 시작했죠.”

여성 첫 김앤장 변호사·첫 여성 대변인의 비결은?

커리어를 쌓을 때도 꿈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꼭 뭘 해야지 해서 시작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 공부를 하다 보니 변호사를 알게 되고, 변호사가 되려면 사법고시를 봐야 하고, 그런 식이었어요. 일을 시작한 후에는 사람들이 이런저런 제안을 해왔어요.”

특히 씨티은행에서 일한 것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법조계에서 13년을 일한 후 돌연 금융권행이라니.

“부행장이지만 법무본부장으로 일하는 거였어요. 금융 쪽은 처음이고 로펌에 좋은 후배들도 많았기 때문에 잠시 고민은 했지만 회사에서 경영을 하며 살아 있는 법률 업무를 하는 것도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죠.”

조 의원의 프로필에서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 김앤장 법률사무소 첫 여성 변호사, 선대위 최초 여성 대변인, 한나라당 최장수 대변인이 그것이다. ‘이 일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확고한 목표가 없었음에도 그는 때론 선두주자였고, 여성 리더였다. 참 아이러니하다.

“새롭게 시도하는 것을 좋아해요. 로펌에서 새롭게 소송 관리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고 여러 가지 제안을 많이 했어요. 마치 집안 살림을 하듯이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죠. 일을 하면서 빈 곳이 있는데 그것을 채워주면 다른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되거든요.”

무슨 일을 하든지 주인 의식을 가지고 일의 핵심을 파고든 것이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이 점차 일을 맡기고 스카우트 제의를 해왔다. 때로는 꿈과 열정보다 실행과 책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어디에서나 배움의 자세로

이 모든 것은 그의 마인드가 만들어낸 결과다. 바로 ‘모든 일을 통해 배우겠다’는 태도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반드시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이다.

“‘할 줄 아는 모든 것은 로펌에서 배웠다’라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어요. 처음엔 주어와 서술어도 잘 안 맞았는데 선배들이 의견서 쓰는 것을 보면서 문장 쓰는 법을 배웠어요. 그야말로 도제식이었죠. 1년차 때는 번역을 리뷰하거나 오타가 없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많이 했어요. 힘들고 귀찮아도 벽돌을 쌓듯 했기 때문에 섬세한 것까지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겼어요.”

특히 설득하는 법을 알게 된 것이 큰 수확이었다. ‘조직의 문화에 맞는 의사 전달방식을 택하지 않으면 낯설고 더디게 전달된다는 것’을 부딪치며 배웠다고 한다.

“계약 협상 자리에 많이 나갔어요. 양 당사자가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으면 협상이 안 되거든요. 그런 곳에서 타협하고 설득하는 법을 배웠는데 지금 국회에 와서 보니 가장 필요한 능력이더라고요.”

씨티은행에서는 세계적인 기업의 경영 시스템을 볼 수 있었던 점이 좋았다. 국내외에 다양한 네트워크를 쌓는 데도 도움이 됐다.

“제 신조가 ‘모두가 다 스승이다’예요. 도제식으로 배운 것이 습관이 되니까 이제는 책보다 사람한테 많이 배우게 되는 것 같아요. 20~30년 쌓인 노하우를 빠른 시간 안에 듣고 배우는 것에서 보람도 느껴요.”


퍼즐처럼 다양한 삶의 색깔, 그리고 조화

조윤선에게 정치란 무엇일까?

“뭔가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는 창조 작업과 같아요. 늘 새로운 이슈가 등장하고, 어떤 판단과 결정을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실제로 꼭 관철해야 하죠.”

조 의원은 2002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선대위 대변인으로 활동한 후 2008년 다시 한나라당 대변인을 맡았다. 집권 여당이 바뀐 후 국회가 극단으로 대립하고 있던 때다.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굉장히 많은 노력을 했어요. 2년 가까이 대변인을 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했어요. 대변인은 실체가 없는 당의 입장을 말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 좌표를 찍느냐 결정하는 것이 중요해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우리 당을 좋아하게 만들까, 찬성하게 만들까를 고민했죠. 자신을 드러내려는 행동은 하지 않았어요.”

또한 “일부 국민을 속일 수 있어도 국민 전체를 영원히 속일 순 없다”는 에이브러햄 링컨 전 미국 대통령의 말을 실감했다고 한다. 집단 이성으로서의 국민은 언제나 진실을 알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그렇기 때문에 정치인이 많이 알아야 하고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봐요. 여러 사람의 제안이나 전문가 의견을 듣고 공부하고 또 소화해야 하죠. ‘이제까지 쌓았던 경험과 지식은 한정된 전문 분야였구나’를 깨달았고 앞으로 그릇을 더 키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마지막으로 궁금한 점. 그동안의 경력이 정치를 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만약 로펌에만 있었으면 지금 여기까지 오는 게 어려웠을 것 같아요. 적기에 맞는 곳에서 일했다고 생각해요. 젊었을 때 일하기에는 로펌이 적격이었고 회사는 다양성 있는 조직이고 정치는 그야말로 다양한 사람을 대변하는 일이거든요. 점차적으로 현재를 향해 온 것 같아요.”

퍼즐 조각은 각기 다른 색을 띠고 있다. ‘단풍’ 하나를 표현하려 해도 붉은빛이, 때로는 푸른빛이 필요하다. 서로 다른 조각과 색이 연결되고 제자리를 찾아가면서 퍼즐은 비로소 ‘작품’이 된다. 아직 40대 중반의 젊은 나이, 조 의원의 삶에서도 이와 비슷한 느낌이 났다.




이현주 기자 charis@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 joycin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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