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정은의 달콤살벌 연애 코치
며칠 전 한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풉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 젊은 트로트 여자 가수가 노래 제목을 ‘줄까 말까’로 정하려고 했더니 심의에 걸리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사실 옆에 있던 다른 출연자들이 “줄까 말까가 왜 걸려요?”라고 짐짓 시치미를 떼며 물어보는 모습이 더 코믹했다. 아마 그 노래의 작사가는 이런 반응 내지는 사람들의 묘한 상상을 모두 계산에 넣은 채 작사를 했을 것이다.“줄까 말까 고민하다 그 사람 영영 떠나요”라는 가사를 보면 이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결국 이 노래에서 ‘준다’는 행위의 목적어는 ‘마음’ 같지만 ‘몸’이라는 것, 당신도 알고 나도 알고 세상이 다 아는 뭐 그렇고 그런 이야기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살짝 가사에 시비를 걸고 싶어진다. 엄밀히 말하면 가사가 아니라 여전히 섹스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고 싶어진다.
물론 섹스는 어떤 면에서 스스로의 몸을 ‘허락’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스킨십을 통해 교류하고, 서로를 느끼는 것이 아름다운 권리이고 쾌락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 소중한 관계로 진전하기 위해 ‘허락’한다는 의미가 분명히 있다는 거다. 하지만 이것은 섹스를 ‘준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얘기다.
섹스를 ‘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몸을 ‘허락’하는 것과는 많이 다른 이야기라는 거다. 섹스를 ‘몸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두 사람은 평등한 관계가 될 가능성을 상당 부분 잃어버린다.
일단 여자는 소중한 것을 말 그대로 줘버렸기 때문에 뭔가 더 큰 걸 바랄 가능성이 커진다. 최악의 경우 “내가 너한테 이걸 줬는데, 네가 감히 나를 소홀히 대해?”라는 생각으로 남자에게 부담을 주는 여자가 될 수도 있다.
섹스를 ‘줬다’고 생각하는 여자는 결국 자기 딴엔 꽤 중요한 걸 주고 본전도 못 찾는 가혹한 운명의 주인공이 될 가능성이 높다. 섹스를 ‘그녀가 내게 줬다’고 생각하는 남자 역시 별로 좋을 것이 없다.
여자가 자신에게 뭔가를 주었고 자신이 그것을 취했다고 생각하는 남자는 스스로 100% 감지하지 못하더라도 일종의 목표가 완성된 것 같은, 즉 게임의 스테이지가 클리어된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이럴 경우 그녀와 섹스 횟수가 늘어날수록 권태가 찾아오는 것은 시간문제고, 그녀에 대해 더 자세히 알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는 일도 생긴다.
섹스는 커뮤니케이션의 한 방식일 뿐
연애 칼럼을 처음 쓰기 시작한 9년 전에 비하면 많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섹스를 일종의 거래로 인식하는 남녀가 많다. 그때나 지금이나 “남자친구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거냐고 화를 내면서 자자고 하는데 허락해야 하나요?”라고 사연을 보내오는 여자들이 존재하니까.
물론 어떤 행위에 어떤 가치를 부여할 것인지는 철저히 개인의 자유에 관한 문제지만, 적어도 섹스를 서로 간의 거래가 아닌 커뮤니케이션의 한 방식으로 인식할 때 두 사람의 관계가 더 발전적이고 건강하게 자리 잡을 거란 사실만은 확실하다.
지금 당신과 그의 섹스는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 한 번쯤 곰곰이 생각해보라. 주고받는 것? 아니면 가장 친밀하고 드라마틱한 커뮤니케이션? 어느 쪽에 가까운지에 따라 당신과 그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현명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결국 현명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는 것이 아닐까? 더 이상 ‘달라’고 말하는 남자친구에게 ‘줄까 말까’를 고민하지 말자. 가장 친밀한 순간을 함께한 그녀에게 ‘받았다’는 착각도 하지 말자. 단지 두 사람은 뜨겁고 행복한 몸의 대화를 나누며, 한 번 흘러가면 다시 안 올 젊음의 순간을 아름답게 장식했을 뿐이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곽정은
‘코스모폴리탄’ 피처 에디터이자 연애·성 칼럼니스트
‘연애하려면 낭만을 버려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