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리포트_0.1% 직업의 세계] ‘물’아일체, 그것이 나의 삶

이제훈 워터소믈리에(쉐라톤그랜드워커힐호텔 매니저&소믈리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라는 말의 정확한 뜻은, 교양과 수양을 쌓은 사람일수록 ‘겸손해야 한다’가 아니라 ‘겸손해진다’이다. 벼가 익을 때까지 그 누구보다 최선을 다 했으면서도 정작 무르익자, 또 다른 곳에서 초심으로 새로운 경작을 시작한 사람. ‘워터소믈리에’라는 생소한 직업으로 다시 땅을 고르는 이제훈 국가대표 워터소믈리에를 만났다.



Profile
쉐라톤그랜드워커힐호텔 매니저&소믈리에
한국워터소믈리에협회 회장
한국국제소믈리에협회 부회장
한국수자원공사 워터소믈리에 자격인증 심사위원
Korea Wine Challenge 심사위원
2007, 2009, 2010, 2011 한국 국가대표 와인소믈리에
2011 한국 국가대표 워터소믈리에


이 제훈 소믈리에를 인터뷰하러 가는 길에 기자의 5년 전 추억을 떠올려 보았다. 국내외 각종 와인소믈리에 대회의 톱랭커, 공신력 있는 심사위원, 기업·학교·호텔의 인기 강사 등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던 그를 만났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와인에 대한 그의 열정과 노력을 기억하는 기자로서는 ‘워터소믈리에’로 다시 만날 그가 무척 궁금했다.


잘 지내셨나요? 오늘은 ‘워터소믈리에 이제훈’을 만나러 왔습니다.
이렇게 또 인연이 이어지네요. 반갑습니다. 물론 지금도 와인소믈리에 일을 하고 있지만 2011년부터는 워터소믈리에로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제 자신이 ‘소믈리에(sommelier)’라는 직업 자체에 큰 매력을 느끼기 때문에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수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워터소믈리에, 어떤 직업인가요?
다양한 물의 종류와 특성을 이해하고 고객에게 최적의 물을 추천해주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물에 대해 많이 안다고, 고객의 특성을 빨리 파악한다고 워터소믈리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객을 리드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철저히 고객을 위해 배려하고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고객 취향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게 워터소믈리에의 본질입니다.

저는 늘 말합니다. “어느 가격대의 물을 찾으시나요?”라는 질문과 “요즘은 이 물이 잘 나갑니다”라는 안내를 하는 워터소믈리에는 믿지 말라고요. 자연스럽게 고객의 물맛을 찾아주는 사람, 그게 바로 워터소믈리에입니다.


워터소믈리에를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2000년대 초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당시엔 ‘물을 골라 먹는다’는 건 레스토랑에서도 이례적인 일이었죠. 그런데 외국 손님들이 이탈리아 물을 주문하시는 거예요. 식전에 스파클링 워터를 마시고 싶으셨던 거죠. 음식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보통 식전에 스파클링 워터를 조금 마셔주면 침샘을 자극해 음식을 더 풍부하게 느낄 수 있거든요. 그때 ‘아, 물도 이젠 마리아주(mariage·음식과의 궁합)를 생각하며 마시는 시대가 왔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어떤 자질과 노력이 필요할까요?
전 ‘애티튜드(attitude)’를 가장 강조합니다. 모든 일이 다 그렇겠지만 최선을 다 하고자 하는 마음과 자세가 없으면 그 어떤 일도 제대로 해낼 수 없겠지요. 성실·근면·창의성·고객관리능력 등도 필요해요. 10년 정도 열심히 일해서 나중에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른다고 해도 성공적인 워터소믈리에가 되려면 창의적인 프로모션을 기획하고 단골 고객을 확보·유지해 나갈 묘안을 짤 수 있어야 해요.


물에 얽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면서요?
평소에 친분이 있던 주한 독일대사 부부에게서 코르크가 있는, 투명한 액체가 담긴 병 하나를 선물 받은 적이 있어요. 전 스파클링 와인으로 생각했지요. 나중에 다른 고객들 앞에서 내심 자랑하며 코르크를 땄는데 아뿔싸, 그냥 생수였어요. 투명한 데다가 코르크가 있어서 착각했던 거죠. 전 당황해서 ‘벌꿀술인 줄 알았는데 잘못 가져왔다’며 둘러댔는데, 같이 있던 분들이 웃으며 여유롭게 넘어가주셔서 다행이었어요.


워터소믈리에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사람이 재산이다’는 말을 얼마나 믿으시나요? 워터소믈리에만큼 그 말의 위력을 실감하는 직업은 없다고 생각해요. 정말 다양한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물론 워터소믈리에는 그들을 고객으로 응대하는 입장이지만 그들과 함께하는 ‘인생학(人生學)’ 공부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워터소믈리에는 인증서가 아니라, 한국수자원공사에서 발급하는 ‘자격증’입니다. 나라에서도 물 자체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장기적으로 그것을 제대로 평가할 사람을 키우려 한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워터소믈리에를 반드시 두려는 레스토랑이 많지 않지만, 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수록 그 수요는 점점 많아질 것입니다.


남모를 고통도 있을 것 같은데요.
겉으로 보기엔 화려할 수 있지만 치열한 자기관리의 연속, 그게 바로 워터소믈리에의 삶입니다. 평소에도 술과 커피는 거의 마시지 않고 살이 찔 만한 것들도 웬만하면 입에 대지 않아요. 몸이 둔해지면 맛을 느끼는 모든 감각도 덩달아 둔해지거든요. 대회를 앞두고 있을 땐 김치, 된장, 간장 등도 먹지 않고 열흘 중 아흐레는 심심한 볶음밥만 먹습니다. 혀의 감각을 최대한 섬세하게 유지하려는 것이지요.


보람을 느끼는 때는 언제인가요?
저에게 배우겠다고 꾸준히 찾아오는 어린 학생들의 생기 있는 눈빛을 볼 때마다 초심을 되새기곤 합니다. 한번은 어떤 학생의 어머니께서 갑자기 저를 찾아오셨어요. 그러고는 다짜고짜 자신의 딸을 소믈리에로 키우고 싶은데 꼭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전 6개월간 성심성의껏 가르쳤고 결국 그 딸을 소믈리에대회 우승까지 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최고가 되기 위해 참 열심히 달려왔어요. 그래서 적지 않은 스포트라이트도 받고, 최고는 아닐지 몰라도 꽤 인정받는 소믈리에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 그 스포트라이트는 후배들을 위한 것이고, 제 자신도 후배 양성에 더 많은 보람과 감동을 느끼고 있습니다.


워터소믈리에가 되고자 하는 이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워터소믈리에는 분명 매력적이고 유망한 직업입니다. 하지만 어느 직업 세계나 그렇듯 단기간에 빛을 보는 것을 바라면 안 돼요. 직업적인 희소성과 가치는 충분하지만 지금 당장 워터소믈리에를 필요로 하는 곳은 많지 않거든요. 물에 관해서는 내가 최고가 되겠다는 마음가짐, 고객을 감동시키고 말겠다는 봉사정신 그리고 철저한 자기관리 신념을 갖고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물보다 더 투명하고 빛나는 워터소믈리에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대학생들에게 추천해주실 만한 물이 있을까요?
‘휘오순수’라는 물을 추천하고 싶어요. 기존 PET 수지의 30%가량을 식물성 소재로 대체하며 플라스틱 사용량을 감소시켜 가볍고, 다 마신 다음 쉽게 비틀거나 구길 수 있어서 쓰레기 부피를 줄이는 데도 도움이 되거든요. 또 이름 자체도 ‘순수’라서 아직은 때가 덜 묻은 우리 대학생들과도 어울릴 것 같아요.


워터소믈리에로서의 포부를 말씀해주세요.
후배 육성과 사회 환원. 이 두 가지가 저의 목표이자 숙명이에요. 우선 10년 안에 국내에서 워터소믈리에 세계대회를 개최해서 후배들에게 해외 진출의 발판을 마련해주고 싶고, 기업·학교 등과의 다양한 사회 환원 사업에도 참여해 ‘워터소믈리에’라는 직업을 알리면서 저의 재능을 좋은 곳에 나누고 싶어요.


글 박상훈 기자|사진 서범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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