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으로 이직한 인재들] 삼성·LG에서 못 이룬 꿈 스타트업에서 이룬 삼남매 아빠
입력 2021-08-27 11:22:53
수정 2021-08-27 11:22:53
‘삼쩜삼’ 만든 정용수 자비스앤빌런즈 CPO
[한경잡앤조이=강홍민 기자] “(스타트업이) 수평적 문화라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어요. 그래도 가장 달랐던 점은 대기업은 상대에 따라 말이나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가 있는 반면 스타트업은 1도 없다는 점이에요. 불만이나 이의제기는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고, 대표의 의견이라도 반대할 수 있는 분위기예요. 그리고 아주 사소한 결정이더라도 전직원이 모여 토론하고 결정하는 문화, 그게 스타트업이죠.”삼성과 LG를 거쳐 스타트업으로 이직한 정용수 자비스앤빌런즈 CPO는 ‘삼쩜삼’ 서비스를 기획해 소위 대박을 낸 인물이다. IT시대라 하지만 최근까지도 아날로그 업무방식을 고수했던 세무·회계분야에 삼쩜삼은 자영업자, 프리랜서 사이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는 서비스로 각광받고 있다. 이러한 세상의 변화가 과연 대기업에서 출발할 수 있을까.
잘나가던 삼성맨이 스스로 백수 선택한 까닭은?
2003년 12월 삼성전자 하드웨어 개발자로 입사한 그는 9년 간 삼성맨으로 근무하다 2012년 창업의 꿈을 안고 퇴사했다. 취준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삼성을 뒤로한 채 정글로 나온 그에게는 사실 딱히 이렇다 할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었다. 대기업을 동경하는 이들처럼 너도나도 하는 창업, 나도 한번 해보자는 마음에 사표를 던졌다.
“하드웨어 개발자로 삼성전자에 입사해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포지션이 바뀌면서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맡았어요. 삼성 앱스토어의 주요 기능을 만들기도 했고요. 소프트웨어 개발팀 리더로 일을 하다가 퇴사 1~2년쯤부터 창업을 해보고 싶더라고요. 주변에 대기업을 다니다가 창업한 후배들이 있었는데 내가 나가면 할 일이 있지 않을까 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나름의 청사진을 꿈꾸며 퇴사한 정 CPO는 여기저기 개발 품을 팔았다. 정확한 포지션이나 스타트업 경험은 없었지만 대기업에서의 노하우를 지인들이 운영하는 스타트업에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스타트업 특성상 10곳 중 10곳 모두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리스크가 큰 구조였기 때문이다. 방황의 시간을 보내다보니 지인들의 사업체가 하나 둘 씩 문을 닫기 시작했다. 그 무렵 둘째아이가 태어났다.
“정말 멋모르고 나갔다가 몇 개월을 방황했던 것 같아요. 내심 스타트업 판에 있다 보면 어디에선가 C레벨 자리로 모셔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죠.(웃음) 몇 개월째 수입이 없던 상황에서 둘째가 태어났어요. 조급해지기 시작했죠.”
다시 취업을 준비하던 그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연봉이나 직책이 이전 직장보다 좋은 조건이었다. LG전자 소프트웨어 개발팀 조직장으로 옮긴 그는 첫 직장에서의 절반인 4년을 보냈다. 퇴사의 이유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창업이었다.
“평소 아내에게 창업 이야기를 많이 했었어요. ‘이런 서비스는 어떨까, 지금 나와 있는 서비스를 이렇게 바꾸면 좋을 텐데···’ 라는 식이였죠. 셋째가 태어나고 아내가 복직을 준비하던 무렵에 아내가 말했죠. 창업을 하든, 공부를 하든, 시간을 줄 테니 하고 싶은 걸 해보라고요. 단, 육아는 제 몫이라더군요.”
가계부 잘 쓴 덕에 적성 찾아···
대기업 13년 경력 개발자, 스타트업 수습사원으로 입사
2016년 LG전자를 퇴사한 그는 세무·회계분야를 공부했다. 증권사를 다니던 아내보다 가계부를 잘 썼던 그에게 적성을 살려보라는 아내의 제안 때문이었다. 2년 간 공부와 육아를 병행하며 세무사 시험을 공부하던 그의 눈에 띈 건 세무·회계 시장이었다. 당시만 해도 세무사 사무실에서는 엑셀이나 종이 영수증, 장부로 일하고 있을 정도로 IT와 거리가 멀었다. 그는 이 분야에 IT 기술을 더하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개발자 성향을 살려 다양한 창업 아이템을 발굴했지만 경영경험이 없다는 그의 아킬레스건은 그때도 유효했다. 정 CPO는 리스크가 큰 창업보다 우회 길을 선택했다. 그가 생각한 아이템을 펼칠 수 있는 스타트업을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공부와 육아를 병행하면서 이력서를 넣었지만 면접은 고사하고 서류 광탈로 이어졌다. 자괴감에 빠져 있던 무렵 스타트업에 몸 담고 있던 후배의 주선으로 김범섭 자비스앤빌런즈 대표를 만났다. 생각하는 방향이 비슷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자비스앤빌런즈는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어요. 준비했던 서비스가 잘 안 돼 직원들도 많이 나갔었죠. 대표님과 이야기를 해보니 제가 생각하던 서비스와 비슷했어요. 저의 조건은 제 역량을 펼칠 수 있는 곳, 제가 스페셜리스트로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았거든요. 사실 현실은 경력단절에다 현장경험은 전무한 상태였지만요. 3개월 수습을 버티면 정직원이 되는 조건으로 자비스앤빌런즈에 합류했죠.”
성장 그래프가 확연히 보이는 스타트업으로 이직 강추
정 CPO 합류 이후 바닥을 찍고 올라 선 자비스앤빌런즈는 온라인 종합소득세 신고 서비스 ‘삼쩜삼’을 론칭, 올 상반기 고속성장을 이뤄냈다. 자비스앤빌런즈는 올 상반기 전년 대비 1324% 누적환급액을 기록, 누적 가입자 수 또한 2082% 이상 성장했다. 대기업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성장 경험을 스타트업에서 한 그는 인터뷰 내내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적극 추천했다. 물론 기준은 있었다.
“이제는 대기업이라고 해서 내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고, 스타트업이라고 해서 연봉과 복지 수준이 떨어지지도 않아요. 사업이 잘 안되더라도 언제든지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도 하고요. 꼭 스타트업일 필요는 없지만 내 실력이 커가는 걸 볼 수 있고, 노력이 더 빛나고 재미있는 곳이 스타트업이 아닐까 생각해요. 전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스스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가 결정되면 시간도 단축할 수 있을 것 같아요.”
khm@hankyung.com
[사진=김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