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에 빠져있을 때 받은 편지가 저에겐 따뜻한 온기였어요”

디지털 시대, 온기 우편함이 전하는 가치 ‘연결과 신뢰’

[한경잡앤조이=강홍민 기자 / 이아연 대학생 기자] “원래는 ‘따뜻한 우편함’이라고 짓고 싶었어요. 사회에 나갔을 때 평가받는 말들을 많이 들으니까 이 우편함을 통해서는 따뜻한 말들만 전해주고 싶었거든요.”

조현식(32) 온기 대표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라는 책을 읽고 익명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우편함을 생각해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본 내용을 현실로 만들어낸 것이다.


△조현식 대표가 직접 만든 첫 번째 온기우편함.



진심을 나누기 어려워진 사회 속에서 ‘심리적 안전망’을 꿈꾸다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에 우편함을 설치하고 싶었어요. 사람, 차가 너무 많으면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가 처음으로 온기 우편함을 설치한 장소는 삼청동 돌담길이다. 주변 환경에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내면에 집중할 수 있는, 그의 바람에 딱 맞는 공간이었다. 그 다음 설치 장소는 노량진과 신림동의 고시촌, 서울추모공원이었다. 하루에 두 세 마디도 하지 않는 고시생들, 소중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 뒤 그리움을 털어낼 시간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서였다. 그들이 마음 편히 얘기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었다며 조 대표는 설명했다.

현재 설치된 온기 우편함은 총 16개다. 최근 우정사업본부와 협의해 빨간 우체통 옆 온기 우편함을 세울 수 있게 되면서 10월 내 14개의 우편함을 추가 설치할 계획이다. ‘온기 우편함의 전국적 확산’은 온기로서 그가 이루고 싶은 목표다. 일상을 살면서 우울하거나 힘들 때 집 앞에 온기 우편함이 있어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있다면 ‘심리적 안전망’을 구축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온기 우편함을 이끌어 가는 온기 우체부는 오프라인 200명, 온라인 100명으로 총 300명이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오프라인에서 활동하는 우체부들은 화요일부터 일요일 저녁 시간에 편지 답장을 위해 한 공간에 둘러앉는다. 그들의 활동은 직접 답장할 편지를 선택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답장이 끝나면 다 같이 모여 활동을 공유하는 시간도 가진다.

우체부를 뽑는 기준에 대한 질문에 조 대표는 “사실 답장을 하다 보면 스스로 위로받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마음의 시선이 상대방에게 가 있는지, 자신에게 머물러있는지를 봐요.”라고 답했다. 모든 일이 나에게서 시작되는 것은 맞지만,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고 싶어 참여를 원하는 사람을 뽑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이 답장한 편지의 개수는 약 1만 5천 개, 답장 받은 이들 중에서 블로그, SNS를 통해 후기를 남기거나 ‘온기’로 다시 편지를 보내는 사람들도 많다.

“온기님들이 적어주는 댓글 혹은 답장을 보면 저희가 더 감사할 때가 많아요. 답장을 받고 나서 다시한번 블로그나 SNS에 방문해서 글을 남기는 거잖아요. 그게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온기님이 있냐는 질문에 조 대표는 2년 정도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받고 있는 한 고등학생 온기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중2 때 처음 편지를 보냈었는데 우연히 제가 답장하게 됐어요. 그때는 학업에 대한 고민이었어요. 편지로 서로 진로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공부에 대한 목표도 같이 세웠었어요. 온기 우편함은 항상 익명이기 때문에 편지 주인을 알려면 그분을 찾아야 하거든요. 저는 ‘햇볕’이란 별칭을 쓰는데, 그다음 편지를 보내줄 때부터 ‘햇볕’이라는 분한테 계속 보내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계속 받아서 답장을 해나가고 있어요.”

조 대표는 온기 우편함이 추구하는 가치로 ‘연결’을 뽑았다. 그는 이 가치가 온기들과 온기 우체부들의 만남에서 시작되고 진심을 나누기 어려워진 사회에 ‘신뢰’를 만드는 밑바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편지를 주고받는 그들이 모두 이 사회의 구성원, 이웃이기 때문이다.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이들로 구성된 온기 우체부와 그들에게 위로받은 ‘온기’, 연결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을 직접 만났다.

“바쁜 시기에 소중한 일을 하는 청년들, 배울 점이 많아요.”
온기 우체부 이혜빈(25·경기도 화성), 박진숙(61·서울 동작구)


△편지에 답장을 적고 있는 온기 우체부들.



Q. 온기 우체부로서 활동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이혜빈(이하 이) : “대학생 때 1년 동안 휴학을 했었는데 휴학 기간을 제가 하고 싶었던 활동으로 채우고 싶었어요. 그러던 중 대외활동 커뮤니티 앱에서 이 활동을 알게 됐어요. 대학교 전공이 심리학이고 꿈이 상담사이기 때문에 저와 딱 맞는 대외활동이라 생각해서 신청하게 되었고 작년 2월부터 활동하고 있어요.”

박진숙(이하 박) : “어느 날 TV를 보다가 온기 우편함 사연을 울면서 봤어요. 활동 지원을 하고 싶어 모집 공고를 찾아봤고 작년 6월에 지원했어요. 코로나 때문에 활동이 미뤄지다가 10월부터 참여하게 됐어요.”

Q. 다른 대외활동과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이 : “활동 기한이 없다는 게 큰 장점이에요. 그래서 오랫동안 활동하고 계시는 분들도 있고 마음만 된다면 정말 오래 할 수 있어요.”

Q. 가장 인상 깊었던 편지가 있다면요.
이 : “초등학생 친구가 적은 편지였어요. 학교 수업 시간에 지구온난화에 대해서 배웠는데 왜 지구를 지켜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내용이었죠. 그 편지를 딱 봤을 때 어른으로서 어린 친구에게 같이 사는 지구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막상 답장을 쓰려니 제가 제대로 알고 있는 지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래서 답장하는 동안 저도 공부하고 그 친구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을 쉽게 바꿔서 답장하려고 노력했어요. ‘우리가 지구를 잠깐 빌려서 쓰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같이 열심히 지구를 지켜보자’고 썼는데 열심히 환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겠죠?”

Q. 답장을 할 때 규칙이 있나요.
이 : “우체부 OT 교육 때 듣는 내용인데, 정답을 강요하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어요. 삶을 살아가는 데 정답은 없으니까요. 또 그 이전에 온기님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스스로 판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물론 너무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요.”

Q. 손편지와 관련된 추억이 있나요.
이 : “고등학교 3년 내내 기숙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았어요. 매일매일 공부를 해야 하는 고등학생 입장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응원이 정말 힘이 많이 됐었는데, 그 방식 중 하나가 손편지였어요 독서실 책상 위에 음료수와 편지 한 장을 놓고 가는 문화가 있었거든요. 그게 손편지에 대한 따뜻한 추억이에요.”

박 : “교사가 직업이었는데, 졸업하기 전에 고등학교 3학년 친구들을 위해 책을 사서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손편지를 책 앞장에 적어서 졸업하는 날 선물로 줬었어요. 10년 뒤 제자가 그 책을 들고 찾아왔어요. 잊고 지냈었는데 교사 때 추억이 생각나더라고요.”

Q. 디지털 시대에 손편지가 가진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이 : “SNS 같은 경우에는 일시적이고 잠깐의 사고를 통해 말로 배출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편지는 쓰고 지우는 행동을 반복하고 생각의 시간이 길다 보니까 사고를 키울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인 것 같아요.”

Q. 20대 청년 우체부들과 함께 활동하며 느낀 점은 무엇인가요.
박 : “활동 지원을 할 때 온기 우체부들의 나이가 많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와서 보니 젊고 어린 친구들이 많았고, 보고 깜짝 놀랐어요. 너무 바쁜 시기에 소중한 일을 하려고 한다는 게요. 하루 활동이 끝나면 답장한 내용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저런 사연에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배울 점이 참 많아요.”

우연히 만난 노란 우편함, ‘확실’한 위로를 전해주다.
온기 박보미(42·대전), 이혜주(25·안성)


△(위)덕수궁 돌담길에 위치한 온기 우편함 (아래)박보미 씨가 받은 5장의 편지(사진출처=온기 박보미 씨 제공)



Q. 온기 우편함으로 편지를 보내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박보미(이하 박) : “작년 3월, 늘 저만 바라봐주고 끊임없이 사랑을 표현해주던 남편이 암으로 제 곁을 떠났어요. 남편을 보내고 한참 깊은 슬픔에 잠겨있던 때,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가 우연히 온기 우편함을 발견하게 됐어요. 남편과의 마지막 서울여행 때 함께 갔던 곳이 정동길이라 저절로 발길이 그리로 움직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둘이 손잡고 걷던 길을 혼자 걷고 있으니 그리움이 더 커져서 눈물만 나더군요. 그때 노란 온기 우편함이 눈에 들어왔어요. 온기 우편함 편지지는 이미 동난 상태였기에 우연히 들렀던 전시회 팸플릿 한 페이지를 찢어서 편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어요. 편지를 쓰며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래도 실컷 울고 나니 속이 좀 시원해지더군요. ‘정말 답장이 올까?’ 반신반의했지만, 묘한 기대와 설렘까지 살짝 느끼며 온기 우편함에 편지를 넣었어요.”

이혜주(이하 이) : “늦여름 영화를 보러 간 종로 피카디리 1958 극장에서 우연히 온기 우편함을 발견했어요. 마침 영화 상영까지 시간이 남아 편지지와 볼펜을 들고 요즘 저의 소소한 고민을 적어보았죠. 무거운 고민거리보다는 사회 초년생으로서 느끼는 불안함에 대해 적었던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떤 지역에서 살 수 있을지, 이대로 일만 해서 내가 꿈꾸는 미래, 결혼은 할 수 있을지 불안하면서도 걱정되는 마음 말이에요.”

Q. 편지로 어떤 위로를 받으셨나요.
박 : “편지를 쓰고 얼마 후 두꺼운 노란색 편지가 정말 집으로 왔어요. 뇌까지 전이된 암 때문에 남편의 마지막은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였고, 그래서 저에게 아무 말도 전하지 못하고 떠나버렸죠. 그게 내내 너무 안타깝고 마음에 남았었는데 마치 온기 우체부의 손을 빌려 남편이 보내온 것 같은 편지가 왔어요. 진심으로 저를 걱정해주는 것 같은 무려 다섯 장의 정성 가득한 편지를 읽으며 정말 꺼이꺼이 울었어요. 마치 동화 속 얘기 같은 신기한 경험이었답니다.”

이 : “퇴근 후 우편함에 노란 편지 봉투가 있어서 설레는 마음으로 집으로 가져왔어요. 그 안에는 무려 3장의 답장이 있었고, 편지를 읽기도 전에 이미 따뜻함을 느끼고 있었어요. 편지지에서는 마치 친한 언니가 답장해 주는 것처럼 솔직한 위로의 내용들이 있었고, 또 지금의 내가 하는 고민은 나중에 자양분이 되어 저를 더 성장시킬 거라고 '확신' 해주셨던 문장이 기억에 남아요.”

Q. 온기 우편함의 특별한 점,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박 :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힘든 날이 찾아오죠. 지나고 보면 웃어넘길 수 있는 일도 때로는 세상의 모든 무게처럼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고요. 그럴 때 힘든 상황을 글로 적어보는 것만으로도 해소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나 그 상황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거든요. 게다가 누군가가 내 편에 서서 따뜻한 위로와 지지의 답을 해준다면 의외로 큰 힘이 될 수도 있고요. 온기 편지는 우편함에 편지를 넣는 사람, 답장을 보내는 온기 우체부 모두 익명성이 보장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속 깊은 이야기들이 오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답장에 동봉된 카드 (사진출처=온기 이혜주 씨 제공)



이 : “가장 큰 장점은 부담 없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 편지로 무언가를 보상받겠다는 느낌이 아니라 나의 고민을 진솔하게 적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었어요. 나에게도 솔직해지는 시간을 준 것이지요.”

Q. 온기 우편함을 이용해본 온기로서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박 : “‘세상을 떠난 남편에게서 온 편지’ 영화나 드라마에서 일어날 법한 일 같죠? 하지만 이런 마법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힘든 일이 있나요? 혼자 끙끙대지 말고 주변에 있는 노란 우편함을 찾아 모두 털어놓아 보세요. 힘이 되는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kh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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