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손해보지 않고 상생할 순 없을까?" [고참의 스타트업 생존기]

스타트업: 0에서 1을 만들어 내는 곳



스타트업의 혁신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세상에 유익한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이라고 믿는다. 나는 이를 “제로 투 원”이라고 부르는데, 말 그대로 0에서 시작해 1을 만든다는 의미다.

제로 투 원’이라는 스타트업 생태계 필독서가 있다. 페이팔 창업자 피터 틸이 쓴 책으로, 여기서 제로 투 원은 탁월한 기술로 시장을 장악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좋은 책이지만, 나는 틸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첫째 이유는, 혁신을 위해 꼭 시장을 장악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시장을 독점하면 기업의 이익은 극대화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리게 된다. 혁신적 기술로 시장을 지배한 많은 플랫폼 기업들이 종종 좋지 않은 평가를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악해지지 말자(Don’t be evil)’는 구호를 외치다가 꼬리를 내린 구글의 사례도 있다. 파괴하지 않고 상생하며 혁신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둘째, 혁신이 반드시 탁월한 기술에만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한국의 대표 유니콘 기업인 쿠팡이나 배달의민족이 성공한 배경에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파격적 사고와 시도, 이를 현실화한 적정한 기술이 있다.

아무도 뛰어들지 않던 곳에 기술과 끈기로 도전
수년 전 네이버를 떠나 내가 몸담은 ‘마켓보로’가 그런 기업 중 하나다. 창업자인 임사성 대표는 ‘우리 사회에 혁신이 꼭 필요한 곳’에서 사업을 펼치기로 결심했고, 요즘 같은 디지털 세상에 마치 외딴섬처럼 고립돼 있는 식자재 유통시장에 뛰어들었다. 임 대표는 과거 식당 운영 경험이 있는데, 당시나 지금이나 식자재 유통은 수기 및 외상 거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가 30년 식당 운영을 하셨기에, 나 역시 이러한 문제에 깊이 공감했다.

식자재 유통 시장은 연간 거래 규모가 60조 원을 넘으며, 그만큼 다양한 영역이 존재한다. 산지에서 출발해 시장이나 공장을 거쳐 어려 단계의 유통업자를 지나 최종적으로 식당에 배달된다. 육류와 채소류, 해산물, 공산품 등 종류도 매우 많다. 이 복잡한 시장을 디지털로 전환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탁월한 기술보다는 탁월한 성실함이다. 기술에 익숙하지 않은 각 단계의 유통업자들을 직접 만나 설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켓보로는 초기 시장 진입 단계에서 서울 가락시장에서 경매가 시작되는 새벽부터 유통업자들과 함께 짐을 나르며 전단지를 돌렸다. 직원 대부분이 개발자인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영업 인력을 많이 두고 있다. 이 정도로 현장에서 직접 뛰며 시장 개척을 하는 기술 회사는 마켓보로가 거의 유일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기술이 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디지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편하게 디지털 세계로 모셔 오려면 매우 정교한 기술이 뒷단에서 작용해야 한다. 얼마 전 창업 9주년을 맞아 마켓보로는 두 서비스인 식봄과 마켓봄을 통해 누적 거래액 10조 원을 돌파하는 경사를 맞았다. 차곡차곡 쌓아온 이 거래 데이터를 기반으로 지금부터는 더욱 진화된 기술로 혁신적인 서비스를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파괴하지 않고 상생하며 이루는 혁신
혁신은 기존 플레이어 누구도 피해 보지 않는 상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는 유통회사의 기존 배달망을 그대로 활용하기 때문에 광고비나 배달비를 둘러싼 갈등이 없다. 우리는 식자재 거래의 새로운 밸류체인을 만드는 게 아니라 기존 밸류체인 위에서 비효율적인 부분은 제거하고 디지털 기술로 새로운 가치를 더한다. 수기 거래로 인한 착오를 없애고 거래 과정을 간소화하며, 외상 거래를 줄여 이른바 불신 비용을 줄이는 것이 우리의 핵심 역할이다. 기존 플레이어는 그대로 영업을 지속하고, 우리는 그 영업이 더 효율적으로 이뤄지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마켓보로에 합류한 초기에는 과거에 하던 대로 '잘 만드는 것'에 집중했다. 하지만 스타트업에서는 '빠르게 만들고 개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원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완벽함에 집착하면 시기를 놓치게 된다.

대한 관점도 다르다. 능력은 기본이지만, 그보다는 시련을 이겨내며 끈기 있게 목표로 나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또 비평가보다는 직접 소매를 걷고 일할 사람을 원한다. “다른 데에서는 이렇게 안 한다”는 의견만 내는 사람들은 별 도움이 안 된다. 실제로 뛰어난 경력자가 합류했다가 문제만 지적하다 본인의 해결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바로 퇴사한 경우도 있다.

5년 동안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지금 맡고 있는 식자재 오픈마켓 식봄의 지난해 거래액을 전년 대비 2.6배 성장시켰다. 상품 등록 및 거래액 기준 국내 최대 플랫폼이 됐으며, 회원 수는 두 배로 늘어 국내 식당 사업자의 약 20%가 식봄 회원이다. 올해는 회사의 첫 흑자 전환을 기대하고 있는데, 예전에는 전혀 못 느꼈던 새로운 설렘을 경험하고 있다. 이전 회사에서는 매년 최대 영업이익을 갱신해도 큰 감흥이 없었는데, 적자에서 흑자로 가는 과정을 내가 직접 만들어 내고 있다니, 어느 때보다 기대가 크다.

회사가 아직 덜 알려진 스타트업이다 보니 식봄 고객센터로 전화해서 주문을 하겠다는 고객이나 회사를 찾아와 “사무실에 왜 식자재는 없고 개발자만 있냐?”고 묻는 분들도 있다. 이 모든 과정이 0에서 1로 가는 여정이다. 5년쯤 뒤 좋은 추억이 될 거라고 기대한다.

고참 님은 인문학과 광고를 전공했으나 IT 기술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첫 직장부터 과감하게 IT 업계로 뛰어들었다. 네이버에서 14년간 쌓은 성공적인 경력을 뒤로 하고 ‘더 치열하게 살고 싶다’는 열정에 이끌려 스타트업 ‘마켓보로’에 합류했다. 식자재 유통의 디지털 혁신을 추구하는 마켓보로의 핵심 서비스 ‘식봄’을 이끌고 있다.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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