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공인호 기자] 핀테크(FinTech) 시대가 무르익고 있다. 영업점이 아닌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예금과 송금을 하고 플라스틱 신용카드가 아닌 QR코드로 결제한다. 기술이 금융을 지배한다는 의미의 테크핀(TechFin)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은행의 진짜 경쟁 상대는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이라는 대형 시중은행 수장들의 목소리가 결코 가벼이 들리지 않는다.
'리딩뱅크' 아닌 '탈(脫) 은행' 외치는 은행장들, 왜?
국내 은행들의 ‘리딩뱅크’ 경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일까. 올해 새롭게 선임된 은행장들이 제시한 임기 중 목표는 수치(경영지표) 기반의 ‘리딩뱅크’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불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리딩뱅크 탈환(혹은 수성)’이 시중은행 수장들의 핵심 과제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난 10년 가까이 지속돼 온 4대 은행(KB국민, 신한, 우리, KEB하나) 중심의 경쟁 구도에도 균열의 조짐이 감지되고 있다.

디지털·데이터 기업이 목표…‘돈키호테적 발상’
지난 3월 새롭게 취임한 진옥동 신한은행장이 제시한 경영 키워드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이었다. 진정한 ‘디지털 기업’으로 변모하기 위해서는 업(業)의 본질에 대한 혁신이 선행돼야 하며, 이를 통해 디지털 인재 확보 등의 조직 쇄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과거 상경계 출신 일부를 정보기술(IT) 인력으로 양성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IT 전문 인력을 영업점에 배치하는 ‘돈키호테적 발상 전환’이 진정한 혁신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앞서 같은 달 취임한 지성규 하나은행장 역시 디지털 전환을 통해 ‘데이터 정보 회사’로 거듭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기존의 전통적 사업모델만으로는 포화 상태인 국내 시장에서 지속 성장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지성규 행장은 특히 “금융과 ICT의 경계가 해체되는 현 상황에서 미래 성장 동력을 위한 구조적 혁신으로서 디지털 혁신은 숙명”이라며 “디지털 전환은 선택이 아닌 ‘생존 전략’이다”고 역설했다. 이를 위해 디지털과 글로벌 진출을 양 날개로 끊임없는 혁신을 추구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신임 은행장들의 이 같은 취임 일성은 최근 급변하고 있는 금융환경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정부의 강력한 가계대출 규제와 지난해 말 기준 162%대까지 치솟은 처분가능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 역시 자산 성장을 가로막는 요인이지만, 무엇보다 ICT 기업의 시장 잠식이 은행권의 최대 위협 요인으로 등장한 것이다.

‘카카오 쇼크’ 이어 제3 인터넷전문은행 초읽기
물론 핀테크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인터넷전문은행이 국내 금융시장에 파괴적 혁신을 불러왔느냐를 둘러싼 논쟁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케이(K)·카카오뱅크 출범 이후 지난 2년간 모바일뱅킹의 사용자 편의성이 크게 개선된 것은 사실하지만, 서비스 경쟁보다는 예금·대출금리 등 가격 경쟁에만 몰두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런 논쟁에도 불구하고 지난 2년간 카카오뱅크의 성과는 대형 시중은행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들 인터넷전문은행은 무(無)점포 전략을 기반으로 24시간, 수수료 없는 비대면 서비스로 시장을 빠르게 잠식해 왔는데, 지난 3월 말 기준 카카오뱅크의 고객 수는 891만 명. 국민 5명 중 1명이 카카오뱅크 계좌를 갖고 있는 셈이다. 기존 은행들이 수십 년에 걸쳐 이뤄낸 모객 규모를 카카오뱅크는 단 2년여 만에 달성한 것이다.

국내 1호 인터넷전문은행인 케이뱅크 고객 수가 10분의 1 수준인 98만 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카카오’ 플랫폼이 가진 위력도 일부 실감케 한다. 여기에 최근 카카오뱅크는 최대주주인 한국투자증권(지분율 50%)과 함께 주식계좌 개설 서비스를 선보이면서 증권업계를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특히 카카오뱅크 전체 고객 가운데 2030 고객 비중이 65%에 달한다는 점은 중장기 성장 동력을 둘러싼 시중은행의 고민을 더욱 키우는 부분이다. 국내 주요 은행들이 너도나도 아이돌 그룹(국민-방탄소년단, 신한-워너원, 우리-블랙핑크, 하나-김하온, 농협-공원소녀)을 광고 모델로 기용하고 있는 것도 이런 불안감을 반영하고 있다.

서영수 키움증권 연구원도 “카카오뱅크가 높은 고객 충성도를 바탕으로 수익원 다변화에 성공하고 있다”며 “향후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가 확대 시행되면 DSR가 상대적으로 낮은 30~40대 고객을 다수 보유한 카카오뱅크의 점유율은 더욱 확대될 것이다”고 예상했다. 이에 “만일 카카오뱅크가 주택담보대출까지 진입한다면 이제는 ‘찻잔 속 태풍’이 아니라 은행 산업 구도를 재편하는 주체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지난 2017년 인터넷전문은행 1차 인가 당시 참여를 고사했던 하나금융이 ‘키움뱅크’ 컨소시엄을 통해 제3 인터넷전문은행 설립에 참여한 것도 카카오뱅크를 견제하기 위한 행보로 풀이된다. 신한금융 역시 ‘토스뱅크’ 컨소시엄에 참여 의사를 밝혔지만, 중장기 성장 전략을 놓고 토스의 대주주인 비바리퍼블리카 측과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서 막판 발을 빼기도 했다. 다만 금융권 일각에서는 ‘개인정보보호법’, ‘정보통신망법’, ‘신용정보보호법’상의 규제와 대주주 적격성을 둘러싼 논란, 그리고 기존 시중은행들의 적극적 반격으로 인해 인터넷전문은행의 성장세가 꺾이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비용·저효율’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중은행에 비해 인터넷전문은행이 혁신 경쟁 측면에서 비교우위에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영업점 기반의 대면 서비스 비중은 이미 한 자릿수대까지 추락한 상황. 한국은행에 따르면 입출금과 자금이체 거래 건수에서 인터넷뱅킹(모바일뱅킹 포함)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12월 기준 53.2%로 이미 절반을 넘어선 반면, 같은 기간 은행 창구와 텔레뱅킹 이용 비중은 각각 8.8%, 7.9%에 불과했다.

이처럼 대면 서비스 비중은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지만, 노조의 집단행동과 정부의 채용 압박 등으로 인해 시중은행의 인건비 부담은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국민·신한·우리·하나·SC제일·한국씨티은행 등 6개 은행 직원의 연평균 급여는 2015년 8200만 원에서 지난해 9300만 원으로 13.6%(1100만 원) 늘었다. 통계청이 발표한 같은 기간 가계(전국, 2인 이상, 4분기 기준) 근로소득 증가 폭(7.6%)의 2배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국내 금융권을 통틀어 가장 높은 연봉을 지출한 곳은 KB금융(평균 연봉 1억2900만 원)이었고 하나금융(1억2300만 원)이 뒤를 이었다. 4대 은행 가운데서는 신한은행(9600만 원)의 평균 임금이 가장 높았고, 하나은행(9400만 원), 우리은행(9200만 원), KB국민은행(9000만 원) 순이었다.
'리딩뱅크' 아닌 '탈(脫) 은행' 외치는 은행장들, 왜?
‘脫영업점’ 세계적 추세…이색 점포도 “글쎄”
최근에서야 핀테크 바람이 확산되는 국내와 달리 미국, 유럽 등 선진 은행들은 이미 공룡 IT 기업의 은행업 진출에 따른 충격파로 몸살을 앓고 있다. 미국 등의 경우 명확한 금지사항이 아닌 이상 개인정보 이용 등 새로운 비즈니스로 발전시킬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 ICT 기업의 금융업 진출이 활발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세계경제포럼(WEF)은 데이터 인프라와 분석 기술 등의 이유로 수많은 전통 금융사들이 대형 IT 기업에 종속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스페인 최대 은행인 BBVA의 프란치스코 곤잘레스 최고경영자(CEO)와 미국 JP모건체이스의 제이미 다이먼 CEO는 페이스북, 아마존, 알리바바, 텐센트와 같은 IT 기업들이 아예 은행들을 대체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실제로 미국의 구글과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 등은 독보적 플랫폼 비즈니스 모델을 통해 고객의 기본 신상은 물론 위치, 선호, 성향, 친구, 소득, 신용카드 정보 등 취향, 라이프스타일까지 파악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들 기업의 최대 강점은 ‘무점포 전략’에 따른 저비용 구조가 꼽힌다. 당초에는 무점포 전략이 금융 고객들의 신뢰 제고에 부정적일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IT 기업들의 금융서비스에 대한 신뢰도는 이미 전통 은행들의 수준을 위협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실제 미국 학자금대출 서비스 회사인 렌드에듀(LendEDU)가 지난해 초 진행된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 청년층(18~24세)의 경우 IT 기업이 제공하는 금융상품에 대해 74%가 호의적 반응을 나타냈다. 반면 전통 은행의 디지털뱅킹에 대해서는 기능성 및 편의성 측면에서 50% 만족도에 그쳤고 모바일뱅킹은 40% 수준에 불과했다.

IBK기업은행 경제연구소는 “디지털 시대 소비자의 금융서비스 선택 기준은 ‘어떤 기관이냐’가 아니라 ‘얼마나 편리하고 차별적인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며 “IT 공룡이 은행과 비슷한 수준의 신뢰와 가치를 제공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플랫폼 전략 및 서비스 콘셉트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IT 공룡에 의해 금융서비스의 상당 부분이 잠식될 가능성이 있다”고 조언했다.

글로벌 금융 전문가들 역시 은행의 탈(脫)영업점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강조한다. 영국의 금융분석 전문가인 크리스 스키너(Chris Skinner)는 그의 저서 <디지털뱅크>에서 “디지털 세대에게 디지털 금융은 인지해야 할 대상이 아닌 생활의 일부이며 느리게 진행된다 하더라도 지점 기반 뱅킹은 끝났다”며 “과거 몰락한 음반가게나 도서 유통 시스템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대부분의 은행은 결국 수십만 명당 1개 지점 혹은 도시·쇼핑센터당 1개 지점(메가지점) 수준으로 경영을 합리적으로 개선할 것이다”고 단언했다.

그는 ‘카페형 은행’ 등 일부 은행들이 점포 폐쇄의 대안으로 활용하고 있는 영업점 리모델링에 대해서도 부정적 시각을 드러냈다. 그는 “미국 등 일부 선진국 은행들이 영업점을 커피 라운지처럼 만들어 사람들이 재테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도록 시도한 적이 있지만 잘 통하지 않았다”며 “시중에 너무 많은 커피숍이 있는데 무료 커피 때문에 은행 지점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고객은 없기 때문이다”고 꼬집었다.

가까운 일본 은행권 역시 영업점 축소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일본의 3대 금융그룹인 미즈호금융은 지난해 4000억 원가량을 영업점 통폐합에 따른 비용으로 손실 처리했고, 이에 앞서 미쓰비시UFJ은행과 미쓰이스미토모은행도 2017회계연도에 각각 4300억 원과 2500억 원을 지점 통폐합 등에 따른 손실로 회계 처리했다. 특히 미즈호금융은 구조 개혁의 일환으로 2024년까지 전국 점포(600개)의 20% 수준을 통폐합한다는 계획이다. 일본 은행들의 이 같은 움직임은 지속된 저금리·고령화 기조와 함께 핀테크 확산에 따른 비용 절감의 필요성이 대두된 데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국내에서는 외국계인 한국씨티은행이 정치권과 노조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점포 축소를 단행해 눈길을 끈 바 있다. 이는 미국 시티그룹 차원의 비용 효율화 정책에 기인한 것으로, 한국씨티는 지난 2017년 종전 134개의 전국 영업점을 44개로 통폐합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점포 축소를 통해 절감된 비용은 디지털 금융과 자산관리(WM) 부문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반면 국내 시중은행의 경우 영업점 통폐합 역시 정부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 금융감독원은 올해 하반기부터 영업점 폐쇄가 많은 은행일수록 경영 실태 평가에서 불이익을 준다는 방침을 밝혔다. 관련 모범 규준을 도입하겠다는 당초 계획에서는 한발 물러났지만, 시중은행들은 사실상 영업점 개수를 일정 수준 이상 유지하라는 ‘경고’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한국씨티 등 외국계 은행과 달리 명확한 대주주가 없는 시중은행의 지배구조가 비용 효율화를 가로막는 근본 원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8호(2019년 05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