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의 Mentality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다. 자주 외로움을 느낀다. 걷잡을 수 없는 공허함이 가슴을 후빈다. 50대 남성들이 우울증에 빠지는 과정이다. 그러나 중년 남성들이 느끼는 외롭고 공허한 감정이 반드시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 위기는 곧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중견 무역 회사 임원으로 재직 중인 성학수(가명, 53) 씨는 요즘 들어 자주 악몽을 꾼다. 벼랑 끝에 홀로 서 있는 꿈이다. 아찔한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버둥거리다 잠에서 깨면 식은땀으로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 있다. 3년 전부터 부쩍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언제 설 자리가 사라질지 몰라 늘 긴장 상태다. 길어야 1년 정도 더 다닐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다.

그나마 잘나가던 시절 재테크를 잘 해 둔 덕분에 서울 강남과 분당에 132.2㎡대 아파트가 있지만 아직 세 아들이 대학에 다니고 있는 상황이라 장가보낼 생각을 하면 고정소득이 없는 퇴직 이후가 더욱 아득하다. 올 초 신장 수술을 한 후 건강도 급속도로 나빠져 심리적으로도 위축되는 느낌이다.

인천에서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김석환(가명, 59) 씨는 남모를 우울증을 앓고 있다. 그는 한때 잘나가는 ‘사장님’이었다. 맨손으로 여기까지 오면서 산전수전 다 겪었다. 돈을 많이 벌면 모두에게 인정받고 행복할 줄 알았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갱년기의 아내는 갈수록 드세졌다. 자녀를 출가시키고 나서는 부쩍 부부싸움도 잦아졌다. 가끔 찾아오는 딸 내외는 엄마와만 소통하려 한다.

회사에서도 점심시간이 되면 직원들은 쏜살같이 사라져 혼자 밥을 먹기 일쑤. 언젠가 직원들이 뒤에서 자신을 험담하는 걸 들은 이후로는 머릿속에서 잊히지가 않는다. ‘인생이 원래 이렇게 허망한 것이었나!’ 모두를 호령했던 김 사장은 요즘 눈물이 핑 도는 날이 많다.

대한민국 50대 남성들이 겪고 있는 정서적·심리적 불안과 우울은 이번 한경 머니 설문조사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스트레스, 외로움 등으로 인한 우울지수가 높은 수치로 나타난 것이다. 우울증의 척도를 알아보기 위한 ‘외로움을 느끼는가’라는 질문에 69%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렇지 않다’는 18%, ‘전혀 그렇지 않다’는 13%에 불과했다.

이 시대 중년 남성들이 우울해도 우울하다고 말조차 하지 못하고 감정을 속으로 누르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통계보다 더 많은 현실 속 중년 남성들이 ‘마음의 병’을 앓는 것으로 볼 수 있다.
[Cover]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렇게 허무하죠?”
중년의 아픔, 속내 털어놓을 친구도 없다
중년에 이르러 세상에 홀로 버려진 듯한 외로움은 가슴 속 깊은 곳의 공허한 감정과 맞닿아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1970~1980년대 초고속 성장기를 살았던 50대들은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정체성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고민을 할 틈이 없었다.

김병수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이 주장한 현대인들의 불행 이유 ‘누제닉 누로시스’에서 답을 찾는다. 베이비붐 세대의 남성들은 그전까지 인생의 가치나 숭고함과 같은 생각은 하지 않고 오로지 일에만 매진해 왔다. 그게 삶의 목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돌아보니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는 그게 아니었다면? 김 교수는 “마치 힘들게 산 정상에 올랐는데 ‘이 산이 아니다’라는 걸 깨달았을 때와 비슷한 감정일 것”이라며 “가치의 상실에서 오는 혼란, 그에 따른 신경증을 빅터 플랭크는 누제닉 누로시스라 정의내렸다”고 말했다.

공허함은 때로 ‘남자의 눈물’을 부른다. 요즘 정신과를 찾는 중년 남성들의 주요 증상 중 하나가 바로 ‘아무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눈물이 난다고 해서 모두 우울증이라고 볼 수는 없다. 윤대현 서울대학교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중년 남성의 이러한 증상을 자연스런 것이라고 설명한다.

“나이가 들수록 무뚝뚝한 남자도 예술가처럼 마음이 섬세해집니다. 남성은 강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육을 받다 보니 그냥 눈물을 참아 왔지만 찍어 누르는 힘은 약해지고 본래의 섬세한 감성이 다시 살아나면서 눈물이 나오는 거죠.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남성들의 우울증은 마음 속 깊은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데서도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털어놓고 자문을 구할 만한 친구가 몇 명 있느냐’는 질문에 ‘1~2명’이 46%로 가장 많았고 ‘3~4명’이 25%였다. ‘한 명도 없다’는 응답도 19%나 있었다.

한 50대 회계사는 “직장에서 힘든 일이 있어도 꾹 참는 버릇을 들이다 보니 이제는 친구뿐만 아니라 가장 가까운 아내에게도 속마음을 이야기하지 못하게 됐다”고 말한다. 그는 “퇴근 후 혼자 소주 한 잔에 시름을 털어 버리는 게 습관처럼 굳어졌다”며 “친구가 없다는 사실이 나이가 들수록 더 뼈저리게 다가온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에도 50대 남성이 정신건강의학과 등에서 심리 상담을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정신과 의사에게 진료를 받거나, 심리 상담 등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필요를 느낀 적이 없다’가 62%로 가장 많았고, ‘생각은 했으나 받아본 경험은 없다’가 27%, ‘진료나 상담을 받아본 경험이 있다’가 10%를 차지했다.

전문가들은 병원을 찾는 50대 중년 남성의 비율이 늘긴 했지만 여전히 ‘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말한다. 우종민 서울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치료 받아야 할 환자가 100명이라면 실제로 오는 경우는 2, 3명밖에 되지 않는 다”며 “남자에게는 여전히 자존심이 중요하며 특히 50대는 자신을 표현하는 훈련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꼬집었다.


뇌 속에 ‘정체성 수리 중’ 팻말을 걸어보세요
문제는 이러한 증상들이 ‘중년의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이다. 성취나 목표의식이 흐려지면 자칫 잘못하다 단기간에 강한 자극을 느낄 수 있는 술, 도박, 불륜 등에 빠지기도 한다. 이는 결코 바람직한 해결책이라 할 수 없다.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50대 남성을 그린 책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에서 “정체성 갱신에는 모종의 의례와 의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 자신이 정체성 혼란에 부딪혔고 이를 수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분명한 신호를 뇌에 각인시켜야 하는데 이를 위해 ‘정체성 수리 중’이라는 팻말을 뇌 속에 걸어 두라는 얘기다. 작가들이 절필 선언을 하고 미지의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실제로 그는 바쁜 일상을 놓고 자신을 교수로 만든 유전자의 기원을 찾아내기 위해 부모님의 고향으로 여행을 떠난다. 현실적으로 멀리 떠나기 힘들다면 정신과 심리 상담을 받아봐도 좋고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한 선후배들과 정기적으로 카페 미팅, 술자리를 한다든지, 그런 증후군을 앓고 있는 친구들을 상담해주는 것도 방법이다. 공감하는 대상과 소통하는 노력을 뇌가 인식한다면 혼란 시그널의 생산을 슬그머니 중단할지도 모른다.

멀리 내다보고 인생 2막을 장식할 스토리를 천천히 준비해 가는 것도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 김병수 교수는 “50대면 아직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시간이 20년 이상 남았지만 중년 남성들은 대개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우울해하는 경향이 있다”며 “운동이 됐든 취미생활이 됐든 지금부터라도 자신이 원하는 삶의 가치를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특히 중년의 육체는 정신보다 더 중요하다. 50대가 되면 정신적 건강이 아닌 신체적 건강이 심리를 좌우하기 때문. 60대 ‘몸짱 의사’로 유명한 김원근 서울대 흉부외과 교수는 “매일 운동해 근력 좋은 중년은 마음을 수양하지 않아도 활력이 넘친다”며 “고혈압에, 당뇨에 뱃살까지 나온 사람은 아무리 명상으로 정신을 가다듬어도 자신감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조직이나 가정에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걱정이라면 지금이라도 ‘자아복잡성’이 강한 사람이 되는 훈련을 해보는 것도 좋다. 이른바, 다중인격자가 되는 것이다. 친구를 만날 땐 허당, 자녀에게는 토끼, 회사에서는 슈퍼맨과 같은 식으로 상대에 따라 유연하게 얼굴을 바꿀 줄 아는 사람이 정신적으로도 건강하고 대인관계도 원만하다.

김병수 교수는 “직장생활을 30년 하다 보면 자신의 모습을 바꾸기 어려운데 다중적인 모습을 가질수록 정신건강에는 좋다”며 “주식만 분산투자를 할 것이 아니라 자아의 모습도 분산투자를 하라”고 조언했다.
[Cover]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렇게 허무하죠?”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조사에서 ‘행복한가’라는 물음에는 40%가 ‘그저 그렇다’고 답했으며, ‘그렇다’가 32%, ‘매우 그렇다’도 9%나 나왔다. ‘그렇지 않다’는 응답은 16%였다. ‘그저 그렇다’를 감안하더라도 꽤 높은 수치의 행복도가 나온 것이다.

최근 보건사회연구원에서 실시한 50대 행복도 조사에서도 ‘나는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비율이 79%, ‘나는 행복하다’는 응답이 90%를 차지했다. 실제로는 체감하기 어렵다는 평가도 있지만, 대부분 본인의 삶을 부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라는 분석이다.

김상호 한국보건사회연구원장은 “50대가 한창 취업했던 시기는 완전고용 시대였고 직장생활에 대한 어려움이 없었기에 부모 세대보다 학력도 높고 경제적 고통도 극복했다”며 “상대적으로 비교해보면 상당히 만족스러울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전히 이들에게 걱정은 남아 있다. 노후 준비, 문화, 건강 등이다.

김 연구원장은 “50대가 인생 2막을 행복하게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 전문 상담이나 교육 등이 있다면 이들이 막연한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Cover]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렇게 허무하죠?”
성공한 사람들의 정신건강법
성공한 사람들은 마인드 컨트롤의 귀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는 명상의 열렬한 지지자다. 그는 바쁜 하루 일과를 마치면 명상으로 스트레스를 푼다. 존스홉킨스대의 연구 결과, 명상은 불안과 우울, 고통과 같은 심리적인 스트레스를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하루에 2번 20분간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머릿속을 비워 명상한다.

독특한 나만의 취미도 일상에서의 고통을 잊게 해준다. 억만장자 워런 버핏은 쉬는 시간에 하와이 민속악기인 우쿠렐레를 연주한다. 그의 실력은 수준급으로 알려졌는데, 얼마 전에는 코카콜라 100주년 기념 축가를 부르며 우쿨렐레를 연주해 화제를 모았다. 유명 배우 메릴 스트립은 뜨개질을 하면서 힐링하며,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유화를 그리면서 스트레스를 푼다고 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주 빌 게이츠는 인생을 돌아보는 습관이 있다. 실패가 준 교훈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주말이 되면 지난 한 주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매일 한 줄 일기 쓰기 습관도 마음을 보듬는 방법. 그는 또 잠을 충분히 보충함으로써 삶의 질이 망가지지 않도록 노력한다. 그는 하루에 7시간 자는 것을 좋아한다. 이러한 수면 습관은 날카로움과 창의력, 긍정 마인드 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리처드 브랜슨 버진그룹 회장은 봉사활동을 한다. 실제, ‘부자들의 취미생활’에 대한 책을 쓴 톰 콜리는 “미국 부자들 가운데 73%가 한 달에 5시간 이상 봉사활동을 한다”며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일상에서의 행복감을 찾는 데 남을 돕는 것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윤경 기자 ramj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