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해가 간다. 달랑 한 장 남은 달력이 마치 ‘마지막 잎새’ 같다. 그런데 소설의 마지막 잎새는 생명에 대한 희망 어린 메시지를 담아 용기라도 주었지만 한 장 남은 달력은 다 소진된 배터리의 잔량을 보는 것 같아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젊은 시절에는 새해, 새 희망 어쩌고 하면서 연말이면 포부와 계획에 가득하기도 했지만, 한국인의 평균수명 한계에 접근할수록 한 해를 보내는 심정이란 별 탈 없이 지낸 것이 고마웠고 다음 한 해도 제발 건강히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소망이 가장 절실하다.

정말 대단한 한 해였다. ‘잔인한 달’ 4월에 터진 세월호 참사는 2014년 한 해 내내 온 나라를 뒤흔들었고, 무려 200일이 넘는 시간이 멈춰진 듯 세월호에 매몰된 한 해였다. 아직도 한국 사회가 안전에 있어서는 온통 골다공증투성이라는 현실을 뼈저리게 느낀 한 해였다. 게다가 세계경제는 깊은 수렁에 빠져 도무지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아 우울하고 불안한 먹구름이 세계를 뒤덮고 2015년에도 가실 것 같지가 않다. 극우로 질주하는 일본은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커녕, 위안부 문제를 아예 없던 일로 돌리려는 치졸한 역사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한·일 관계가 더더욱 경직된 한 해였다.

개인적으로는 올해의 가장 큰 교훈을 브라질 월드컵에서 얻을 수 있었다. 우승 후보였던 포르투갈, 프랑스, 스페인 등 전통적 축구 강국들이 초반에 나가떨어져 버리고, 주최국 브라질이 홈그라운드에서 독일에 7대1로 대패해 그들에게는 우리의 세월호 참사 못지않은 대참사가 벌어졌다. 생산 과잉, 소비 부진으로 야기된 세계 경기 침체에다 월드컵대회에서 증명된 ‘세상에 영원한 강자, 절대 강자는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어떤 나라, 기업, 인간이라도 한순간의 방심으로 처참하게 추락할 수 있다’는 처절한 메시지가 올해의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이른바 PIGS(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의 과거 식민제국주의 국가들, 그리고 영국, 프랑스 등의 근대 식민제국주의 국가들이 서서히 몰락하는 반면, 전쟁의 패자였던 독일과 오스트리아, 열강의 침략에 시달리던 중국의 부상 등은 이제 세계는 ‘승자의 저주’, ‘패자의 축복’이란 결과로 변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긴 자는 반성하지 아니하고, 반성하지 않으니 개혁에 적극적이지 않은 반면, 전쟁에 지거나 침략에 시달린 나라들은 항상 반성, 반추하고 자기 개혁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기에 이러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침략자였던 일본의 후퇴도 이러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미국도 이제 내리막길로 접어든 징후가 역력하다.

2014년은 정말 다사다난했다. 세계적으로 많은 것이 변하고 있으며, 우리의 기본 패러다임도 변해야 살 수 있다는 엄중한 경고의 소리가 들린 한 해다. 이제 곧 새해를 맞음에 있어 암울한 전망에 낙심만 할 게 아니라 몸과 마음을 추슬러 다시 한 번 ‘파이팅!’을 외쳐야겠다. 그 무엇보다 내 몸의 건강부터.


이원복 덕성여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