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을 열광케 하는 그들만의 콘텐츠_아홉 번째

100세를 코앞에 두고 인생의 끝자락에 서 있는 노부부가 있다.

76년 동안 부부의 연을 맺고 거친 현실의 풍파를 지나온 건 여느 부부와 다를 바 없는데, 서로를 향한 마음과 시선, 그리고 태도는 전혀 다르다. 그렇듯 평생을 애틋함과 존경심으로 함께해 온 노부부의 마지막을 다룬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나지막하고도 강하게 질문을 던진다.

지금, 아낌없이 사랑하고 있는가.
[MEN`S CONTENTS] 반쪽을 향한 간절한 기도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3, 4년 전으로 기억된다. 무료함을 달래려 TV를 켰다가 우연히 노부부의 아름다운 ‘애정행각’을 목격하게 됐다. ‘백발의 연인’이란 제목으로 방영된 KBS TV 프로그램 ‘인간극장’ 시리즈였다. 76년째 부부로 살았음에도 늘 서로를 신혼처럼 아끼고 보듬는 그들이 어찌나 곱고 훈훈하게 보였는지 모른다.

그들을 몇 년 만에 영화로 다시 만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런데 반가움도 잠시, 제목을 접하는 순간 가슴이 아릿해지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등장인물은 그대로인데 내용도 제목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도, 예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강원도 횡성 어느 산골에 사는 노부부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주인공은 98세의 조병만 할아버지와 89세의 강계열 할머니. 둘은 늘 함께다. 툇마루에 앉아 볕을 쬘 때도, 아랫목에 누워 잠을 청할 때에도 잡은 손을 놓는 법이 없다. 서로에 대한 존칭도 깍듯하다. 바라보는 시선엔 애틋함이 담겨 있고 조심스레 건네는 말 한마디에는 존경심이 녹아 있다.
[MEN`S CONTENTS] 반쪽을 향한 간절한 기도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특성상 TV로 보았던 장면들이 간혹 영화 속에서도 재현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뒷간에서 벌어지는 풍경이다. 소녀 감성을 지닌 백발의 아내는 오밤중에 뒷간을 갈 때마다 할아버지를 문 앞에 세워두고 노래를 청한다. 물론 할아버지는 흔쾌히 아내의 청을 들어주는데 쭈뼛대면서도 망설임 없이 노래를 부를 때나 곱게 핀 국화꽃을 꺾어 머리에 꽂아줄 때나 마치 서울 소녀를 짝사랑한 ‘소나기’의 사내아이 같다. 하긴 평생을 그래왔으니 고작 몇 년의 시간쯤이야 변함 있으랴. 그래, 그대로인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억 그대로의 재현은 딱 거기까지. 애틋하고 정겨운 로맨스만 다루었던 TV 다큐멘터리와는 달리 영화는 백년 가까이 해로한 그들의 마지막 이별 모습을 비중 있게 카메라에 담았다. 제목도 그래서 그와 같이 붙여졌는지 모른다. 부쩍 잦아지는 할아버지의 기침소리. 그럴 때마다 흐르는 강물을 말없이 바라보는 할머니. 예고편을 보며 직감했던 슬픈 분위기도 어쩌면 로맨스가 아닌 ‘죽음’에 방점을 찍은 제목 탓이었나 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 슬프도록 아름다우나 결코 우려하던 침울함은 요만큼도 없다.
[MEN`S CONTENTS] 반쪽을 향한 간절한 기도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사랑한다면 그들처럼
찬바람에 눈발이 날릴 때에도, 수북한 낙엽에 종일 빗자루와 씨름해야 할 때에도 노부부는 그저 즐겁기만 하다.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장난을 치며 웃음 짓는데 부유한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포기하고 사는 우리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산다.

옷만 봐도 그렇다. 허니문 시기를 제외하면 남세스럽기 짝이 없는 이른바 커플룩을 그들은 의연하게 고수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다. 그저 말없이 상대와 같은 옷을 맞추어 입을 뿐이다. 그래서 커플룩 차림으로 나란히 손잡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노라면 마치 데칼코마니 같다.

감독은 그러한 모습을 통해 서로가 서로의 반쪽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모습이 퇴적되며 그들이 쌓아온 사랑의 높이가 실감날 때 즈음 우리에게 질문 하나를 던진다. ‘그대, 이들처럼 아낌없이, 그리고 남김없이 사랑하고 있는가.’

그 질문에 아마 망설임 없이 ‘네’라고 대답하는 남자는 드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부부의 연을 맺은 남자라면 이미 가장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지 않은가. 지금은 앞을 볼 때지 옆을 볼 때가 아니라고 여기는 가장들의 자기최면적인 채찍질. 필자 역시 마찬가지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오늘쯤은 기꺼이 희생할 각오로 산다.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다 보니 지금껏 그렇게 살았고 또 앞으로 몇 년간은 그렇게 살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인생을 대하는 시선의 각도가 조금 틀어진다. 저당 잡힌 오늘의 행복은 결코 내일을 보장하는 보험이 아니라는 무언의 충고도 눈물이 마를 때 즈음 돋아난다.


김상명 시나리오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