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을 열광케 하는 그들만의 콘텐츠_열한 번째

시한부 인생, 주인공의 뉘우침, 선악의 대결 구도….

더 이상 진부할 수 없는 이 모든 요소를 갖추고도 제대로 ‘한 방’ 날린 드라마가 있으니, 최루성 눈물 대신 핏대 세운 울분으로 참회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SBS TV 드라마 ‘펀치’가 그것이다.
[MEN`S CONTENTS] 변치 않는 세상을 향한 한 남자의 주먹, 드라마 ‘펀치’
드라마든 영화든 설정만 잘하면 반은 ‘먹고’ 들어간다. 결과론적으로 따져 봐도 그렇고 이 ‘바닥’의 많은 업자들이 체득한 사실이기도 하다. 물론 구성과 연기, 연출 등 모든 요소들이 훌륭해야 1000만 영화가 되고 국민 드라마의 반열에 오르겠지만 설정만 잘해도 기대감을 증폭시키며 화제몰이를 할 수 있다. 뱀파이어가 등장하고 시공간을 초월하는 이야기가 선보이는 것도 바로 그래서다. 그런 점에 비추어보면 이번에 소개할 SBS TV 드라마 ‘펀치’는 필자의 호기심을 낚는 데 실패한 작품이다. 첫 회가 방송한 지 보름이 지나서야 첫 대면을 했는데 시한부 인생, 주인공의 뉘우침, 선악의 대결 구도 등 조합된 설정들이 너무도 진부해 보여서다. 그런데 이 드라마, 필자에게 멋지게 한 방 먹였다.
[MEN`S CONTENTS] 변치 않는 세상을 향한 한 남자의 주먹, 드라마 ‘펀치’
정글 같은 세상을 상처투성이로 살아낸 남자의 참회
줄거리는 이렇다. 성공을 위해 권력의 충견으로 살아온 검사가 시한부 삶을 선고받고 자신이 기대었던 권력자와 대립각을 세우며 고군분투하는 이야기. 보시다시피 앞서 말한 설정들이 모두 들어가 있다. 하지만 작가는 설정의 대상을 익히 보아온 것과는 다른 것에 둔다. 예상을 비껴가는 것이다.

먼저, 시한부 인생. 주인공 정환(김래원 분)은 가족의 채근으로 건강검진을 받던 중 뇌종양을 발견한다. 약도 없고 수술도 불가하단 판정이 떨어진다. 딸의 국제학교 입학이 코앞이고 강남 아파트 입주를 목전에 둔 시점에 곧 죽는단다. 대개의 드라마들처럼 가장 기쁜 순간에 가장 슬픈 운명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작품들은 그것이 시청자로부터 연민을 끌어내기 위함이지만 드라마 ‘펀치’는 다르다. 악마의 유혹을 받아들인 지엄한 죗값이요, 반란의 시작이다.
[MEN`S CONTENTS] 변치 않는 세상을 향한 한 남자의 주먹, 드라마 ‘펀치’
그렇다면 주인공은 왜 악마의 유혹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나. 열심히 공부해 일류 법대에 붙었지만 아버지 치료비 때문에 부득이 장학금을 준다는 지방 법대를 가야 했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 배지를 달았음에도 지방대 출신이란 이유로 한직이나 맴돌았던 주인공. 차마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의 아픔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러니 평소 불치병 걸린 주인공에게 눈곱만큼의 연민도 줄 수 없다던 남자라도 아줌마들처럼 안타깝게 그의 몸부림을 지켜보게 된다.

둘째, 주인공의 뉘우침.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인공 정환은 단 한 번도 사과나 반성을 입 밖으로 꺼내본 적이 없다. 정의의 편에 선 동료 검사이자 아내인 하경이 죄를 시인할 것을 재촉해도 “내가 바뀐다고 세상이 바뀌진 않아”라며 버틴다. 사실 그 날선 대사 한 마디가 외면하던 필자를 돌려 앉혔다. 맞다. 회개한다고 달라질 세상이 아니다. 주인공 역시 도덕적으로 사는 것보다는 풍요롭게 사는 것이 더 실익이 많지 않느냐며 정곡을 찌른다. 그러면서 하루를 더 살기보단 가족의 앞날에 드리운 불행을 걷어내는 데 안간힘을 쏟는다. 이 또한 남자용 드라마답다. 최루성 눈물 대신 핏대 세운 울분으로 참회를 대신하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선악 대결 구도. 이건 드라마가 가지는 불변의 존재 이유지만, ‘펀치’에서는 그 대상이 재밌다. 바로 주인공이 10년 가까이 모시던 검찰총장이다. 중반부터는 법무장관까지도 대결 구도에 편승한다. 즉, 돈에 눈이 먼 재벌이나 건달 두목이 아니라 공직자, 그것도 법과 정의를 수호하는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을 대척점에 뒀다. 물론 그들은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며 편법을 동원하고 권력으로 짓누르는데 그 과정에서 공직자 병역 비리, 정경 유착, 표적 수사 등 뉴스에서도 심심찮게 거론됐던 이슈들이 반전요소로 드라마틱하게 쓰인다. 그러니 뻔한 권선징악의 틀을 쓰고 있어도 부조리에 대한 대리만족감이 높다. 이 드라마는 ‘추적자’를 통해 명성을 날린 박경수 작가의 작품이다. 그는 기획 의도를 통해 “정글 같은 세상을 상처투성이로 살아낸 남자의 참회를 그리고 싶다”고 밝혔다. 배려보다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통하는 정글.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왜 그토록 냉정하고 현실적인지 가늠되는 대목이다.


김상명 시나리오작가│사진 SBS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