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커피’강봉석 바리스타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로 훌쩍 떠나 의대에 진학한 예비 의사가 10여 년 후 서울 이태원에 커피 전문가로 돌아왔다. 그는 “손님들과 인생 이야기를 나누며 매일같이 행복을 볶는다”고 말한다.
[Second Act] “매일 행복 볶고, 인생 얘기해요”
오전 10시경이면 서울 이태원 가구거리 초입에는 어김없이 커피 볶는 향이 은은하게 퍼지며 코끝을 자극한다. 향기를 좇다 보면 자그마한 커피 핸드드립 전문점이 눈앞에 나타나고, 노신사가 원두를 직접 볶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이태원 중심가의 여느 커피 프랜차이즈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해피커피’. 새나오는 커피 볶는 향이 몸에 배일 정도다. 귓가를 자극하는 클래식 음악까지 보태어지면 안락의자가 그리워진다.

이곳 주인장인 강봉석(69) 바리스타는 서강대 독문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이후 1975년 결혼과 함께 아내와 독일로 훌쩍 떠나 명문 보훔대 의학과에 진학하고, 아내는 쾰른대와 대학원에서 성악을 전공한다.

독일에서 좋은 성적으로 촉망받는 예비 의사가 된 그는 아내가 하노버 오페라하우스에서 솔리스트가 되자, 아내의 외조를 자처했다. 그에 따르면 아내는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스승인 에토레 캄포갈리아니에게 성악을 배우면서 오지리 찰스부르크 콩쿠르에서 한 사람만 뽑는 무대의 주인공이 됐다.

이후 이탈리아로 넘어가 오페라에 보다 전념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기로 한 부부는 아기가 생기자, 아내는 1986년 한국으로 먼저 들어오고, 그는 다소 생뚱스럽게 로이틀링겐신학대에 진학한다.

“긴 여정의 유학 생활을 했지만, 사람의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신학대에 진학해 신앙을 공부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죠.”

그렇게 그는 꼬박 4년이란 시간을 보냈고, 1990년 고국으로 돌아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됐다.


의사가 아닌 바리스타가 된 이유
그가 한국에 돌아와 처음으로 몸담은 곳은 인천 부평에 있는 임학교회다. 9년간 담임목사 생활을 하면서 이후 이화외국어고등학교 교목으로 들어가 10년을 보냈고, 강원도 홍천 팔열고등학교에서도 3년의 교목 생활을 한 후 은퇴를 했다.

“교목 생활을 20년 이상 하면 적지 않은 연금이 나오는데 전 해당 사항이 없었죠. 목사로서 현실적인 직업을 갖는 게 무엇일까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는 “당장 노후 대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의 결정을 커피 전문가였다. 이쯤 되면 독문학도에서 의학도, 목사를 거쳐 바리스타로 유유히 인생의 노를 저어 간 그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실패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래서 공부하게 됐습니다. 지금 있는 이곳은 위치가 좋지는 않지만, 핸드드립 커피를 직접 뽑아 손님에게 거짓 없는 서비스를 한다는 점이 좋습니다.”

그는 “커피는 원두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일반 매장에서 싼 값에 판매하는 아메리카노는 원두의 상태를 모르고, 핸드드립도 안 된다. 버리기 직전 상태의 원두가 있기도 하고, 누래져서 못 쓰는 원두를 싼 값에 구입해 판매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지적이다.

“아직 가게에 사람이 붐비질 않아 생두를 직접 사고, 직접 기계로 만들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다”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여기서 5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저는 더 이상 목사가 아니잖습니까. ‘해피커피’에서 저는 일종의 서비스를 하고 있습니다. 좋은 재료로 잘 만들어서 손님께 친절하게 드리는 것이 어찌 보면 종교자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해요.”

그는 “커피는 쓴맛, 단맛, 신맛과 목 넘김을 풍요롭게 하는 커피 고유의 기름이 있어서 그 고유의 커피 맛을 아는 사람이 찾는다”라며 “이를 모두 알기란 어렵지만, 커피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끌리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진심을 손님들은 알고 있을까? 이 매장의 진한 커피 향에 이끌려 하나 둘 손님들이 늘어나는 재미는 쏠쏠한 듯싶다. 자주는 아니지만, 매일 오는 손님도 있고,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다. 방송인과 아나운서, 전직 국회의원 등 찾아오는 손님들의 면면도 다양하다.
[Second Act] “매일 행복 볶고, 인생 얘기해요”
손님들과 나누는 인생 이야기
그는 이곳을 찾는 손님들의 말동무가 돼주는 일이 즐겁다고 말한다. 욕심을 채우는 대신, 행복을 볶아내니 마음은 더없이 편안해졌다는 게 그의 귀띔. 그윽한 커피 향기와 함께 슬그머니 삐져나온 옛이야기에 빠져들기도 하고, 어느새 무장해제 된 손님들의 상담을 받아주기도 한다.

주변에 대형 커피 전문점이 즐비하게 들어섰지만 본인만의 커피를 만들면서 손님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 자체가 행복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마냥 바리스타로서의 삶을 고집할 수도 없다. 그는 “행복을 나누지만, 나이도 있고, 그만두게 되는 날은 분명히 온다”며 “조금 더 나이 들어서는 전원주택을 마련해 그곳에서 조그맣게 커피 볶는 일을 하면서 인터넷으로 판매하는 꿈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자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부동산을 활용해 크지는 않지만 소박한 꿈을 이뤄나가겠다는 게 그만의 청사진이다.

“젊을 적 꿈을 잘못 꾸면 현실 도피가 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꿈이 아니라 현실 직시가 꿈을 이루는 길이 아닌가 싶어요.”

이런 그는 오늘도 한 명 한 명 찾아오는 손님들과 인생 얘기를 나누며, 그만의 커피 향을 내리고 있다.
[Second Act] “매일 행복 볶고, 인생 얘기해요”
강봉석 바리스타의 커피숍 창업 조언
“소소하게 시작했습니다. 창업 당시 권리금 4200만 원에 전셋값 1500만 원이 전부였죠. 아, 로스팅 기계 값이 1000만 원가량 하니, 이를 더하면 6700만 원이네요.”

강봉석 바리스타는 부부가 커피를 워낙 좋아했고, 그러던 참에 “이태원에서 커피숍을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지인의 권유로 ‘해피커피’를 오픈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로스팅을 하면 우선, 맛을 조절해 판매할 수 있습니다. 또 원두를 사 오면 맛도, 가격도 조정이 안 되는데 직접 하니까 경비도 절감할 수 있어요. 부수적으로 원두를 판매할 수 있어 좋기도 합니다.”

많지는 않지만 지금의 수입에 만족한다는 강 바리스타의 마음은 편하다고 한다. 주변에 커피를 판매하는 곳은 즐비하지만, 직접 맛을 내고, 손님들과 어울리면서 커피 향을 알리는 일이 마냥 즐겁다는 것. 주변 상권을 분석하고, 신경 쓰며 경쟁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다만, 그는 ‘해피커피’를 찾는 손님에게 제대로 된 커피를 판매해야 한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다. 친절은 기본이지만, 가게를 다시 찾는 손님은 결국 커피 맛을 기억하고 찾게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런 그는 창업을 꿈꾸는 4060세대에게 “처음부터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큰 기대를 갖고 창업을 하는 것은 망하는 길이라고 봅니다. 대개 ‘4억~

5억 원 아니면 장사를 안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건 어렵다고 봐요. 1억 원 미만으로 시작해 경험을 쌓고, 이후에 더 할지 말지 결정하는 게 좋습니다.”


나원재 기자│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