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 경방 사장의 ‘The Classic’ 5th

살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할 순간이 너무나 많지만, 특히 클래식 입문자들에겐 더욱 그렇다. 클래식 마니아들이 그토록 브람스에 열광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자장가와 헝가리 무곡, 대중에게 친근하고 익숙한 이 곡들은 그러나 브람스를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한층 더 깊고 오묘한 울림을 주는 브람스의 곡들이야말로 여러 번 듣지 않고선 그 감동을 헤아릴 수 없다.
[CLASSIC ODYSSEY] 시대적 흐름을 거스른 위대함, 브람스
인생에서 좋은 스승을 만나는 건 분명 축복이다. 때론 자극이 되고, 때론 나아갈 방향이 돼 주며 알게 모르게 이끌어 주는 스승의 존재감은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기도 한다. 클래식 음악계에도 스승과 제자 관계가 숱하게 존재한다. 여기서 구분해야 할 건 사사한 선생과 스승의 존재는 엄연히 다르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베토벤은 하이든의 제자였지만, 그가 진짜 스승으로 생각한 이는 모차르트였다. 우러름의 대상이자 넘어서야 할 큰 산 같은 존재였던 스승, 브람스에게는 베토벤의 존재감이 딱 그랬다.

베토벤 이후 낭만주의를 꽃피운 슈베르트와 멘델스존, 슈만 등을 건너뛰고 브람스를 등장시킨 배경에는 베토벤과 브람스의 아주 특별한 관계가 깔려 있다. 베토벤과 브람스 사이에는 공통분모가 굉장히 많다. 브람스가 베토벤을 존경하고 추종했고 실제로 베토벤을 닮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보면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1827년 베토벤이 사망한 후인 1833년 브람스가 태어났으니 시대적으론 한 번도 만나지 않은, 만날 수 없었던 사이라는 점이다.


삶의 은인이 된 슈만과의 만남
독일 함부르크 출신인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는 삼류 오케스트라의 콘트라베이스 주자였던 아버지로부터 일찍이 음악을 배웠다. 어린 시절 이미 두각을 드러내며 천재성을 보였지만, 10대 후반까지는 고난의 세월이 계속됐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기도 했지만 그보다 시대적 상황이 그러했다. 당시는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여파가 계속되던 변혁기로 음악가에 대한 스폰서들이 사라지면서 대중적 성공이 있어야만 풍요로울 수 있던 시대였다. 그러나 어디 클래식으로 돈을 번다는 게 쉬운 일이었을까. 동시대 활약했던 멘델스존은 대은행가의 아들이었고, 베르디 또한 무명 기간 동안 부유한 장인이 후원해 줬지만 브람스는 피아노 연주, 피아노 개인지도 등을 하며 생활을 꾸려 나갔다.

그의 삶에 찾아온 첫 번째 행운은 슈만과의 만남이었다. 나이 스무 살이 되던 1953년의 일이었다. 브람스의 실력을 알아본 슈만은 음악계에 브람스의 이름을 알리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베토벤이 브람스에게 롤 모델이자 음악적 스승이었다면 슈만은 삶의 은인 같은 존재였다. 1856년 정신병을 앓았던 슈만이 일찍 사망한 뒤 그의 부인인 클라라 슈만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브람스는 지속적인 도움을 주며 의리를 지키기도 했다. 여기서 브람스의 개인사가 하나 등장하는데,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줄곧 독신의 삶을 살았던 브람스는 슈만이 죽은 후 클라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연인 사이로 오해받을 정도였다. 곡을 발표하기 전 유명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클라라에게 미리 들려 주는 등 음악적 교류가 많았다. 실제로 클라라에 대한 브람스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늘 만나던 사람들하고만 교류했던 브람스의 인간관계를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브람스의 황금기는 1862년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주한 이후 시작됐다. 역시 빈에서 활동했던 베토벤과의 공통분모다. 브람스는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거의 전곡이 활발하게 연주될 만큼 어느 것 하나 뺄 곡이 없지만 특히 빈에서의 활동으로 모두가 칭송하는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일례로 1872년부터 3년간 그 유명한 빈 악우협회 회장을 맡는 등 당시 음악가들에게는 물론 대중적으로도 인정받고 큰 인기를 누린 그였다.


베토벤을 향한 강한 존경이 만들어 낸 콤플렉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브람스는 시대의 흐름을 따르지 않는 작곡가였다. 같은 시기 독일의 바그너, 이탈리아의 베르디, 프랑스의 베를리오즈 등이 활동하며 이미 낭만주의가 화려하게 꽃을 피우던 시대에, 그것도 낭만주의의 대표 주자인 슈만의 제자인 브람스는 다시 고전파 음악으로 돌아갔다. 이 독자적인 행보는 물론 베토벤에 대한 추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음악가들은 브람스를 베토벤에 버금가는 작곡가로 평가했지만 브람스는 지나칠 정도로 겸손했다. 베토벤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했기 때문인데, 그만큼 브람스는 베토벤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자신은 베토벤과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는데, 일설에 따르면 브람스가 평생에 걸쳐 단 네 곡의 교향곡만 남긴 것도 결국 베토벤 그 이상의 곡을 쓸 수 없다는 좌절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쯤 하면 짐작했겠지만, 브람스 또한 베토벤처럼 다작을 하는 작곡가가 아니었다. 교향곡 하나에 이미 여러 교향곡의 모티브들이 들어 있던 베토벤의 곡처럼 브람스의 작곡 스타일도 그러했다. 그러니 한 곡 한 곡을 쓰는 데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 심지어 1876년 발표된 교향곡 1번은 무려 20년에 걸쳐 완성됐을 정도다.

베토벤과 비슷한 길을 걸었던 브람스의 곡들도 어딘가 베토벤의 곡들과 닮아 있다. 당시 브람스의 팬이자 유명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러가 브람스의 제1번 교향곡을 두고 베토벤 교향곡 10번이라고 평했던 게 단적인 예다. 헌데 베토벤과 브람스는 분명 다르다. 베토벤 음악과는 다른 구성을 취하고 있고, 강렬하긴 하지만 베토벤의 강렬함과는 또 다른 맛이다.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는 예측 불허의 긴장감이 있지만 템포에 여유가 느껴지는 곡, 이렇다 할 하이라이트는 없지만 밀도 있고 쫀쫀한 짜임새가 돋보이는 곡, 그게 브람스다. 베토벤을 좇았지만 결국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음악을 구축했다고 해야 할까. 브람스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베토벤보다 더 남긴 곡수가 적은 브람스는 모든 곡이 명곡이다. 네 곡의 교향곡을 비롯해 2대 서곡인 ‘비극적 서곡(Tragic Overture)’과 ‘대학축전 서곡(Academic Festival Overture)’ 또한 꼭 들어 봐야 할 곡들. 두 곡의 피아노 콘체르토와 세 곡의 피아노 소나타, 베토벤처럼 딱 한 곡만을 남긴 바이올린 콘체르토 역시 반드시 감상해 보기를 권한다. 음악적 유사성 때문인지 베토벤 연주로 이름난 명지휘자들과 연주자들은 대부분 브람스의 곡으로도 유명하다. 베토벤 연주를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모차르트의 곡을 잘 연주하는 건 아니지만, 베토벤과 브람스는 거의 필요충분조건이 성립될 정도다.

대부분의 클래식이 들을수록 좋아진다는 장점이 있지만, 브람스의 곡은 더욱 인내를 요한다.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클래식 마니아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 또한 그랬다. 베토벤과 모차르트만큼이나 브람스를 많이 들었음에도 브람스의 곡은 여전히 외우기가 힘들 정도다. 고등학교 시절, 처음 브람스의 곡을 들었을 때도 그리 끌리지 않았다. 베토벤과 비슷한 점이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대학 시절 다시 듣기 시작하면서 점점 좋아지더니 급기야 중독이 돼 한때는 브람스에 미쳐 있었던 시기도 있었다. ‘베토벤에 그토록 열광했던 내가 왜 브람스에겐 끌리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필자의 답은 브람스가 베토벤보다 더 내면적이라는 것이었다.

필자처럼 첫 느낌에 끌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브람스는 듣기 위해 노력해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 음악사적으로도 중요하지만, 들을수록 진짜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살다 보면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순간이 많은 법. 특히나 클래식은 남의 이야기를 믿고 꾸준히 듣는 자세가 필요하다.


정리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