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window): 빛의 통로

커다란 창문을 내기 어려웠던 중세 초기, 좁은 창문을 통해 어두운 실내로 들어오는 한줄기 빛은 소중함 그 자체였다. 특히 교회의 창문은 신성한 빛의 통로로 여겨졌다. 중세의 상징체계에서 빛은 신과 마찬가지로 모든 가치의 근원이며 진리, 권능, 지혜를 뜻했다.
1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 1495~1497년,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2 알브레히트 뒤러, ‘멜란히톤’, 1526년, 보스턴미술관3 뒤러, ‘멜란히톤’ 세부4 얀 반 에이크, ‘수태고지’, 1434~1436년, 워싱턴 내셔널갤러리
1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 1495~1497년,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2 알브레히트 뒤러, ‘멜란히톤’, 1526년, 보스턴미술관3 뒤러, ‘멜란히톤’ 세부4 얀 반 에이크, ‘수태고지’, 1434~1436년, 워싱턴 내셔널갤러리
수많은 유리창이 층층이 쌓인 고층건물들은 현대 도시에서 당연시되는 흔한 풍경이다. 크고 투명한 유리창 덕분에 외부의 위험은 차단하면서 밝은 빛을 실내 깊숙이 끌어들일 수 있다. 산업혁명 이후 판유리의 대량 생산과 철근 콘크리트 공법의 발달로 사람들은 커다란 창문이 수없이 달린 건물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큰 창문을 내기 어려웠던 천 년 전 중세 초기의 건물은 낮에도 자연광선으로 실내를 충분히 밝힐 수 없었다. 좁은 창문을 통해 어두운 실내로 들어오는 한줄기 빛은 그만큼 소중한 것으로, 특히 교회의 창문은 신성한 빛의 통로로 여겨졌다. 중세의 상징체계에서 빛은 신과 마찬가지로 모든 가치의 근원이며 진리, 권능, 지혜를 뜻했다.

중세 후기 고딕 시기에 이르러 건축사상 역학적으로 가장 뛰어난 건축술이 발달했다. 고딕 건축은 벽체가 받는 힘을 기둥으로 분산시켜 과거보다 훨씬 큰 창을 낼 수 있었다. 고딕 성당들은 넓어진 유리창을 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영롱하게 빛나는 색유리는 햇빛을 투과해 바닥에도 다채로운 무늬를 새기며 교회당 내부를 신비롭게 물들였다.


신의 존재를 구체화하는 장치로서의 창문
기독교를 주제로 다룬 회화에서도 창문은 신성함을 나타내는 모티브로 종종 사용됐다. 그중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는 ‘수태고지’ 장면에서 창문은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였다. 일반적으로 수태고지는 마리아가 방에 혼자 있을 때 일어났다고 보는데,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이 기적적인 수태를 일으키는 것으로 묘사되곤 했다. 그 좋은 예로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가 그린 ‘수태고지’를 들 수 있다. 이 그림은 수태고지의 장소를 마리아의 집이 아닌 교회로 설정해 사건의 성스러움을 강조했다. 교회 안에는 수태를 알리는 천사와 이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마리아가 있고, 배경에 고딕 양식의 높은 천장과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창문이 보인다. 왼쪽 위층의 밝은 창문에서는 빛줄기가 들어와 마리아를 향해 사선으로 내려오고 있다. 그 빛은 일곱 줄기로 갈라져 성령의 일곱 가지 선물을 나타낸다. 빛줄기를 따라 성령이 비둘기 모양을 하고 마리아의 머리 위로 날아오고 있다. 이처럼 창문은 빛의 통로로서 보이지 않는 신의 존재와 그 활동을 구체화하기 위해 적절한 장치로 활용됐다.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최후의 만찬’에서 창문을 이용해 신성함을 표현했다. 보다 현실감 있는 묘사를 추구한 레오나르도는 등장인물들에게 동작으로 감정을 생생하게 드러내도록 함으로써 전에 없이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이전 화가들의 ‘최후의 만찬’ 그림은 인물의 움직임이 거의 없어 현실적인 사건이 아니라 성경책 속의 옛 이야기를 엄숙하게 반복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예수와 제자들의 머리 주위에 금빛 후광을 그려 넣어 신성한 존재임을 표시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후광을 전부 제거해 얼핏 보아 누가 성인이고 누가 죄인인지 알 수 없도록 했다. 만찬에 참여한 사람들이 일반인과 전혀 다른 존재가 아니라 지상에서 나고 자란 현실의 인물임을 자연스럽게 표현한 것이다. 심지어 중앙에 앉아 있는 예수의 머리에도 후광은 첨가되지 않았다. 예수는 특별히 빨강과 파랑의 옷을 입고, 소란스런 제자들의 움직임과 달리 혼자 조용히 고립돼 있다. 이런 모습에서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정을 잘 나타냈다고 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 예수는 신과 같은 존재인데, 후광을 그리지 않고 어떻게 그것을 알릴 수 있을까. 그렇다고 상투적으로 후광을 그린다면 인간 예수로서의 현실감이 없어질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이 딜레마를 창문을 이용해 명쾌하게 해결했다. 예수의 뒤편에 창문을 만들어 그의 주위로 빛이 스며들도록 한 것이다. 그는 빛과 신을 동일시한 전통에 따라 신성함을 표현하고, 창문을 셋으로 그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상징하게 했다. 그 창밖에 보이는 풍경은 세속의 자연이지만 거기에는 자연을 만든 창조주의 위대함이 내포돼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림의 엄격한 대칭구도, 원근법에 철저히 맞춘 공간, 열두 제자를 셋씩 짝지어 네 그룹으로 분리한 계산, 이 모두가 질서와 균형이 잡힌 신의 섭리를 암시한다. ‘최후의 만찬’에서 창문은 이러한 구성의 중심으로 후광을 대신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더욱 완벽하게 제시한다. 창을 통해 멀리 보이는 하늘은 영원한 천상의 세계를 열망하게 한다. 그런데 중앙의 큰 창문과 예수가 겹쳐 있으므로 그곳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통과해야만 다다를 수 있는 세계다.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신비로운 통로
르네상스 회화에서 신성한 창문은 인물의 배경에만 국한되지 않고 인물 속에도 묘사됐다.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는 자화상과 ‘멜란히톤’ 같은 인문주의자의 초상화에 창문의 형상을 숨겨 놓곤 했다. 필리프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은 철학자, 신학자, 교육자로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을 주도하고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체계를 정립한 인물이다. 그의 초상화에서 뒤러는 학자의 총명한 지성을 표현하기 위해 넓은 이마를 강조하고, 크게 뜬 눈은 밝게 하이라이트를 주어 반짝이도록 했다. 그런데 눈동자를 확대해보면 그 빛나는 부분은 바로 창문이다. 창문의 뚜렷한 십자형 창틀이 기독교적 상징성을 더욱 확고히 한다. 눈 속의 창문은 이 학자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음을 나타내며, 한편으로는 그의 눈 자체가 신성한 빛의 통로인 창문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멜란히톤의 학문이 궁극적으로 신앙심을 지향하며, 그의 뛰어난 지혜는 눈으로 들어온 성스러운 빛의 작용이라는 것을 뜻한다. 교회당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성전을 밝히듯이 사람의 눈으로 들어오는 빛도 영혼의 집인 신체를 밝혀야 한다는 뜻이다.

뒤러는 인문주의자의 학문적 추구가 종교적 지향과 다르지 않으며 화가로서 자신의 예술도 그와 같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관념은 학문, 종교, 예술의 조화와 합일을 추구한 것으로, 곧 르네상스 예술의 이상이었다. 이처럼 르네상스 시대에 창문 모티브는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신비로운 통로였으며, 또 다른 중재자인 예술가의 지적인 표현 수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박은영 미술사가·서울하우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