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line 제 36호 (2008년 05월)

월가의 선수들이 움직인다

바빠진다는 건 뭔가 변화가 있다는 방증이다. 변화에 대비하려면 바빠질 수밖에 없다. 지금 월가가 그렇다. 물론 겉으로 봐서 상황이 변한 건 없다. 경기도 좋지 않고 신용 경색도 여전하다. 압류 주택은 늘어가고 집값 하락세는 끝이 없다. 기업들의 1분기 실적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뉴욕 증시의 하방경직성이 강화됐다고는 하지만 강력한 상승 동력은 여전히 찾지 못하는 상태다.

그렇지만 시장 참가자들의 발걸음은 이전보다 바빠졌다. 뭔가 분주하다. 변화의 핵심은 간단하다. 투자처를 고르는 것이다. ‘뭔가 살게 없을까’ 하는 기미가 역력하다. 다름 아닌 ‘바닥론’의 확산 때문이다. 신용 위기가 최악의 상황을 지났고, 이에 따라 뉴욕 증시도 바닥을 쳤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여기에 1분기를 저점으로 미 경기가 회복세로 돌아설 것이란 분석도 가세했다. 1분기 기업 실적이 좋지 않은 건 이미 예상됐던 것이라며 ‘그 이후’를 겨냥한 셈법이 활발하다.

물론 실제 상황이 어찌 전개될지는 모른다. 조지 소로스 등 내로라하는 대가들은 여전히 ‘미국 경기의 장기 침체론’을 외치고 있다. 자칫 섣불리 움직였다간 큰코다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선수’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는 것이 주는 의미는 크다. 이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파문이란 압박에 짓눌려 긴긴 겨울잠에 빠졌던 투자자들이 투자 전략을 가다듬을 때가 임박했다는 점이다.

‘압류 공포’와 ‘압류주택 버스 투어’

미국의 바닥 경기는 아직 겨울이다. ‘끝 얘기’는 경기를 앞서가는 금융시장에서나 나오는 얘기다. 주민들이 느끼는 체감 경기는 이제 초겨울이다. 경기 침체의 핵심으로 지목되는 주택 경기는 말이 아니다. 대출 원리금을 내지 못해 집을 압류당하는 가구가 늘고 있다. 주택 소유자 7명 중 1명은 올해 안에 대출금을 갚지 못해 집을 빼앗길 것이란 생각을 갖고 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인 60%는 앞으로 2년 안에 집을 사는 것은 바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한다.

실제가 그렇다. 미국 집값은 매달 하락세다. 2월 중 기존 주택 판매 실적이 약간 늘었지만 압류 주택이 대거 매물로 나온 덕분이라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이 55명의 이코노미스트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주택 경기 바닥은 내년이나 돼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건 현재의 실상이다. 그러나 그냥 넘길 수 없는 풍경들도 있다. 그중 하나가 ‘압류 주택 버스 투어’다. 특정 지역에 매물로 나온 압류 주택 10~20여 채를 버스로 5~6시간 동안 돌아보는 여행이다. 참가자들은 값싼 주택을 한꺼번에 비교하면서 고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투어를 주관하는 부동산업자들은 손님들을 한꺼번에 모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대개 버스에는 모기지 브로커와 주택 수리 전문가, 변호사, 부동산 중개인 등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동승한다. 압류 주택의 수리 비용 및 세금 등에 대해 일일이 설명해 준다. 투어 참가자들로선 현장에서 집값 및 각종 비용 등을 산출해 볼 수 있다.

압류 주택이 쏟아지고 있는 플로리다와 캘리포니아 지역에선 버스 투어가 일상화돼 있다시피 한다. 집을 잃은 사람들로선 속이 쓰리기 그지없다. 그렇지만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나쁜 소식만은 아니다. 집을 사려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아지고 있다는 걸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최근 버스 투어엔 고객들이 몰리고 있다. 이 중에는 달러화 약세를 이용한 외국인도 많다. 싼값에 골라 골라잡을 수 있는 매력이 그만큼 커졌다는 방증이다. 버스 투어뿐만 아니라 압류 주택 경매에 상당한 투자자가 몰리는 등 값싼 주택을 중심으로 매기도 늘고 있다. 비록 시가보다 10~20%가량 싼 압류 주택을 겨냥한 것이지만 집을 사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해지고 있다는 것 자체는 고무적이다. 긴 겨울을 지나면서 나타난 미 경제의 새로운 변화다.

‘1조 달러 손실’과 ‘금융주 사냥’

서브프라임 파문 이후 골칫덩어리는 금융주다. 끝도 없이 손실을 쏟아내며 글로벌 증시와 글로벌 경제를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는 게 바로 금융주다. 작년 4분기를 기점으로 고비를 넘긴 것 같던 서브프라임 관련 손실은 1분기에도 역시 계속되고 있다. 미국 4위 은행인 와코비아은행은 지난 1분기 중 3억9300만 달러의 손실을 기록, 7년 만에 첫 적자를 기록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손실이 예상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금융주의 서브프라임 손실이 계속되는 한 ‘희망’은 없다. 비관적 전망도 많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관련 손실이 세계적으로 최대 945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모기지 부문에서만 5650억 달러의 손실이 발생하고 신용카드 등 다른 부문 손실까지 합치면 9450억 달러에 달할 것이란 전망이다. 현재 실현된 손실이 2000억 달러에 달하는 점을 감안하면 금융주의 손실 행진은 이제 5분의 1밖에 진행되지 않았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헤지 펀드의 대부’ 조지 소로스도 “금융 회사의 손실이 1조 달러를 넘을 수 있다”며 이에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이런 전망에다 1분기 금융 회사의 실적이 좋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면서 ‘금융 위기는 끝’이라고 주장하던 목소리는 점차 힘을 잃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금융주의 손실 행진에서도 주목할 것은 있다. 바로 자본 확충이다. 금융 회사들은 손실을 발표하면서 그에 걸맞은 자본 확충 방안을 함께 발표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손실 발표에 따른 충격이 최소화되곤 한다. 천문학적인 손실 발표에 아무 대책이 없었던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진 모습이다. 와코비아은행은 손실 발표와 함께 70억 달러의 자본 확충 계획을 내놓았다. 씨티그룹도 120억 달러의 자산 매각 계획을, 워싱턴뮤추얼도 70억 달러의 자본 유치 계획을 각각 발표했다.

이처럼 금융 회사들이 자본 확충을 꾀할 수 있는 건 바로 ‘선수’들의 투자가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와코비아 워싱턴뮤추얼 씨티그룹 등에 자금을 공급한 주체는 사모 펀드다. 사모 펀드는 서브프라임 파문 이후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그런 사모 펀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건 역시 상당한 의미를 담고 있다.

사모 펀드는 돈 냄새에 관한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다. 그런 사모 펀드가 대규모 손실에 시달리는 금융 회사에 대규모 자금을 투자했다는 것은 이제 금융 회사가 망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섰다는 걸 뜻한다. 바닥에 주식을 사서 차익을 올리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다. 베어스턴스를 거저먹은 JP모건체이스는 다른 은행을 노리고 있다. 벌처 투자가로 유명한 윌버 로스도 서브프라임 모기지 업체를 인수한데 이어 금융 회사를 다음 타깃으로 정했다. 내로라하는 투자자들 사이에 금융주가 관심의 대상이 됐다는 건 금융주의 바닥이 가까워졌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어쨌거나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상당한 변화다.

‘기다림의 미학’과 ‘자산 매입론’

결론은 이렇다. 상황은 별로 변한 게 없다. 전체적으로 좋지 않다. 하반기 경기가 살아난다는 보장도 없다. 그런데도 시장 참가자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미국의 개인 투자자들의 대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경기가 어려울 때는 방어가 최선이므로 기존 자산 지키기에 몰두하는 부류가 한 가지다. 이들은 가능한 한 미국 국채 등 안전 자산이나 현금성 자산을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한 뒤 ‘때를 기다리는 투자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폭풍우가 불 때는 피하는 게 최고이며 전망이 불투명할 때 섣불리 움직여서는 낭패를 당할 수 있다는 게 이들이 내세우는 이유다.

다른 한 부류는 적극적인 자산 편입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주식을 사고, 값싼 집을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 생각의 기저엔 ‘더 이상 추락은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지금 집이나 주식을 사더라도 손해는 보지 않을 것이란 계산이 전제돼 있다. 그러므로 값이 싼 지금 주식이나 집을 매입해 투자 수익을 극대화하자는 논리다.

그렇지만 이들에게도 전제는 있다. 단기성 투자는 지양한다는 점이다. 사실 미 경기나 뉴욕 증시가 바닥을 쳤다고 가정해도 언제 살아날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6개월 등 단기적 관점으로 투자에 나서는 건 곤란하다. 경기가 살아나지 않으면 만사휴의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는 사람들도 2년 안팎의 중장기 관점에서 여윳돈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요즘 월가의 흐름이다. 미 경기와 뉴욕 증시의 흐름이 글로벌 경기와 글로벌 증시에 영향을 미친다고 가정할 때 이들의 투자 전략도 한번쯤 생각해 봄직한 시점인 듯하다.

하영춘 한국경제신문 뉴욕 특파원 ha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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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08-04-25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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