톈안먼 광장에 걸린 마오쩌둥의 초상화

중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베이징의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아직도 걸려있는 마오쩌둥(毛澤東)의 대형 초상화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언제 때 사람인가. 그 초상화만 없다면 중국이 사회주의국가인 것을 잠시 잊어버릴 정도로 변해있는 오늘날 아직도 마오가 멀쩡히 눈을 뜨고 광장의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왕조나 체제가 바뀌면 새로운 집권자가 전임자의 흔적을 깡그리 지워버리는 관례를 보면 그 의문은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불멸의 이노베이터 덩샤오핑>(최재선 지음·청림출판)이란 책에서 찾을 수 있었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鄧小平)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동지였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면서 덩샤오핑을 주자파(走資派: 문화대혁명 당시에 자본주의 노선을 따르던 정치세력)로 몰아 퇴출시킨다.

그 후 마오쩌둥은 정치국 회의에서 덩샤오핑을 다시 전면 복권시킨다. 마오쩌둥은 이러한 결정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덩샤오핑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덩샤오핑의 일생을 볼 때 ‘잘한 것이 7이고 잘못한 것이 3(功七過三)’이다. 바라건대 과거의 과오는 서서히 고쳤으면 한다.”

놀랍지 아니한가. 문화대혁명 때 공자를 자주 인용하는 린뱌오(林彪)를 비판하는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으로 전국의 비석(碑石)을 모조리 부수었던 그가 노선을 달리하는 정적에 대해 이처럼 관대한 평가를 하고 다시 복권시킨 마오쩌둥의 통 큰 양면성은 놀라울 뿐이다.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에 덩샤오핑 역시 ‘공7 과3’을 언급하며 마오쩌둥 격하운동을 벌이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그는 톈안먼에 걸려 있는 마오쩌둥의 초상화도 철거하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마오쩌둥이 만년에 과오를 범했지만 전 생애를 통해 볼 때 중국 공산당 혁명의 아버지로서, 그 공로가 과오보다 훨씬 많으므로 공적이 먼저고 과오는 그 다음이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에 대한 복수나 격하가 아니라 공적을 치하하는 것으로 과거의 역사를 매듭지었던 것이다.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다면 모험적인 결정으로 이때까지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개척해 나갈 수가 없다.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다면 모험적인 결정으로 이때까지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개척해 나갈 수가 없다.
‘전 생애를 통해서’ 평가

여기서 주목할 만한 말은 ‘전 생애를 통해서’라는 말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짧지 않은 시간 동안에 과(過·잘못한 일) 없이 공(功·잘한 일)만 이루며 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보통 사람이면 절반만 잘 하고 절반은 실수하게 마련이다.

약간 성공한 사람이면 6 대 4 정도이고, 7 대 3이면 아주 잘한 편이다. 공이 과의 배보다 더 많지 않은가. 그러니 공이 7이고 과가 3이면 충분히 인정할 만하다는 것이다.

덩샤오핑이라고 어찌 과오가 없겠는가. 그는 1989년 6월의 2차 톈안먼 사태 때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학생과 노동자 시민들을 탱크로 무력 진압한 역사적 오점을 남겼다. 그러나 마오쩌둥, 덩샤오핑 모두 이러한 사태를 빌미 삼아 그들의 공적까지 폄하해 매도해 버렸다면 오늘날 베이징 톈안먼 광장의 마오쩌둥 초상화와 전국 대도시 광장에 걸려 있는 덩샤오핑 초상화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저자 최재선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복수의 역사, 단절의 역사로 국력을 낭비하고 역사를 퇴보시키는 국가들의 사례를 수없이 보아왔다. 중국의 최고 지도자들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역사를 발전시키고 상생의 역사를 써나가려면 용서와 관용의 미덕을 갖춘 리더십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장지연, 최남선, 이승만의 ‘전 생애적’功過는 얼마일까?

최근에 을사늑약(1905년)에 반대하는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날에 목 놓아 통곡함)’을 쓴 언론인 위암(韋庵) 장지연 선생을 비롯한 19명의 독립유공자에 대한 서훈 취소 기사와 4·19혁명 기념식 때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 씨가 사과하려 하자 희생 유족들이 거부한 기사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육당(六堂) 최남선을 비롯한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수많은 사람들은 과연 ‘전 생애를 통해서’ 평가받은 것인지, 그들의 일시적 잘못이 과연 전 생애를 통해 이룬 공적과 비교할 때 3할 이상의 비중을 가지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싶다. 조금의 흠이나 잘못이 있어도 제외시켜 버리면 살아남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 걱정이 아닐 수 없다.

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고경영자(CEO)는 하루에도 수많은 의사결정을 하면서 조직을 이끌어간다.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사심 없이 합리적인 예측을 하고 의사결정을 했더라도 결과적으로 잘못될 수 있다. 얼마간의 잘못을 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이러한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다면 모험적인 결정으로 이때까지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개척해 나갈 수가 없다. 프로젝트 전체적으로 볼 때 ‘공7 과3’이면 인정하자. 잘못된 30%의 과오를 모른 채 지나서는 안 되겠지만, 그 과오를 빌미로 70%의 공적을 깡그리 무시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흑(黑) 아니면 백(白)’,‘아군(我軍) 아니면 적군(敵軍)’,‘전부(all) 아니면 전무(nothing)’,‘좋은 놈(good guy) 아니면 나쁜 놈(bad guy)’이란 식의 이분법적 분류 방법을 넘어서야만 보다 성숙한 단계로 접어들 수 있다.

흑백의 이분법을 벗어나 이렇게 한 걸음 더 성숙한 생각을 잘 나타낸 책으로 <윤치호의 협력일기>(박지향 지음·이숲)를 들 수 있다. 저자 박지향 교수가 보는 침착한 시선은 공감을 넘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친일 협력자를 가운데 두고 둘러서서 돌을 던지고 자신은 그 죄악과 무관한 사람임을 증명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그는 친일파로 매도되는 윤치호라는 일제강점기의 한 지식인의 고백(60여 년 평생 동안 영어로 쓴 일기)을 분석해 그의 사상을 밝힘으로써 단순한 이분법적 구분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다.

최남선, 윤치호, 김성수 등 많은 사람들은 자신은 조선민족을 위해 행동한다는 믿음을 견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협력자’라는 용어를 통해 좀 더 폭넓게 이들을 분류하려 했다.

“윤치호는 인간이 힘, 투쟁, 전쟁을 통해서만 완벽함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당시의 조선은 이러한 힘이 없어 먼저 힘을 기르기 위한 교육에 전력을 투입해서 언젠가는 일본을 이겨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교육발전을 위해 행동했다”는 것이다.

‘후손들의 오만함’

역사학자이자 서울대 교수인 박지향은 그 책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역사가가 사용하는 개념적 표현 가운데 ‘후손들의 오만함’이라는 말이 있다. 현재의 잣대를 과거에 들이대고 왜 그런 일을 했느냐고 선대 사람들을 꾸짖고 비난하는 태도를 이른다. 하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조상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이익과 손해를 복잡하게 계산’한 결과 ‘대단히 복잡하고 힘든’ 결정을 내려야 했던 인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측은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역사를 통해 배우는 것은 결국 현재와 미래에 살고 있는 사람이므로 우리는 이러한 이해와 관용을 통해 한 단계 더 성숙한 사회로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CEO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목표 달성에 실패한 경영자에 대한 시장의 냉정하고 단호한 평가는 불가피하지만, 작은 결과적 실패를 빌미로 해 성공한 70%까지도 깡그리 지워버리는 무차별한 이분법적 분류에서 벗어나는 것이 보다 성숙한 조직이라 할 수 있다.

퇴직한 전임 CEO의 공적과 사진을 자료실 한 모퉁이에라도 걸어두고, 그 길을 거쳐 오면서 오늘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보다 건전하고 성숙한 조직이라 할 수 있다. 톈안먼 광장에 걸린 마오쩌둥의 초상과 ‘공7 과3’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자.

전진문 영남대 경영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