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을 잡은 순간 그것이 운명이 된 사람, 붓을 잡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사람, 그리고 한글의 아름다움이 온 세상에 피어나는 그날까지 글씨를 쓰겠다는 사람. 강병인 작가가 말하는 강병인이다. ‘참이슬’, ‘엄마가 뿔났다’, 최근작 ‘착한 남자’까지 상업적 흥행은 물론 순수 작품으로도 각광받는 그의 글씨, 그리고 한글 예찬.
강병인 작가는…
호는 영묵(永墨). 중학교 때 붓을 잡기 시작해 독학으로 서예를 배웠다. 가정환경이 어려워 중학교 졸업 후 공장에 다니면서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고 출판사 디자이너로 출발해서 광고디자이너로 일하다 늦게 디자인을 전공하고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마쳤다. 수많은 제품 패키지·BI·CI 작업과 드라마, 영화, 광고, 슬로건 등을 작업했으며 현재 강병인캘리그라피연구소 ‘술통’을 운영하고 있다.


어원적으로 ‘아름답게 쓰다’라는 뜻을 지닌 캘리그라피(calligraphy)는 이미 대중에게 상당히 익숙한 분야다. 일상의 매 순간 만나는 숱한 제품 패키지에서도 그렇고, TV 프로그램명과 영화·광고 포스터, 수많은 책 표지에도 캘리그라피가 있다. 지금 당장 주변을 한번 둘러보라. 어딘가에 캘리그라피 한두 개쯤은 분명 있을 터이니.

지금이야 ‘흔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캘리그라피가 일상화됐고 더불어 손 글씨 붐까지 일고 있지만 역사가 오래지 않다. 물론 손 글씨야 글자가 존재했을 때부터 있었겠으나 예술적 장르로 각광받은 지가 비교적 최근이란 얘기다. 그리고 그 뒤에는 강병인 작가가 있다. 분야를 망라한 수많은 포트폴리오가 말해주듯 손 글씨를 예술로 승화시켜 꽃피운 이가 바로 강병인 작가다.

캘리그라피가 주목받기 시작한 건 상업적 작업이 먼저였다. 지난 2006년 ‘참이슬’이라는 소주 브랜드 손 글씨가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캘리그라피는 점점 다양한 분야의 산업으로 확대됐다. 강 작가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순수 작품보다 상업적 결과물로 더 많이 회자된다는 건 아쉬움이겠지만, 거기에는 일정 부분 그의 전략과 의도가 분명 있었다.


캘리그라피가 상업적으로 활용되면서 대중화되고 가치를 인정받은 건 사실인 것 같아요.

“그렇죠. 한국 영화 제목에 손 글씨와 붓글씨가 사용되고 책 제목, 제품명, 브랜드에 적용되면서 인식의 변화가 컸죠. 소주만 예로 들어도 하루에 소비자와 대면하는 정도가 엄청나잖아요. 기업 입장에서 보면 차별화 요소가 강한 데다 캘리그라피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스토리 때문에 소비자 반응까지 좋으니 적극 활용하게 된 거죠.”

그러다 보니 요즘엔 너무 과도할 정도로 넘쳐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일각에서는 너무 많이 쓰다 보니 피로하다, 피곤하다, 차별화가 안 된다는 반응도 있는 게 사실이에요. 원래 차별화가 가장 큰 특징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차별화되지 않을 만큼 넘친다는 건 부작용으로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단편적인 시각일 뿐 제 생각은 좀 달라요. 그만큼 캘리그라피가 가치 있다는 반증 아닐까요. 요즘은 상품이 아닌 감성을 사는 시대잖아요. 캘리그라피는 감성 요소를 자극해 구매로 연결한다는 측면에서 분명 가치가 있죠.”

캘리그라피는 순수예술보다 상업예술 성격이 강한 측면이 있어요. 의도하신 바가 있으시죠.

“처음 캘리그라피 작업을 할 때 두 가지 생각을 했어요. 당시 융합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서예와 디자인을 접목해보자는 것이 첫 번째였어요. 디자인은 감성적 측면과 이성적 측면을 둘 다 갖고 있지만 이성에 가깝고, 손 글씨는 감성이니 그 둘이 만나면 시너지가 날 것이라고 생각한 거죠. 게다가 21세기는 감성 마케팅의 시대라니 성공 여부에 대해서도 확신이 있었어요.

사실 거기엔 현실적 문제도 포함돼 있어요. 제가 광고회사 디자이너로 오래 생활했지만 만족도 없었고 발전도 없었던 거예요. 그렇다고 순수 작가로서는 생활이 어려우니 제가 쓰고 싶은 글씨도 쓰면서 경제적으로도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쪽으로 접목한 겁니다. 또 하나는 한글의 아름다움, 멋스러움, 심도 깊음을 알려보자는 것이었어요. 그건 순수 작품을 통해 보여주겠다고 생각했죠.”
단순히 멋있게 보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한글의 제자원리를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 여러 고민을 해요. 결국 글씨를 쓰는 과정은 ‘이해’인 것 같아요. 충분한 해석과 경험을 토대로 나온 결과물은 딱 보고도 알 수 있어요.
단순히 멋있게 보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한글의 제자원리를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 여러 고민을 해요. 결국 글씨를 쓰는 과정은 ‘이해’인 것 같아요. 충분한 해석과 경험을 토대로 나온 결과물은 딱 보고도 알 수 있어요.
순수 작품을 할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을 것 같아요.

“사실 작가로서 상업적 작품을 한다는 건 어려움이 있어요. 기업 입장, 소비자 입장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작가의 생각을 온전히 넣을 수 없거든요. 순수 작품을 통해 온전한 제 것이 표현되는 건데 솔직히 시간이 많지 않아 늘 고민이에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캘리그라피스트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일이 자연적으로 줄어들고 있으니 순수 작품에 매진할 시간이 더 늘어날 겁니다.”

강 작가님 ‘글씨 값’이 너무 높아서 그런 건 아닌가요.

“일보다 가격을 지키는 게 더 힘들어요. 제가 가격을 낮춰버리면 전체적으로 떨어져버릴 테니까요. 제 경우엔 대기업, 중소기업, 갓 시작한 기업 등으로 군을 나누어서 값을 매겨요. 그렇다고 글씨를 다르게 쓰는 건 아닌데 기업의 위치나 경제적 규모 정도를 따져서 차별화하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죠.”
한글세움프로젝트1 ‘봄’, 글씨 강병인·쇠작업 이근세, 2010년
한글세움프로젝트1 ‘봄’, 글씨 강병인·쇠작업 이근세, 2010년
‘참이슬’, ‘엄마가 뿔났다’ 등이 대표작이자 대중적으로도 파장이 컸는데요. 강 작가님도 애착이 크겠어요.

“두 가지 면에서 의미가 있죠. 하나는 그것들을 통해 캘리그라피의 가치를 알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가 캘리그라피를 하면서 세웠던 한글의 아름다움을 알리자는 목표를 많은 이들과 공감했다는 점입니다.”

어찌 보면 회화나 조각 같은 순수미술 장르보다 작업 과정이 더 어려울 것 같아요.

“단순히 멋있게 보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한글의 제자원리를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 여러 고민을 해요. 가령 ‘엄마가 뿔났다’의 경우 제가 작가가 아니니 전부를 이해할 순 없지만 ‘뿔’에서 연상되는 소가 희생의 이미지고 주인공인 엄마도 늘 희생하는 존재라는 점을 그 안에 녹여내고 싶었죠. 결국 글씨를 쓰는 과정은 ‘이해’인 것 같아요. 이번엔 ‘봄날’이라는 단어를 예로 들어볼까요. 봄이 오는 과정들이 참 많죠. 겨우내 얼었던 것들이 녹아내리는 과정, 그 과정에서 따뜻한 햇살의 존재감, 또 어떤 꽃은 빨리 피고 늦게 피기도 하는 등 말입니다. 그 과정들을 이해하고 해석하지 않은 채 그냥 ‘봄날’이라고 쓰면 결코 좋은 글씨가 나올 수 없어요. 충분한 해석과 경험을 토대로 나온 결과물은 딱 보고도 알 수 있어요.”

그런 풍부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힘은 뭔가요.

“어려서 시골에서 자라며 자연 속에서 뛰어 논 게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그렇다고 모든 걸 자연에서 찾을 순 없죠. 글씨란 현재의 삶을 풀어내기도 하니 수많은 정보를 직간접적으로 부딪치는 경험이 필요해요. 저 스스로는 늘 안테나를 꽂아놓고 있어요. 살이 잘 안 찌는 이유도 시시콜콜 따지는 습성 때문이고요. 등산을 하다가도 이상하게 생긴 나무가 있으면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관찰하고 상상하고 그래요. 늘 머릿속이 복잡하죠.(웃음).”
‘숲’, 2009년
‘숲’, 2009년
사람들이 강 작가님의 글씨를 보고 ‘아, 저건 강병인의 글씨다’라고 느끼는 지점이 어딜까요.

“(그는 이 부분에서 오히려 반문했고, 기자는 ‘회화적인 느낌이 강한 것 같다’고 답했다.) 그건 감정이 많이 개입돼서 그래요. 작년에 제가 한글의 이미지성, 상형성을 주제로 논문을 쓰기도 했는데, 저는 한글이 표음문자이긴 하지만 표의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결국 문자라는 건 기호이고, 그럼 표현했을 때 얼마나 자연스러운지가 중요한 건데 ‘웃자’의 ‘웃’에는 춤추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고, ‘숲’의 ‘시옷(ㅅ)’에서는 산이 연상되고, ‘콩’의 ‘이응(ㅇ)’에서는 콩 모양이 보이잖아요. 캘리그라피로 표현했을 때 그것들이 보이는 겁니다. 누군가는 그건 글씨가 아니라 그림이라고 하는데 그게 왜 안 되나요.”

가장 성공한 캘리그라피스트, 대중적인 캘리그라피스트라는 수식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대중적’이라는 부분에 대해선 캘리그라피가 대중화된 시작점을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겠죠. 저 말고도 몇 분이 더 계시는데 그분들과 제가 힘든 시절을 견뎌내면서 활성화에 기여한 건 맞아요. 하지만 ‘최고’라는 평가는 안 했으면 좋겠어요. 최고라 할 수도 없고,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해야 할 일은 더 공부해서 한글을 풍성하게 표현하는 것,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일 뿐이에요. 성공의 기준도 그래요. 물론 객관적으로 보면 어느 정도 인정도 받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워졌으니 ‘나름 괜찮아진’ 건 있어요. 이 일을 시작하기 전, 2005년까지는 진짜 신용불량자였으니 가장으로서는 빵점짜리였죠. 지금은 성공의 과정 속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2009년 카우퍼레이드코리아 출품작
2009년 카우퍼레이드코리아 출품작
작년, 재작년 전시회 반응이 대단했습니다. 올해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올해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 전시도 계획했는데 갑자기 대학 강단에도 서게 되고 또 예술의 전당에서 캘리그라피 과정도 가르치게 되는 바람에 조정이 필요한 시점이 됐어요. 충남대에서 시각디자인과 학생들과 캘리그라피 수업을 시작했거든요. 영국에서는 전 국민이 디자인 교육을 받는다는데 그 가치는 정말 놀라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저이니, 대학에서 교육을 시작하게 된 건 좋은 출발 신호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연말에는 국내에서 전시를 하게 될 것 같아요. 그동안에는 한글을 예쁘게 보여주려고 한 부분이 있었는데 이번엔 그걸 벗어나는 작품들을 계획하고 있어요. 사실 전시회를 할 때마다 한글에 대한 실험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2011년 작품들이 한글의 현대적 해석이었다면, 2012년에는 재료와 글꼴의 구도를 완전히 달리했죠. 글 쓰는 방식, 표현의 방식은 서예 기법을 그대로 가져가되 도구는 서예 도구를 버리고 나뭇가지나 회화에서 쓰는 붓을 쓴다든지, 화선지를 벗어나 판화 방식을 취하는 등 기존의 것에서 탈피했었죠.”
‘웃자’, 2009년
‘웃자’, 2009년
순수 작품들이 잘 팔리나요.

“전업 작가가 아니다 보니 판매를 잘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전시를 하지는 않아요. 보는 입장도 마찬가진 것 같아요. 전시회는 성황을 이루고 반응들은 좋은데 잘 사지는 않거든요.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이 분야의 가치 형성이 적어서 순수 작품에서는 갈 길이 먼 것 같아요. 시장이 급속히 커지고 있는 중국과 비교하면 아쉬운 부분이죠.”

그러고 보니 연구소 이름이 ‘술통’인데요. 술을 많이 드셔서 술통이라는 게 맞는 건가요.

“그렇죠. 아직도 많이 먹어요.(웃음) 좋은 글씨로 ‘술술 잘 통하는 세상’이라는 뜻도 있어요. 글씨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 안에 있는 재밌는 이야기와 감정들이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고 포근하고 기쁘게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글씨 하나로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의미인 거죠. 술이라는 게 처음 만나 서먹서먹한 사람과 친하게 해주기도 하잖아요. 그러니 술, 술통은 좋은 것이지요.(웃음).”



캘리그라피스트 강병인박진영 기자 bluepjy@kbizweek.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