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GN ODYSSEY

[Pop-up book] 평면에서 입체로 봄꽃처럼 피어나다
팝업 북(pop-up book)은 순간의 미학이다. 책갈피가 펼쳐지면 평면에서 입체로 책은 꽃처럼 피어난다. 봄꽃이 소담하게 피었다가 꽃잎으로 지듯, 책장은 입체로 열리어서 평면으로 닫힌다.

팝업 북은 마술 같은 신기함으로 아이들의 동심을 사로잡고, 소설 같은 섬세함으로 어른들의 나른한 일상을 깨운다. 자극적이고 인공적이지만 섬세하고 경이롭다. 대표적인 팝업 북의 하나인 로버트 사부다(Robert Sabuda)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루이스 캐럴의 원작 동화보다 더 동화적이고 신비하다.

책장을 넘기면 거대한 숲이 책갈피에서 튀어나오고 토끼가 숲속에서 깡충깡충 뛰어다닌다. ‘열어주세요!’ 애원하듯 적힌 문구를 따라 종이끈을 당기면 주름상자 땅 속 토끼 굴로 떨어지는 앨리스의 아득한 비명소리가 들린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 세상 저편으로 연결된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는 경험할 수 없는 것과 있는 것을 모두 경험한다.

흰 토끼, 여왕, 모자장수, 카드병사, 애벌레, 고양이, 바닷가재, 거북이의 꿈속 같은 비현실을 책갈피 속에서 꿈 밖의 현실세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아이들은 무서운 여왕이 튀어나올 때, 엄마 품을 파고들며 무서워하면서도 즐거워했고, 카드병사의 환상적인 카드 쇼에는 “우와!” 환호성을 질렀다.

팝업 북은 단순한 재미의 심심한 눈요기 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고도의 문학적 구성과 미적 노력, 그리고 과학적 기술의 결정체다. 아이들에게는 지능 개발과 정서 발달의 필수 비타민이요, 어른들에게는 삭막한 감성에 동심을 불어넣는 오래된 와인이다. 여기에 원더랜드, 새로운 세상이 있다.
팝업 북을 여는 순간 엄마는 세상을 열고 아이는 세상을 만진다. 만져보는 감각지각운동은 아이나 어른이나 모두 가장 친근한 사물의 인지 방법이요, 가장 확실한 감성의 키워드다.
팝업 북을 여는 순간 엄마는 세상을 열고 아이는 세상을 만진다. 만져보는 감각지각운동은 아이나 어른이나 모두 가장 친근한 사물의 인지 방법이요, 가장 확실한 감성의 키워드다.
팝업 북의 역사

팝업 북에서 팝업(pop-up)은 의미는 문자 그대로 팝콘이 부풀려 튀어나오듯 사물이 어딘가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책의 의미인 북이 접미사로 붙으면서 책 속에 숨어있는 이야기가 책장 밖으로 움직이며 이동하는 북 디자인의 하나다.

팝업 북 디자인의 역사는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수 없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팝업 북은 13세기 베네딕트 수도사인 매튜 페리스가 자신의 천문 연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회전 원판을 사용해 제작한 ‘천문학 책’이다. 다이얼식으로 움직이는 책은 16세기 천체의 별자리와 행성의 운행을 담은 자연과학 서적과 성경, 인체해부학·건축 서적 등으로 지식과 정보에 대한 이해와 설명의 형식을 평면에서 뽑아내 보여주는 초창기 팝업 북의 원시 형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770년 영국의 교육자인 H. 달튼은 아이들에게 즉흥적인 기쁨을 제공하고 책 읽기의 즐거움에 빠져들 수 있는 교육적이고 창의적인 책을 출간할 것을 런던 출판계에 주문한다.

이에 출판업자 R. 세이어가 1765년 ‘변형’이라는 아동용 책 시리즈를 출간한다. 흑백으로 그림을 인쇄해 손으로 하나하나 색을 칠해 그려서 완성한 이 책은 ‘어릿광대짓(harlequinades)’ 혹은 ‘배불뚝이 책(tum-up book)’이라고 불리었다. 일반적으로 책은 페이지가 일정해 두께가 고른 데 비해 ‘배불뚝이 책’은 부분적으로 접힌 부분이 있어 가운데가 불룩한 배처럼 솟아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페이지의 일부를 접었다가 펼쳤을 때 새로운 그림이 나타나는 움직이는 책의 일종으로 단순한 형식이지만 당시 런던의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상어’, 매튜 레인하트·로버트 사부다, 2006년
‘상어’, 매튜 레인하트·로버트 사부다, 2006년
다시 시간이 조금 더 지나, 1810년 런던의 출판업자 J. 풀러는 종이 구멍 위에 손으로 만든 인형에 옷을 입힌 다음 몸통을 종이 구멍에 배치하고 인형의 머리를 각자의 취향에 맞추어 꽂아 넣는 방식의 ‘종이 인형 책(Paper Doll)’을 출간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화가 W. 그리말디는 ‘뚜껑을 들어보세요(Lift the Flap)’라는 들어서 보는 책을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책이라면 글자와 설명과 도면으로 가득한 무겁고 골치 아픈 지식인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지만, 팝업 북은 호기심으로 가득한 새로운 보물상자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20세기 유선 전화기에서 무선 전화기로 진보할 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것처럼 19세기에 움직이는 책은 일종의 충격이자 혁신이었다.

1929년 뉴욕 월가의 주식 폭락으로 시작한 대공황 시대를 맞아 뉴욕의 출판업자들은 출판 시장의 몰락을 두려워해 새로운 스타일의 책을 찾고자 고심했다. 1930년을 접어들면서 유럽에서 이미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가고 있던 팝업 북을 뉴욕의 블루리본 출판사는 새로운 형태로 출간했다. 유명한 고전 동화 ‘타잔’과 ‘고아소녀 애니’, ‘탐정 딕 트레이시’ 등 미국 문화를 대변하는 캐릭터와 월트디즈니의 ‘미키마우스’를 팝업 북으로 출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1932년부터 1934년 사이 10권의 팝업 북에 사용할 일러스트와 책 제작에 필요한 기계형틀을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블루리본 출판사는 ‘Pop-Up’을 상표등록 해 블루리본에서 출판한 책 표지에는 ‘Pop-Up’이라는 단어가 찍혀 인쇄됐고, 책의 판형도 다양화했는데, 이러한 책들은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다. 결국 ‘팝업 북’이라는 고유명사가 일반화되기까지 80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다.
‘데일리 익스프레스 칠드런스 애뉴얼’, S. 루이스 지라드·론드레스, 1929년
‘데일리 익스프레스 칠드런스 애뉴얼’, S. 루이스 지라드·론드레스, 1929년
1950년대 후반 체코 프라하에 있는 수출입회사 아르티아는 혁신적인 예술가 보이테크 쿠바스타와 함께 혁신적인 팝업 북 시리즈를 만들었다. 아르티아에서 만든 수십 종류의 시리즈물은 로스앤젤레스(LA)의 그래픽 인터내셔널 회사를 통해 미국에 소개돼 팝업 북의 르네상스를 열었다. 1964년 본사를 뉴욕으로 이전하고 랜덤하우스(Random House) 출판사와 홀마크(Hallmark Card)사를 위해 아동용 팝업 북을 디자인하고 만들었다.

이듬해 ‘베네트 서프의 팝업 수수께끼’를 출판하고 랜덤하우스 최초의 아동용 책 제작을 시작했다. 20세기 중반을 넘어서 비로소 아동용 팝업 북의 새로운 장르가 열린 것이다. 론 반 데르 메르, 척 머피, 데이비드 카터, 로버트 사부다 등 전문 팝업 북 디자이너는 아직 보통 사람들에게는 생소하지만 적어도 팝업 북 세계에서는 쟁쟁한 기념비적 인물들이다.



팝업 북의 세계

팝업 북은 창의적이다. 글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내용을 돋보이게 하는 팝업 작품 또한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좋은 책은 필자의 지식과 문학적 감성을 독자와 공유한다. 책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과 만나고 책을 빌어서 울고 웃고 꿈꾸고 성공한다. 성공의 지름길은 책 세상에서 책과 함께 유년기를 보내고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되고 나아가 죽을 때까지 책을 가까이 두고 사랑하는 일이다. ‘삼국지’의 병법과 ‘탈무드’의 지혜와 섹스피어의 비극은 우리를 영혼의 세계로 이끈다.

어려서 만난 팝업 북은 어른이 돼 글 읽는 습관을 만들어주고 책과 친구가 되는 어머니의 선물이다. 팝업 북은 아이들의 세상이다. 아이들의 인지 발달은 어머니의 품에서 어머니의 심장박동과 목소리의 따뜻함으로부터 시작한다. 만져보고, 물어보고, 소리 지르며 자신의 감성과 세상의 지성과 교감한다. 팝업 북을 여는 순간 엄마는 세상을 열고 아이는 세상을 만진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 느낀다.

아이의 눈을 통해 호기심과 경이로움을 동시에 인지하고 자각하는 순간, 아이는 감성과 지성의 천재 회로를 가동한다. 손끝에 감각이 번지고 몸에 전기가 흐르고 신경이 흐른다. 아이는 눈빛이 반짝이고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무엇인가를 말하는 듯 소리 지른다. 모두 알아가고 성장하는 신호다. 만져보는 감각지각운동은 아이나 어른이나 모두 가장 친근한 사물의 인지 방법이요, 가장 확실한 감성의 키워드다. 창의력은 호기심과 적극성의 결과물이다. 팝업 북의 창의성은 아이에게는 가장 확실한 인지 발달의 첫걸음이다.
‘산타 공장’, 올리비에 샤르보넬, 2000년
‘산타 공장’, 올리비에 샤르보넬, 2000년
‘나비들’, 매튜 레인하트·로버트 사부다, 2001년
‘나비들’, 매튜 레인하트·로버트 사부다, 2001년
프랑스 화가 마티스는 만년에 종이 오리기 평면 작업에 전념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완성한 생폴드방스의 로사리오성당의 벽화와 스테인드글라스는 어린아이의 순수와 같은 최상의 경지다. 자유와 해탈의 선을 넘나드는 어린아이의 표정이 담겨 있다. 스테인드글라스의 종이 오리기는 남태평양의 바다 물풀을 연상하게 하는 ‘생명의 나무’ 연작이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함도 아니고 자신에게 위안을 삼는 천박함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손짓과 몸짓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티스는 자신의 종이 오리기 작업을 어린아이가 사물에 다가갈 때 느끼는 신선함과 순진함을 보존하는 방법으로 인식하면서 “당신은 평생 어린아이로 남아 있으면서도 세상의 사물로부터 에너지를 길어오는 성인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어린아이의 순수함은 어른의 에너지다. 그 순수함에서 시작한 창의성은 교육과 기성과 질서로 무너지고 세상이 만든 타인의 잣대에 길들여진다.

규격화되고 사회적으로 적응, 성장하는 인간의 과정은 결국 ‘길들여짐’이다. 마티스의 오리기 작업이나 사부다의 팝업 북이나 모두 종이를 가지고 시작한 예술이다. 하나는 예술이고 하나는 디자인이지만 모두 같은 배에서 태어난 순수다. 그 순수로 사람들은 감동하고 기억한다. 팝업 북은 아이의 천재성을 일깨우는 엄마의 따듯한 손길임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한 그루의 나무를 심었던 남자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갈리마르 제네스, 2010년
‘한 그루의 나무를 심었던 남자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갈리마르 제네스, 2010년
다시 팝업 북으로

팝업 북을 펼치면 나비가 하늘을 날고, 상어가 아가리를 벌리고 물속에서 튀어 오른다. 알파벳의 기린과 런던 버킹검 궁전이 책 속에 숨어 있다가 올라온다. 으슥한 밤길을 걷는 중절모의 신사는 어머니가 읽어주는 동화 속으로 천천히 사라진다. 땅에서는 동심원이 어른거리고 하늘에서는 별이 쏟아진다. 모두 무수한 상상력과 구체적인 노력이 만들어낸 예술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사부다가 만든 카드병사의 입체 팝업으로 스토리가 완성된다. 아이들은 한 편의 동화나라 속으로 이상한 여행을 하고 다시 엄마 품으로 돌아온다. 무서운 여왕의 격정도, 흰 토끼의 날카로운 목소리도, 카드병사의 성난 몸부림도 모두 사라지고 꿈속에서 꿈을 꿈꾸고 있을 뿐이다. 세상은 꿈꿀 만한 곳이다. 꿈꾸는 자가 꿈을 이룰 수 있다. 아이의 순수를 어른의 지성으로 만드는 꿈의 공간이 팝업 북이다.

영화관에 가서 팝콘을 먹으면서 영화를 보는 재미는 아는 사람만 알고 먹어본 사람만 안다. 팝업 북을 펼쳐본 아이들은 알 것이다. 상상은 언제나 실체의 저편이다. 그래서 꿈꿀 수 있지만, 팝업 세계가 펼쳐내는 눈앞의 장관은 황홀하다.

“앨리스는 언니와 함께 집 뒤에 있는 언덕에 앉아 있었어요. 언니는 혼자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앨리스는 언니가 읽고 있는 책을 슬쩍 들여다봤어요. 그림이나 대화가 하나도 없는 책이었어요. ‘그림이나 대화도 없는 책을 어떻게 읽지?’ 그때 갑자기 흰 토끼 한 마리가 앨리스 옆을 빠르게 지나갔어요.”
‘단편영화 (Court-Metrage)’, 카미유 발라디·아르노 로이, 2010년
‘단편영화 (Court-Metrage)’, 카미유 발라디·아르노 로이, 2010년
사부다의 팝업 북에는 온통 그림 천지였다. 책장 사이에서 언니의 책 읽는 모습과 토끼가 숲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모습이 앨리스 앞에 펼쳐졌다. 집채만큼 큰 나무들 사이로 꽃이 피고 하트 잎과 웃는 고양이 나무가 숲속에서 숨은 그림 찾기를 한다. “열어주세요! 나를 잡아당겨 안을 들여다보세요!” 나는 ‘나’를 잡아당겼다. 요술우물 같은 천길 깊이에 나는 앨리스가 돼 거꾸로 떨어져 내려가고 있었다. 아, 세상은 이상한 나라가 되고 사부다는 팝업으로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만들었다.

“앨리스와 그리펀이 도착했을 때 법정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어요. 배심원석에는 온갖 종류의 새와 짐승이 모여 있었고, 커다란 탁자 위에는 과일로 만든 과자가 놓여 있었어요. 앨리스는 침을 꿀꺽 삼켰어요.”

엄마의 책 읽는 목소리가 잦아들 무렵 아이는 팝업 북 너머 이상한 나라의 주인공인 여왕과 카드병사와 흰 토끼와 거북이와 모자장수와 함께 꿈속을 걸어갔다. 열어주세요, 팝업 북!


최선호 111w111@hanmail.net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동 대학원, 뉴욕대 대학원 졸업.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시카고 스마트뮤지움, 버밍햄 뮤지움 등 작품 소장. 현재 전업 화가. 저서 ‘한국의 미 산책’(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