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승 도시발전연구원장

이희승 도시발전연구원장은 컬렉션 예찬론자다. 25년 전 그저 좋아서 자기만족의 이유로 컬렉션을 시작했을 뿐이지만 결과적으로 비즈니스와 정서적 측면 모두 엄청난 효과를 누리고 있기 때문. 누구에게나 인생에 세 번의 기회가 온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에게 단연코 한 번의 기회란 바로 앤티크와의 만남, 그리고 컬렉션의 세계로의 입문이었다.
[THE COLLECTOR] 위로와 정화, 앤티크는 ‘힐링’이다
“이건 송나라 때 완(사발 모양의 찻잔)인데 굉장히 고급스럽죠? 보면 굽 부분엔 유약이 발려 있지 않은데 그게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방법이에요. 손가락으로 굽 부분을 잡고 유약에 담갔다가 빼는 식으로 작업을 했으니까요. 중국은 시대나 나라별로 특징이 다 달라요. 그래서 스토리가 다양하고 끊이지 않으니 더 매력적이죠. 한나라 때는 녹색 계열의 유약을 썼고 수나라 때는 하얀색 유약을 발랐죠. 인물 표정도 달라요. 한나라 때는 표정이 엄격하지만 당나라 때는 무척 밝아져요. 여성상도 다들 통통한 게 그 시대 미인상을 보여주죠. 아, 또….”

목자재(木子齋)라는 현판이 걸린 그곳에서 만난 이희승 도시발전연구원장은 꽤 과묵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말(?)이 많았다. 목자재의 ‘목자(木子)’는 이 원장의 성(姓)인 ‘이(李)’의 나무 ‘목’자와 아들 ‘자’자로, 말하자면 ‘이씨의 서재’란 뜻이다. 여러 점의 중국 도기와 자기들이 가지런히 진열된 그 공간은 마치 미니 박물관을 연상케 했다. 중앙에 큰 테이블과 각종 다기들, 그리고 꽤 성능 좋아 보이는, 인테리어용으로도 무척 훌륭한 오디오까지 갖추고 있어 고급 카페 느낌도 살짝 묻어난다. 같은 건물 위층에 사무실을 둔 도시발전연구원의 원장인 그는 지난 2003년 이 공간을 만들었다. 사업 관련 미팅이 잦은 그가 비즈니스 공간으로 활용할 목적이 일차적이었다면, 2000여 점이 넘는 컬렉션을 정리, 보관하고 또 언제든 보고 싶은 작품을 꺼내 볼 수 있다는 것은 덤으로 따라왔다.

“비즈니스라는 게 술 마시는 것 아니면 골프 등 뻔한데 그건 아니다 싶었어요. 그런 비즈니스는 오래 지속할 수도 없고요. 여기서 차도 마시고 와인도 한잔 마시면서 얼마든지 비즈니스 미팅이 가능해요. 또 사업 성격상 설계사무소를 많이 상대하는데 그분들이 이런 데 관심이 많아 굉장히 좋아들 하죠. 사업 이야기 전혀 안 하고 컬렉션 이야기만 해도 나중에 일은 다 잘 풀려 있더라고요. 결과적으로 이 공간을 만든 건 너무나 잘한 선택이었죠.”

미니 박물관을 만든 이유는 또 있다. 앤티크 컬렉션을 하는 대부분의 컬렉터들이 물건을 너무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 남에게 보여주는 것조차 터부시하는 걸 보면서 그는 의아했다. 오히려 내놓고 자꾸 봐야 생명력이 생긴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던 것. 같은 맥락에서 컬렉션한 작품들은 ‘감상용’을 넘어 실제 다기로도 활용한다.


컬렉션 이야기만 해도 비즈니스는 성공적
대학에서 행정학을 전공한 이 원장은 대학원에서 도시행정을 전공하면서 교통 분야와 인연을 맺었고, 박사 과정에서 교통공학을 공부하면서 지금 하는 일의 토대가 됐다. 한국교통연구원 소속 연구원으로 활동하던 그가 회사를 차린 건 지난 1997년. 직원 수 24명의 주식회사인 도시발전연구원은 도시계획, 교통계획 등 우리 삶과 밀착된 일을 하는 민간 연구소다. 인천 송도국제도시의 교통 관련 설계는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이고, 현재는 123층 높이의 제2롯데월드타워프로젝트의 교통계획을 맡아 진행 중이다.

전혀 다른 이야기 같지만 알고 보면 그가 회사를 차린 것도 앤티크를 좋아하고 즐기는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사실 연구원 시절에도 여느 회사원보다 여유 있는 삶이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조금 더 ‘나만의 시간’을 갖고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는 욕심에서 회사를 차리게 된 것.
비즈니스 미팅 공간 겸 휴식처 기능을 하는 이희승 원장의 서재 ‘목자재’ 내부. 2000여 점에 달하는 물건들이 있으며, 기분에 따라 진열품을 바꿔가며 감상한다고.
비즈니스 미팅 공간 겸 휴식처 기능을 하는 이희승 원장의 서재 ‘목자재’ 내부. 2000여 점에 달하는 물건들이 있으며, 기분에 따라 진열품을 바꿔가며 감상한다고.
“제가 일을 별로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웃음) 일이라는 건 그로 인해 좀 더 행복해지고 그러면서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그런 정도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회사를 키우지 않는 것도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싶어서죠. 심지어 저는 골프도 시간을 너무 뺏겨서 안 쳐요. 그 시간에 전시회도 가고 싶고 음악도 듣고 싶고 차도 마시고 싶은데 골프를 하니 그게 안 되더라고요.”

아닌 게 아니라 이 원장은 다양한 문화와 예술에 관한 관심과 열정이 대단하다. 군대 시절에는 그림도 그리기 시작해 지난 2006년에는 그룹전을 열기도 했고, 컬렉션을 시작하면서 더 깊이 파기 시작한 중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도 가히 ‘박사급’이다.

뿌리의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파일럿이었던 부친이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그 나라의 토산품 등을 하나둘 사오는 것을 보며 자란 어린 시절부터 영향을 받았겠지만, 본격적으로 컬렉션을 시작한 건 25년 전이다.

“컬렉션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땐 이미 우리나라 물건은 가격이 많이 올라 있어서 중국으로 눈을 돌렸어요. 마침 서울 인사동 길거리에서 마음에 드는 중국 전돌을 하나 발견했죠. 당시 그 전돌 가격이 2만 원이었는데, 길거리 좌판에서 파는 것치곤 가격이 제법 비쌌지만, 책꽂이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고 바라보면서 굉장히 큰 위안을 얻었어요. 그 전돌은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 있는데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제게 큰 위안을 준답니다.”

중국 예술품 중에서도 초기에는 사발 모양의 찻잔인 완과 그보다 크기가 작은 잔을 수집했는데 차 마시기를 즐겨하고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차를 마시는 그릇이 이렇게 사발 모양으로 큰 건 송나라 때 것이에요. 당시엔 생으로 갈아 마시다 보니 잔이 컸던 거죠. 그러다 차 잎의 독성 등으로 인해 사람들이 죽는 경우가 생기면서 나라에서 갈아 마시기를 금하고 잎차로 우려먹도록 했죠. 그래서 그 후엔 찻잔이 작아진 겁니다. 저는 특히 완을 좋아해서 많이 사 모았어요. 지금 마시고 있는 이 잔도 청나라 때 잔인데 당시 유럽으로 수출한 것을 다시 사온 거죠. 보세요. 새 잔처럼 깨끗하죠. 고가에 물건을 사간 유럽인들이 써보지도 못하고 손님들에게 자랑하는 용도로만 사용해서 그래요.”

완과 잔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그는 중국 도기(토기)와 자기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도기는 유약이 많이 안 발라지고 섭씨 800도 정도에서 구워진 것이고, 자기는 유약을 발라 섭씨 1200도 이상 온도에서 구워진 것을 말한다. 그 말인즉 가마의 온도를 섭씨 1000도 이상으로 올리는 기술이 가능했던 당 말기 이전은 거의 도기들이란 얘기. 먼저 자기를 모으던 그가 도기를 본 후에는 자기보다 더 앤티크한 매력에 빠지게 된 건 그런 시대적 배경도 있었다.

“도기는 가장 많은 게 무덤에 묻을 때 함께 묻는 부장품이에요. 다른 용도는 장식용이나 종교적 차원에서 만들었던 것들이죠. 여기 있는 모든 물건들은 하나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지만 특별히 자랑을 하자면 제가 갖고 있는 건 가짜가 별로 없다는 거예요. 사실 중국 도자기는 가짜가 많아 컬렉션하는 게 쉽지는 않거든요. 중국에서 직접 들여오는 것도 불법이에요. 저는 주로 홍콩이나 영국 런던에 있는 중국 앤티크 숍에서 구입하거나 소더비 등 경매에서 낙찰 받은 물건들이 많아요.”


앤티크가 주는 기쁨을 공유하고픈 소망
이 원장은 컬렉션에서도 유유자적한 성향이 그대로 드러난다. 물건을 찾아가기보다 어딘가에서 우연히 마음에 드는 물건을 만나면 구입하는 것이 그가 컬렉션하는 스타일인 것. 마찬가지로 물건의 가격 또한 그에겐 중요하지 않다. 아주 오래전 1억 원이 훌쩍 넘는 물건을 사기도 했지만, 그에게 컬렉션 기준이란 오직 희열을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세월이 만들어낸 가치인 앤티크는 가격으로 이야기할 수 없어요. 어떤 건 몇백억 원짜리라 해도 전혀 감동받지 못하는 게 있는 반면, 어떤 건 단돈 10만 원이어도 제겐 아주 특별함을 주는 물건들이 있으니까요. 투자 목적으로 컬렉션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저는 개인의 기쁨이 목적이니 제 감정이 더 중요한 거죠.”

갖고 있는 것만 해도 다 누리고 감상하기 어려울 지경이라 지금은 컬렉션을 하지 않고 있지 않다는 이 원장은 그가 느끼는 위안과 기쁨을 공유하고 싶은 소망을 갖고 있다. 특히 ‘신상’만을 찾는 젊은 친구들에게 앤티크의 매력을 알게 해주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여느 박물관과는 다른 도심 속 ‘문화 사랑방’을 열고 싶은 것도 그래서다.

“그동안 구입한 물건은 하나도 팔지 않았어요. 남들은 나중에 이걸 다 어떡할 거냐고 묻는데, 문화 사랑방 같은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기존 박물관은 하고 싶지 않아요. 진열품만 나열해 놓고 보고 나와 봐야 기억에 남는 건 하나도 없는 죽은 공간이 아니라, 앉아서 몇 시간이고 볼 수 있고, 또 차도 마시고 관련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공간인 거죠. 앤티크는 자꾸만 사람을 차분하게 하고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 있어요. 특히 늘 새로운 것만 좇는 요즘 젊은이들이 앤티크에 관심을 가지면서 양쪽의 균형을 이루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같은 맥락에서 그는 지인들에게 늘 컬렉션을 권한다고 했다. 꼭 앤티크가 아니라도 무언가 하나 관심을 갖고 컬렉션을 하다 보면 삶이 엄청나게 풍부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게 그의 얘기. 정서적인 것도 그렇지만 사업이나 비즈니스에 있어서도, 새로운 아이디어와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받게 된다는 측면에서도 컬렉션의 장점은 부각된다고도 덧붙였다.

“컬렉션을 한다는 건 자기만의 하나의 세계를 갖게 되는 거죠. 또 컬렉션은 반드시 여행과 동반되기 때문에 그래서 더 좋아요. 이른 퇴직이나 은퇴를 하고 삶이 재미없다고 하는 친구들에게 제가 늘 하는 잔소리가 하다못해 성냥갑이라도 모으라고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컬렉션에 대해 어렵게 생각하는 게 비용 때문이거든요. 고급스럽고 비싼 걸 모아야 한다고들 생각하는데 그게 바로 큰 걸림돌입니다. 스스로 좋으면 그만인 거예요. 저는 그림도 일부 컬렉션을 하는데, 유명하지 않은 어떤 한국 작가의 작품만 계속 사고 있어요. 그냥 제가 보고 있으면 좋기 때문이죠.”

또 하나, 컬렉션을 한 이후 그는 오히려 더 여유가 생기고 마음도 정화됐다고 했다. 이제는 인생의 동반자가 된 ‘물건’들을 바라보고 감상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그만큼 여유가 생긴 것. 게다가 사업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속물근성마저 정화되는 ‘효과’까지 톡톡히 보고 있으니 컬렉션 예찬론자가 될 수밖에.
“야근을 하다 밤늦게 여기 내려와 오페라 ‘투란도트’의 ‘공주는 잠 못 이루고’ 같은 곡을 얘들하고 같이 듣고 있으면 얼마나 좋은데요.”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삶 속에서 지친 마음이 위로받는 듯했다.
[THE COLLECTOR] 위로와 정화, 앤티크는 ‘힐링’이다
1 사천성 근처에서 발견된 것으로 이 원장이 특별히 애착을 갖는 물건 중 하나. 목이 긴 사람의 형태는 태국 카렌족을 떠올리게 하는데, 카렌족의 뿌리가 중국이 아닐까 추측하게 하는 대목이다.
2 북위 때의 도기들. 어수선한 시절이었음에도 온화한 표정이 돋보인다.
3 명나라 시절의 자기. 소더비에서 경매로 구입한 것으로 청화의 느낌이 맑은 기운을 주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4 송나라 때의 완. 굉장히 고급스러운 느낌으로 유약이 발려 있지 않은 굽이 진품이라는 증거다.



박진영 기자 bluepjy@kbizweek.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