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재윤 전 중국 삼성 상무 ‘지금이라도 중국을 공부하라’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대륙에 첫발을 내딛은 삼성 대표 중국 협상의 선구자 류재윤. 20여 년간 중국 대륙을 누비다 보니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최고의 중국 협상전문가, 중국에서도 인정하는 중국통이 됐다. 장구한 역사를 배경으로 G2(미국·중국) 국가를 넘어 대전환을 하고 있는 중국은 이제 글로벌 시대에 반드시 넘어야 할 거대한 산과 같다. 하지만 중국과 중국인의 속내를 읽고 경쟁하기엔 ‘노력’만으론 한없이 부족하다. 중국과의 협상 테이블에서 잔뼈가 굵은 저자가 노하우를 고스란히 담아 책으로 출간했으니 더없이 반가운 이유다.
[BOOK WE ATTEND] 중국이 인정한 ‘중국통’의 협상 스킬 &‘시학개론’
책의 서문에 쓰인 첫 문장이 ‘나는 중국을 모른다’이다. “따지고 보면 지난 20년간 중국에서 한 일은 중국인 친구를 많이 사귄 것뿐”이라며 겸손해하지만 1993년부터 2012년까지 약 20년간 중국 삼성의 대관 업무를 총괄해온 류재윤 전 중국 삼성 상무가 아니던가. 무엇보다 책 내용의 첫째로 꼽을 열쇳말이‘시’임을 되짚어보면 그가 중국을 온몸으로 ‘살아­­온’ 중국통임을 재증명하는 것과 다름없다. 시는 관계(關係)의 중국식 발음인데 마치 한국형 기업 형태인 재벌을 외국 언론에서 ‘Jaebul’이라고 표기해 고유명사처럼 쓰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중국 사회 네트워크의 핵심인‘시’의 파급력은 중국을 이해하는 데 진원지와도 같다. 중국 좀 안다고 하는 사람이 하나같이 입을 모으는 것이‘시’다. 하지만 누구나 중요한 줄은 알지만 이만큼 생생하고 다양하게 자신의 경험으로 녹여 설명하는 사례는 일찍이 없었다.


중국인 같은 한국인의 고백
류 전 상무가 ‘중국’을 주제로 한국에서 책을 낸다고 하자 그의 오래된 중국인 친구들은 이렇게 말했다. “네가 중국인이나 다름없는데 한국 사람들이 네 말을 알아듣겠냐?” 그만큼 그는 관찰자의 시선이 아닌 중국인 삶 속에 뛰어들어 ‘중국인이 된 한국인’의 시선을 갖고 있다는 얘기였다. 책 전체에 걸쳐 줄곧 ‘사람’을 강조한 류 전 상무는 인터뷰 내내 에두르지 않고 거침없이 “중국을 이용하려 하지 말고 공감하고 존중하라”고 강조했다.

그가 삼성전관(지금의 삼성SDI)에 입사한 해가 1989년. 1세대 지역전문가로 선발돼 대만 연수를 다녀온 뒤 중문학 전공을 살려 삼성의 중국 길을 뚫기 시작했다. 한·중 수교가 맺어진 이듬해 1993년 중국의 중앙과 지방정부의 고위직들을 직접 협상 테이블에서 상대해 삼성전관, 삼성코닝의 공장 건설 승인을 받아냈을 때 그의 직급은 대리였다. 삼성 최초의 대규모 중국 공장 구축의 물꼬를 튼 공로로 당시 윤종용 삼성전관 사장의 전폭적 신임을 받고, 이후 삼성전자를 비롯해 삼성중공업, 삼성전기 등 거의 모든 그룹 관계사의 중국 진출을 위한 협상 테이블에는 류 전 상무가 앉아 있었다. 자연스레 협상의 귀재로 불렸고 15년 만에 대리에서 상무까지 초고속 승진을 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현재 삼성그룹에서 퇴직한 후 베이징대 사회학 박사과정 졸업을 앞두고 있다.

협상 프로젝트가 시작될 때마다 그는 ‘이번에도 속이 숯검댕이처럼 까맣게 타들어가겠구나’ 했다고 한다. 협상 테이블에 앉아 수십 번씩 내면에서 만리장성을 쌓고 부수었을 테다. 황하처럼 깊은 강에서 자맥질하듯 길어 올려 쌓아온 그의 20년 중국이 궁금했다.


최근 중국의 저가 스마트폰 샤오미가 중국 내 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전자를 앞지르고 제조사인 팍스콘이 덩달아 급부상 중입니다. 직원 채용을 한 번에 10만 명씩 할 때도 있다 하니, 양적 경쟁을 따라잡기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입니다.
“자금성에 처음 가본 한국인 관광객들의 반응이랑 비슷합니다. 규모와 숫자의 위압이 상당해요. 이것이 중국의 원동력이니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당신 나라는 여전히 부패가 심하고 각종 은폐가 많다’고 비꼰 서방의 외신 기자에게 원자바오가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은 13억 인구 한 명 한 명을 다 이해할 수 있나? 그것이 가능해야 중국이라는 나라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겉에서 보이는 규모에 놀라기 이전에 그 속을 파고들어 대륙을 움직이는 힘을 파악해야 합니다.”


20년간의 중국과 삼성의 대외 협력 경험을 바탕으로 협상 스킬과 경험담을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인생의 40%를 중국에서 보냈지만 여전히 중국은 어렵고 꾸준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중국, 중국인은 눈으로 보고 머리로 배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죠. 중국이 가진 두 얼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담은 ‘중국의 역설’, 시의 실체를 담은 ‘중국의 우리’, 중국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담은 ‘중국의 지갑’, 중국의 눈으로 보는 ‘중국의 시야’, 마지막으로 중국인의 만만디를 이해하는 방법 ‘중국의 시간’으로 다섯 가지 주제를 담았습니다.”


1993년부터 삼성전관 등 중국 공장 건설을 위해 협상을 해오셨어요.
“‘백 길 사람 속은 알아도 한 길 중국인 속을 모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20년간 중국의 말단 직원부터 정부 고위직까지 두루 거쳐 협상한 결과 제 후배들에게 딱 한 가지 조언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이럴 것이다’라고 예상을 절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협상에 나가면 단 하나의 예상도 맞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규정에 상관없이 갑자기 ‘안 된다’고 모르쇠로 일관하기도 합니다. 법대로 규정대로 했는데도 이렇게 나오니 한국 협상단은 ‘아니 지금 뭐하자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어 협상이 깨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이것은 중국인 개인의 특징이기도 하고 조직이나 사회 이면에 실타래 같은 규칙들 때문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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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밝힌 현 규칙과 잠 규칙이 얽히기 때문인가요.
“의외로 중국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이들도 이 ‘잠 규칙’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 규칙은 말 그대로 명문화된 눈에 보이는 규칙입니다. 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게 숨어 있는 잠 규칙이에요. 현 규칙만 지킨다고 해도 잠 규칙이 있다면 실효성이 제로입니다. 잠 규칙이 있다고 말해주지도 않아요. 우리가 직접 찾아내야 합니다. 오래전 중국 지방에 공장 건설을 허가받기 위해 제안서를 제출했는데 위배 사항이 전혀 없는데도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어요. 위배 사항을 알려달라고 아무리 요청해도 묵묵부답이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관할 지역에서 이전에 우리 회사에 투자 요청을 했는데 거절당한 뒤 체면에 손상을 입었다고 하더군요. 그 뒤로 문서에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그 회사와는 어떤 협상도 하지 말라는 것이 잠 규칙으로 정해져 있던 것이었죠. 그래서 은퇴한 책임자를 찾아가 정중히 사과하고 현재 일을 풀어달라고 하니 ‘언제의 일인데’라며 호쾌하게 받아들이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공이 사이고, 사가 공인 것 같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우리 눈에는 단순히 공과 사를 구분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많습니다. 실제로 공보다는 사가 우선인 것은 맞습니다. 일처리에 있어서 공적인 것, 투명한 것보다는 사적인 기준, 불투명한 기준을 더 중요하게 적용시켜요. 그래서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한번이라도 더 식사하고 술자리를 가지면서 그들과 친해져야 합니다. 한국 사업가들이 아침 비행기로 베이징에 날아와 간단히 점심 먹고 오후에 중국인 파트너와 미팅한 뒤 저녁 비행기 타고 귀국하고선 효율적인 미팅이라고 만족스러워할지 모르겠지만 전혀 아닙니다. 정작 중국인들은 중요한 얘기는 하나도 안 나눴다고 생각해요. 어떤 때는 ‘그런 공식적인 장소에서, 그것도 여럿이 둘러앉아 무슨 중요한 얘기를 나눌 수 있냐’고도 합니다.”


중국에서 ‘시’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요.
“중국 사람들에게 인류를 둘로 나눠보라고 하면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라고 답할 겁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나와 직접적으로 안면이 있는 사람만 아는 사람이지요. 하지만 중국인에게는 ‘친구의 친구의 친구도 내 친구’입니다. 중국인들은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 문제의 본질과는 상관없이 그 사건이 나의 시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부터 고려해요. 만약 중국에 진출했는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이유는 하나예요. 진정한 중국인 친구를 못 사귀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인은 상대가 친구라고 여기면 아직까지 성공하지 못한 것을 그냥 두고 보지 않으니까요. 따지고 보면 지난 20년간 중국에서 한 일은 친구를 많이 사귄 것뿐입니다.”


진정한 □시는 어떻게 쌓을 수 있나요.
“뻔한 이야기이지만 진정성을 갖고 대하면 안 될 일이 없지요. 제 경험에서도 공적인 업무에서 위중한 실수를 해도 다음 날 찾아가 사과하고 문제를 이렇게 풀어나가고 싶다 말하면 그들은 호탕하게 받아들이고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킵니다. 또한 중국인들의 체면을 지켜주면서 명분만 보장해주면 친구를 위해 발 벗고 돕습니다. 거기에 더해 항상 받은 것보다 더 돌려주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에요.”


중국을 안다는 자만을 버려라
조정래 작가의 소설 ‘정글만리’를 보면 ‘중국 생활 6개월이면 중국 전체에 대해서 아는 척하고, 1년이면 자기 분야에 대해서만 아는 척하고, 10년이 넘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구절이 나온다. 알면 알수록 멀고 먼 나라가 중국의 실체임을 빗댄 것이다. ‘중국은 이렇다’고 쉽게 말하지 말라. 류 전 상무가 인터뷰 중 묵직하게 강조한 말이다. ‘끼리끼리의 문화’도 심하고 사기꾼도 많은 중국이라고 우리는 쉽게 말하지만 한국인이 중국 특유의 문화를 모르거나 표현법을 몰라서 스스로 속는 것도 많다는 것. ‘빨리빨리’를 강조하는 한국인이 ‘만만디’ 중국인과 상대하려면 먼저 ‘이해’와 ‘존중’이 바탕이 돼야 한다고 그는 재차 언급했다.


‘중국인들은 잘 속인다’는 의식이 팽배한데, 실제 비즈니스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저는 매사에 반드시 확인하고 복기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중국인들의 특징이 상사는 물론 부하직원의 체면을 앞세우다 보니 문제가 생겨도 사안이나 과정을 늘 그럴듯하게 변명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과장하거나 날조하는 경우가 많아요. 결과만 보고받거나 하는 말을 마냥 믿으면 낭패를 보기 쉽습니다. 당신 자신의 생각 말고,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얘기하라거나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그대로 말해달라고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중국 문화에 강한 전문가, 기업이 되려면 결과가 좋든 나쁘든 복기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간이 쌓이면서 이런 경험이 쌓이며 일정한 패턴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협상 테이블에서 ‘만만디’ 성격은 한국인의 ‘빨리빨리’와 매우 다릅니다.
“서구적 개념의 협상이나 일처리는 중국에서 전혀 통하지 않아요. 협상이 끝난 후 다시는 안 볼 사이라고 생각하는 서구와 달리 중국 사람들은 협상이 끝나고 나서 더 진지한 관계가 시작된다고 여깁니다. 우리가 협상 기간을 한 달로 잡고 임한다면 중국은 석 달 정도 잡는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이것이 중국식 게임의 룰이니 이해를 바탕으로 시작해야 승산이 있어요. 우리가 먼저 지고 나중에는 이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만만디에 대응하는 무기는 그보다 더한 만만디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협상할 때 항상 중국인의 ‘체면’을 염두에 두라고 했습니다.
“협상할 때에도 우리가 얻고자 하는 안이 세 가지라면 다섯 개 안을 미리 만들어 가서 ‘나머지 두 가지 안은 우리가 포기할 테니 세 개 안은 우리에게 줘라’ 하는 식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다수의 키맨에게 각자의 체면을 살려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최대한 협상안을 여러 개로 쪼개서 지켜야 할 카드와 양보할 수 있는 카드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 유리하죠.”


중국에서 사업하는 한국인에게 ‘코리안 리스크’를 언급하셨어요.
“장밋빛 전망으로 중국에 진출했다가 철수하는 기업이 많습니다. 대부분 중국에서 현지화 전략에 문제가 생긴 경우죠. 중국에 지사를 내고는 공식 언어를 영어로 채택하기도 하는데 그럼 이도저도 아니게 됩니다. 중화사상이 중국의 자존심인데 서구식 글로벌 스탠더드를 강조하면 그들과 제대로 소통할 수 없어요. 또 한국인이 전 세계가 인정하는 G2 중국을 여전히 무시하거나 중국의 성장에 대해 불편해하는 마음도 종종 내비치는데 이 또한 경계해야 합니다. 10년 전 공부했던 칭화대(淸華大) 경영학 석사 학위(MBA) 수업에서 중국과 인도를 비교하는 토론을 한 적이 있는데 중국인 학생들은 적잖이 당황스러워했습니다. 미국이랑 비교는 해도 다른 나라와는 비교해본 적이 없다는 거죠. 이는 중화사상이 뿌리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니 이런 점을 간과하지 말고 그들의 자부심을 정확히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존중과 이해가 바탕이 돼야 그들과 당당히 세계무대에서 겨룰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 성공하기 위한 마지막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처음부터 강조해 왔지만 안다는 자만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중국, 중국인을 공부해야 합니다. 중국이라는 문화권에서 성공하려면 중국인을 폭넓게 만나고 깊게 사귀면서 ‘장기관찰자’가 돼야 합니다.”


이지혜 프리랜서│사진 이승재 기자│장소 협조 퓨어아레나(02-3217-97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