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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끌로에, 1952년 첫 럭셔리 ‘프레타 포르테(기성복)’ 선봬[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끌로에① 프랑스가 유럽 패션의 중심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루이 16세 때 부터다. 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는 당시 현대판 슈퍼모델 수준이었다. 그녀는 궁정 전속 디자이너 로즈 베르탱을 두고 화려한 패션을 완성했다. 18세기 로코코 양식이 화려하게 꽃피면서 파리는 유럽 귀부인들이 동경하는 패션의 도시가 되었다. 로즈 베르탱은 프랑스 오트 쿠튀르(하이 패션, 맞춤복)의 새로운 문을 열었다. 프랑스 오트 쿠튀르 패션은 귀족들과 돈 많은 상류층을 대상으로 했다. 오트 쿠튀르의 명맥은 1920년대 샤넬, 장 파투, 뤼시앵 를롱, 1940년대 피에르 발망과 뉴룩을 발표한 크리스찬 디올, 오트 쿠튀르의 황태자라 불리는 이브 생 로랑까지 이어졌다. 샤넬의 슈트 한 벌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200시간, 웨딩 드레스는 800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비쌀 수밖에 없었다. 오트 쿠튀르의 옷은 너무 비쌌으므로 사기 힘들고, 그 수준의 기성복을 원하는 수요층이 늘게 되자 생겨난 것이 프레타 포르테(바로 입을 수 있는 옷, 영어로는 레디 투 웨어)이다. 1952년 최초의 럭셔리 레디 투 웨어 끌로에가 첫 번째 컬렉션을 발표했다. 끌로에의 창업자 가브리에라 아노카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40년 어린 시절부터 친구로 지낸 레이몬드 아기옹과 결혼한 뒤 젊은 부부는 1945년 파리로 이주했다.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 가비 아기옹(사진①)이 되었다. 파리지앵 가비 아기옹은 1952년 끌로에를 설립했다. 그녀는 첫 번째 컬렉션에서 형식적인 오트 쿠튀르 작품 대신 고품질의 패브릭과 섬세한 디테일이 조화를 이룬 편안한 실루엣의 우아하고 현대적인 작품을

    2023.11.28 14:10:42

    끌로에, 1952년 첫 럭셔리 ‘프레타 포르테(기성복)’ 선봬[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 12살의 샤넬과 71살의 사넬 [EDITOR's LETTER]

    [EDITOR's LETTER] 15년 전 쯤의 일입니다. 꽤 비싼 시계를 갖게 됐습니다. 어느 날 점심 식사 자리에 차고 나갔습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취재원 한 명이 시계를 보더니 “아 시계 눈에 띄네요”라고 했습니다. 뿌듯했지요. ‘알아봐 주는군.’ 하지만 유심히 시계를 보던 그는 “그런데 그거 진품 맞나요? 시곗바늘이….” 아놔. 아마도 평소 행색이 명품 시계와는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곗바늘 움직임이 이상해 보였겠지요. 다행히 다른 일행이 “진품 맞네. 바늘이 원래 그렇게 움직여”라고 해줘 오해에서는 벗어났습니다. 물론 나이가 좀 들고 나니 의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몇 년후 겨울. 한 중견기업 회장님과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회장님은 검정 패딩을 입고 왔습니다. 폼도 나고 회장이 입었으니 당연히 명품이겠거니 하고 브랜드를 살짝 봤습니다. 웬걸, 유***였습니다. 명품은 어쩌면 누가 걸치느냐에 따라 달라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명품은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 즉 가격을 올려도 수요가 줄지 않는 재화입니다. 미국 사회학자 소스타인 베블렌이 ‘유한계급론’에서 언급해 베블렌 효과로도 불리지요. 가격을 올리겠다고 하면 백화점 앞에 줄을 서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원래 명품은 특정 계층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상류층이 되고자 하는 신분 상승의 욕망이 소비로 나타나며 대중화되기 시작했지요. 이를 ‘파노플리 효과’라고 합니다. 프랑스 등 유럽에서는 파티나 중요한 행사 때 명품 시계를 차고 백을 든다고 하지요.하지만 한국인들은 이런 명품에 대한 고정관념(?)을

    2023.06.12 06:00:01

    12살의 샤넬과 71살의 사넬 [EDITOR's LE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