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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예 디자이너 톰 포드, 구찌 패션 명가로 만들다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구찌⑦구찌 창업자의 손자인 마우리치오 구치는 다시 한번 구찌의 영광스러운 과거를 회복하기 위해 에르메스나 샤넬과 같은 고가의 명품 브랜드로 포지셔닝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구찌는 적자를 면하지 못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투자은행 인베스트코프는 1987년 이후 구찌에 수억 달러를 투자했지만 투자자들에게 수익을 돌려주지 못해 매각을 고민하기도 했다. 마우리치오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하버드 법대 출신의 전문 경영인 도메니코 드 솔레와 버그도프 굿맨(미국의 고급 백화점) 출신의 던 멜로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고용했다.미국 뉴욕 파슨스 스쿨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톰 포드는 패션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부족했다. 그는 패션업계에 몸담기 위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일했고 열정적으로 도전을 시작했다. 그는 뉴욕에서 활동하던 유명 디자이너 캐시 하드윅에게 한 달 동안 매일 전화를 걸어 인터뷰 약속을 받아냈다. 포드는 하드윅 아래에서 보조 디자이너로 2년간 일했다. 포드는 1988년 마크 제이콥스가 디자이너로 일하는 페리 엘리스에 취업해 2년간 근무했다.톰 포드, 1990년 구찌 여성복 디자이너로 근무 시작뉴욕에서 패션에 대한 자신의 재능에 눈뜨게 된 톰 포드는 유럽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포드는 자신의 패션 스타일이 유러피언 스타일이라고 믿고 있었고 이때 이탈리아에서 일할 미국 디자이너를 물색하던 던 멜로의 눈에 띄게 됐다. 멜로의 제안으로 1990년 포드는 구찌의 여성복 디자이너로 근무하기 시작했고 그의 나이는 29세였다.포드를 채용한 멜로의 날카로운 안목은 적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구찌는 가방이나 신발 등 가죽 제품 브랜

    2021.10.03 06:00:10

    신예 디자이너 톰 포드, 구찌 패션 명가로 만들다
  • 투자은행과 손잡고 가족 경영 종지부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구찌⑥구찌 창업자의 장남인 아버지 알도와 법정 분쟁에 들어간 아들 파올로는 구찌에서 일하는 동안 입수 가능한 재무 서류를 은밀하게 분석한 적이 있었다. 그는 회사의 운영 방식을 파악하려고 했고 일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자기 나름대로 결론 내렸다. 그는 수백만 달러의 과세 대상 매출이 허위 송장으로 해외 회사로 빼돌려지고 있는 사실을 파악했다. 홍콩 소재 파나마 국적 기업들이 구찌숍스 주식회사의 디자인 공급 업체로 위장돼 있었고 분식회계 수법을 썼다. 때문에 꼼짝달싹할 수 없는 구찌의 유죄 증거물이 됐다.파올로는 그것을 무기 삼아 자기 브랜드를 사용할 자유를 얻겠다고 결심했다. 처음에는 구찌의 변호사들이 소송를 기각시켜 그 재무 서류를 봉인하는 데 성공했지만 파올로는 단념하지 않았다. 1982년 10월 퇴직금으로 변호사를 고용한 다음 부당 해고를 당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문제의 서류를 미국 뉴욕 연방법원에 제출했다. 그는 그 증거가 아버지 알도를 굴복시켜 자신을 다시 회사로 불러들이거나 독자 라인을 출시하도록 승인해 주기를 원했다.파올로는 “그 서류는 아버지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제출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아버지를 향한 파올로의 전쟁은 가족뿐만 아니라 지인까지도 갈라 놓았다. 아버지를 사법 당국에 고발한 파올로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가족들에게 외면당하는 그를 동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1983년 미국 국세청과 검찰청이 알도의 소득세와 법인세 체납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1986년 9월 알도는 700만 달러가 넘는 소득세를 탈루한 죄로 1년 1일의 징역형이 선고됐다.1988년 10년 가까이 이어졌던 가족

    2021.09.12 06:00:02

    투자은행과 손잡고 가족 경영 종지부 [류서영의 명품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