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전으로 난파 위기...마우리치오, 구찌 부활 열정으로 인베스트코프 움직여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구찌⑥ 구찌 창업자의 장남인 아버지 알도와 법정 분쟁에 들어간 아들 파올로는 구찌에서 일하는 동안 입수 가능한 재무 서류를 은밀하게 분석한 적이 있었다. 그는 회사의 운영 방식을 파악하려고 했고 일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자기 나름대로 결론 내렸다.그는 수백만 달러의 과세 대상 매출이 허위 송장으로 해외 회사로 빼돌려지고 있는 사실을 파악했다. 홍콩 소재 파나마 국적 기업들이 구찌숍스 주식회사의 디자인 공급 업체로 위장돼 있었고 분식회계 수법을 썼다. 때문에 꼼짝달싹할 수 없는 구찌의 유죄 증거물이 됐다.
파올로는 그것을 무기 삼아 자기 브랜드를 사용할 자유를 얻겠다고 결심했다. 처음에는 구찌의 변호사들이 소송를 기각시켜 그 재무 서류를 봉인하는 데 성공했지만 파올로는 단념하지 않았다. 1982년 10월 퇴직금으로 변호사를 고용한 다음 부당 해고를 당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문제의 서류를 미국 뉴욕 연방법원에 제출했다. 그는 그 증거가 아버지 알도를 굴복시켜 자신을 다시 회사로 불러들이거나 독자 라인을 출시하도록 승인해 주기를 원했다.
파올로는 “그 서류는 아버지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제출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아버지를 향한 파올로의 전쟁은 가족뿐만 아니라 지인까지도 갈라 놓았다. 아버지를 사법 당국에 고발한 파올로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가족들에게 외면당하는 그를 동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1983년 미국 국세청과 검찰청이 알도의 소득세와 법인세 체납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1986년 9월 알도는 700만 달러가 넘는 소득세를 탈루한 죄로 1년 1일의 징역형이 선고됐다.
1988년 10년 가까이 이어졌던 가족 분쟁의 소송에 대한 뉴욕 지방법원의 판결은 소비자들에게 혼란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파올로가 자기 이름을 상표나 상호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하지만 구찌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 별도 상표로 판매되는 제품의 디자이너로 파올로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허용했다.
아들의 소송으로 아버지, 감옥 가다 판사는 의견서에 이렇게 썼다. ‘카인과 아벨의 시대 이후 가족 간의 분쟁은 당사자들의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인 선택과 그에 이어지는 극심한 다툼, 무분별한 파멸을 자초하는 등의 특징을 보여 왔다. 본 소송은 우리 시대의 가장 유명한 가족 분쟁에서 발생한 작은 충돌에 불과하다.’
파올로는 1991년 부인 제니퍼와 이혼한 뒤 그녀에게 생활비를 주지 않았다. 제니퍼는 1993년 3월 위자료와 양육비 35만 달러를 지급하지 않은 파올로를 고소했고 파올로는 잠시 수감됐다. 파올로는 파산했고 채무와 간질환에 시달렸다. 간이식이 제때에 이뤄지지 않아 그는 1995년 10월 런던의 어느 병원에서 만성 간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64세였다.
파올로가 사망하고 그가 사용한 상표와 상호를 구찌가 매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찌 가문의 내분은 끝나지 않았다. 갈등의 주체가 가족 중 다른 사람으로 옮겨 갔을 뿐이었다. 파올로가 가족 사업에서 손을 뗀 시기는 공교롭게도 사촌 동생 마우리치오가 부상한 때와 일치했다.
마우리치오도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 간의 전쟁터에 들어섰다. 마우리치오는 알도와 파올로를 비롯한 사촌들의 공작으로 검찰이 체포 영장을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를 변호사에게 들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해외에서 지냈고 밀라노에 있을 때는 생활 패턴을 자주 바꿨다. 마우리치오가 요트 크레올을 사는 과정에서 자본을 불법으로 해외에 반출한 혐의에 대해 밀라노 치안판사가 체포 영장을 발부한 것이다.
이탈리아 금융 시장은 그때까지도 자유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외로 거액의 돈을 유출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1987년 6월 언론들은 충격적인 소식을 앞다퉈 보도했다. ‘꿈의 요트 때문에 폭풍을 만난 구찌, 체포 영장이 발부되다’, ‘마우리치오 구찌가 체포를 피해 도주했다.’ 스위스로 도주한 마우리치오가 속수무책으로 유배 생활을 한 지 두 달이 지났을 때 밀라노 법원은 구찌의 지분 50%를 압류했고 대학교수 마리아 마르텔리니가 회장에 올랐다.
마우리치오는 모건스탠리의 이탈리아 사장인 모란테를 통해 친척들의 지분을 모두 사들여 구찌라는 브랜드를 재편할 동업자를 찾는다는 방안을 세웠다. 인베스트코프와 접촉했다. 인베스트코프는 사모펀드 이외의 금융업계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는 투자은행이었다. 네미르 키르다르가 1982년 설립한 인베스트코프는 유럽과 북미에 투자하려는 페르시안 연안 국가 고객들의 가교 역할을 했다.
인베스트코프는 유망하지만 자금난을 겪는 회사들을 매입해 재원과 자문을 제공해 경영을 개선한 다음 되팔아 이익을 얻는 방식을 택했다. 1984년 에이본 프로덕트로부터 티파니를 1억3500만 달러에 매입함으로써 비로소 거래 시장에 두각을 보인 인베스트코프는 에이본 사장을 지낸 윌리엄 R. 체이니를 최고경영자로 임명해 티파니를 흑자 전환시켰다.
3년 후 티파니를 상장해 연간 174%라는 놀라운 수익률을 기록했고 미국의 전설을 되살려 냈다는 평판을 얻었다. 마우리치오는 인베스트코프의 간부들을 만나 조부인 구찌오의 사보이호텔 시절과 그가 차린 피렌체의 작은 상점 이야기, 알도가 미국에서 성공한 이야기, 로돌프가 밀라노에서 담당한 디자인과 경영 업무, 청년 시절 자신이 알도와 함께 일하면서 쌓은 경험에 대해 들려 줬다.
인베스트코프, 구찌 지분 50% 정도 확보 그런 다음 구찌 브랜드의 가치 하락과 가족 간의 다툼, 세금 문제, 구찌 아메리카와 이탈리아 사업부의 분열 등 현재 겪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이탈리아에는 1세대가 아이디어를 고안하고 2세대가 그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면 3세대는 크나큰 성장 문제에 직면한다는 격언이 있어요. 이 부분에서 내 생각은 사촌들과 정반대입니다. 매출이 2400억 리라(약 2000억 원)나 되는 회사를 어떻게 폐쇄적인 가족주의 방식으로 운영할 수 있겠습니까. 나도 전통을 좋아하지만 내가 추구하는 전통은 관광객에게 보여주는 고고학 유물이 아니라 창조의 토대가 되는 전통입니다.”
구찌 브랜드에 대한 마우리치오의 확고한 열정과 구찌의 부활에 대한 절박한 심정이 인베스트코프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결국 키르다르는 구찌와의 거래를 인베스트코프의 최우선 프로젝트로 삼았고 마우리치오를 지원했다. 그들은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구찌 프로젝트에 ‘(말)안장(saddle)’이라는 암호를 붙인 뒤 재무제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브랜드를 재출시하고 전문경영진을 둬 통합된 주주 기반을 확립하겠다는 계약서를 작성했다. 인베스트코프는 마우리치오의 친척들에게서 구찌 지분 50%를 사들이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마우리치오는 1988년 1월 요트 크레올을 구매하기 위해 자본을 불법 반출한 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7월이 되자 형세가 바뀌었다. 금융 법규가 개정돼 자본 반출이 합법화되자 피렌체 법원은 외환 거래 위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1988년 6월 모건스탠리는 국제적인 투자은행 인베스트코프가 구찌의 지분 50% 정도를 확보했다고 발표했다.
자료=사라 게이 포든 ‘하우스 오브 구찌(다니비앤비)’ 등 참조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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