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가스 배출 주범 몰려…일본, 플라자 합의 충격 럭셔리 브랜드로 돌파

[자동차 산업을 바꾼 대사건] 통일로 사라진 동독의 국민차 트라반트
1980년대는 미국과 일본의 무역 전쟁이 고조됐던 시기다. 특히 자동차 산업에선 경쟁 강도가 극에 달했다. 오일쇼크로 미국 소비자들이 소형차를 주로 구매하면서 일본 자동차들의 수출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차가 잘 팔리자 일본 업체들은 미국에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일본 3사 중 닛산이 1980년 가장 먼저 미국에 조립 공장(NMMC)을 설립했다. 뒤이어 혼다가 1982년에 진출했고 도요타는 1984년 GM과 NUMMI(New United Motor Manufacturing Inc) 공장을 합작했다. 도요타가 미국에 단독 공장(켄터키 조지타운)을 처음 지은 것은 1988년 5월이었다.


미국과 일본의 치열한 자동차 전쟁
무역 전쟁은 급기야 환율 전쟁의 단초가 됐다. 결국 1985년 9월 미국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프랑스·독일·일본·미국·영국으로 구성된 G5의 재무장관들은 외환시장의 개입으로 발생한 달러화 강세를 시정하기로 결의했다. ‘플라자 합의’가 채택되자 독일 마르크화는 1주 만에 달러화에 대해 약 7%, 엔화는 8.3% 각각 올랐고 이후 2년 동안 달러 가치는 30% 이상 급락했다. 그 덕분에 미국 제조업체들은 달러 약세로 높아진 가격 경쟁력으로 1990년대 들어 해외시장에서 승승장구했다.

그로부터 4년 전인 1981년 정치권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는 미국 자동차 업계는 ‘수입 할당제’라는 규제안을 통과시켰다. 1981년 5월 1일의 협정은 3년간 자동차 수출을 억제하고 협정 발효 첫 1년 동안 수출 물량을 168만 대로 제한할 것을 규정했다. 명분은 미국 자동차 회사들이 연비 기준을 맞추고 재편성 작업을 완료해 경쟁력을 갖출 때까지 수출을 자제하기로 하자는 것이었다. 이 협정은 1년 뒤 갱신됐지만 결국 폐지됐다. 이에 따라 일본 자동차 업체들은 플라자 합의 이후 럭셔리 카 브랜드를 설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적게 팔고 많이 남길 수 있는 차를 만들어야겠다고 깨달았던 것이다. 그전까지는 미국과 독일 업체들이 미국 럭셔리 마켓을 양분해 왔다. 그 결과 1986년 혼다는 어큐라를 출시했고 1989년엔 도요타가 렉서스를, 닛산은 인피니티를 론칭했다.

플라자 합의 이후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일본 업체만이 아니었다. 독일 업체들도 마르크화의 강세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포르쉐는 플라자 합의 전까지만 하더라도 향후 5년간의 성장을 계획하며 신형 차를 생산했지만 환율이 급변동하자 판매와 이익 모두 반 토막 났다. 플라자 합의 후 2년 반 동안 가격을 30% 이상 올렸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플라자 합의 전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에서 판매를 지속적으로 늘려 가던 BMW도 판매가 급감했다. 무엇보다 환율 경쟁력을 잃었던 데다 1987년 블랙 먼데이를 거치면서 북미 럭셔리 자동차 시장이 실용주의 트렌드로 변한 이유도 있었다. 일본 업체들이 신규 브랜드를 론칭하면서 엄청난 마케팅 비용을 투입하며 시장점유율을 잠식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되자 서독에 자리했던 독일 업체들은 어려움이 더해 갔다. 통일 후 동독 쪽의 경제 부흥이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고 특별세 징수 등으로 통일 독일 전체의 경제 회복이 늦어졌기 때문이다. 독일 통일 후 동독 사람 상당수는 타고 다니던 트라반트 자동차를 버렸다. 구동독 시절 특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이 차는 유독가스를 배출하는 특수 재질로 만들어져 한동안 독일 내에서 골치를 썩였다.

1997년 7월 태국이 고정환율제를 포기함과 동시에 바트화가 폭락했고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까지 신청하자 글로벌 경제엔 암운이 드리워졌다. 이 여파로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 등 주변 국가까지 경제 위기로 몰아넣었다. 무리한 투자 등으로 기업들의 재무구조가 악화되던 한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시아 금융 위기가 오면서 자동차 업계도 재편되기 시작됐다. 아시아 기업들이 어려워지면서 손 바뀜이 이뤄졌고 덩달아 기초 체력이 좋지 않던 업체들도 매물로 나왔다. 21세기를 앞두고 1998년 5월 다임러가 크라이슬러를 인수하면서 자동차 업계에선 ‘글로벌 빅 6론’이 대두됐다. 위르겐 슈렘프 당시 다임러크라이슬러(DCX) 회장은 “세계 자동차 산업에서 글로벌 빅 6만 살아남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업계에선 400만 대 이상 생산량을 확보하지 않으면 21세기에 도태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글로벌 6대 메이커는 제너럴모터스(GM)·포드·도요타·폭스바겐·다임러크라이슬러·르노를 일컬었다. 모두 당시 450만 대 이상의 판매를 기록하고 글로벌 생산·판매 네트워크를 보유한 업체들이었다. 업체마다 경쟁적으로 몸집을 불려 생존하려고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글로벌 빅 6만 살아남는다”
아시아 금융 위기의 영향을 받았던 도요타를 제외한 빅 5는 인수·합병(M&A)을 통해 계열사를 늘려 갔다. 다임러와 크라이슬러의 결합으로 대형 자동차 업체가 된 DCX는 1998년 7월 스와치로부터 스마트 지분을 모두 인수했다. 2000년 3월엔 20억 유로를 투자해 일본의 미쓰비시 지분 34%를 확보했다. 아시아 진출을 위한 포석이었다. 또 같은 해에 기아차를 인수한 지 얼마 안 돼 현대차와 파트너십을 맺고 현대차 지분 10.5%를 가져왔다.

르노는 아시아 금융 위기의 수혜를 봤다. 일본의 3대 자동차 업체 중 하나인 닛산 지분을 확보해 얼라이언스를 구성했기 때문이다. 연이은 적자로 어려움을 겪던 닛산은 1999년 3월 르노에 지분 36.8%(추후 43.4%까지 확대)를 넘겼다. 그해 르노는 민영화된 루마니아 1위 자동차 업체 다치아까지 인수했다. 2000년엔 삼성자동차까지 인수해 지금의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포드도 집중적으로 자동차 기업 쇼핑에 나섰다. 1999년 1월 레바논 출신 자크 내서가 포드 최고경영자(CEO)로 임명됐다. 그는 임명되자마자 볼보를 인수하고 프리미어오토그룹(Premier Automotive Group)을 설립했다. PAG 설립 직전에 M&A한 볼보와 기존에 인수했던 재규어·애스턴마틴, 원래부터 보유했던 링컨과 머큐리 등 고급차 브랜드를 그룹으로 묶었다. 2000년 5월 BMW로부터 인수한 랜드로버까지 PAG에 포함됐다.

이 밖의 업체들도 다양한 M&A를 하며 업계는 신속하게 재편됐다. 글로벌 1위였던 GM은 1999년 일본 이스즈 지분을 37.5%에서 49%까지 늘렸다. 2000년엔 사브의 남은 지분 50%와 스바루를 보유한 후지중공업을 매입했다. 2002년엔 한국의 대우자동차까지 인수했다. 1997년 롤스로이스 자동차 부문이 매물로 나오자 BMW는 1998년 롤스로이스 상표권을, 폭스바겐은 벤틀리 상표권과 롤스로이스 공장을 매수했다. 폭스바겐은 같은 해에 인도네시아 부호 토미 수하르토로부터 람보르기니를 사왔다. 한국에선 1998년 현대차가 기아차를 인수했고 쌍용차는 1997년 대우차에 매각됐다가 2000년 대우차와 함께 매물로 나왔다.


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수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