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제 147호 (2017년 08월)

조선 궁궐 미학의 정수, 후원으로 보는 창덕궁의 멋

최종희 교수 & 이현주 기자의 ‘최고의 뷰(view)’

[한경 머니=이현주 기자] 창덕궁은 서울의 다섯 궁궐에 담긴 한국의 미의식을 이해하는 열쇠다. 비원으로 알려진 창덕궁의 후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국내 유일의 정원으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와 근현대를 거치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무쌍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궁의 도시, 서울’의 문화 중심이자 허브인 창덕궁을 깊이 읽어본다.

복잡한 서울 도심 속, 고즈넉한 명원이 있다. 500년 조선왕조 문화의 화려한 꽃, 당대 최고의 재료와 기술이 집약된 창덕궁 후원. 임금이 사랑한 ‘왕의 정원’이자 이궁(離宮)에서 법궁(法宮)으로 위상을 높인 창덕궁.
푹푹 찌는 여름의 어느 토요일 오전,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앞에서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 시작됐다. 창덕궁 100% 즐기기를 위한 최고의 뷰를 찾는 여정이다. 최종희 배재대 원예조경학부 교수는 이날 일일 가이드로 변신했다. 평소 궁궐을 보고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기자에게 최 교수는 “지금부터 30분만 지나면 도심이라는 생각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라며 호언장담했다.
보통의 창덕궁 관람 코스는 전각 관람과 후원 관람으로 나뉘어 1) 돈화문→궐내각사→금천교→인정전→선정전→희정당→대조전→낙선재, 2) 후원 입구→부용지→불로문→애련지→존덕정과 폄우사→옥류천→연경당으로 진행된다. 이날의 경로는 전각과 후원을 가로지르는 비밀의 화원을 통해 3) 돈화문→금천교→인정전→선정전→대조전→가정당→부용지→연경당→애련지→존덕정→옥류천→낙선재로 이어졌다.

연간 궁궐 관람객
1000만 명 시대
이른 오전부터 사람들이 적지 않게 모여 있다.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 팍팍한 현실에서 벗어나 잠시 문화적 호사를 누리고 싶은 시민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인증샷’을 찍는 한복 입은 젊은이들도 있다. 이제 서울의 고궁 탐방은 하나의 놀이 문화로 자리매김했다. 지난해를 기준으로 연간 궁궐 관람객은 처음으로 1000만 명을 돌파했다. 우리 역사에서 궁궐은 소실, 침탈, 파괴, 홀대 등의 오랜 수난을 거쳐 왔음을 기억할 때, 연간 궁궐 관람객 1000만 명 시대는 1980년대 이후 가속화된 궁궐 복구, 정비와 함께 뿌리를 잊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마음이 빚어낸 결과다.
612년의 역사를 가진 창덕궁은 서울의 다섯 궁궐 중 가장 그 원형이 잘 보전돼 있는 곳이다. 조선의 궁궐 하면 경복궁이 첫손에 꼽히지만 이곳 창덕궁은 경복궁과는 다른 측면에서 대표성을 갖는다. 태조 이성계는 정궁 경복궁 이외에 태종의 명에 따라 별장 형태의 이궁으로 창덕궁을 지었는데, 17세기에 들어오며 위상이 달라졌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도성의 궁궐이 소실된 후 임금이 거처하는 법궁이 창덕궁이었다. 특히 조선왕조 문화가 색깔을 가장 짙게 드러내는 17~19세기, 이곳은 가장 찬란한 한국의 문화를 담는 시대의 그릇이었다.
창덕궁은 한양의 동쪽 부분에 자리 잡고 있어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로 불리는데, 1800년대 초반 수많은 화공들이 공들여 그린 창덕궁과 창경궁이 그 유명한 동궐도다. 고려대 박물관에 원본이 진열돼 있다. 돈화문 바로 앞에 자리한 무성한 회화나무도 동궐도에 그 모습 그대로 묘사돼 있다. 창덕궁은 설계 당시부터 언덕이 많고 굴곡진 지형에 지리적 특성에 따라 자연에 순응하는 형태로 지어졌다. 크게 세 개의 축에 따라 전각들이 횡으로 배열돼 있다. 최 교수는 “창덕궁을 제대로 보려면 2박 3일로도 부족하다”며 “건축에 관심이 있으면 건축 동선을 따라, 또 식물이나 물길, 소품 등에 따라 보는 것이 창덕궁을 이해하는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이다”라고 설명했다.
창덕궁 돈화문에서 북쪽으로 걷다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금천교 다리를 건너자 대문인 진선문이 나온다. 금천교는 돈화문과 진선문 사이를 지나는 명당수 위에 설치돼 있는데, 태종 11년(1810년) 설치된 이후 숱한 화재와 전란에도 불구하고 창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현존하는 궁궐 안 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진선문을 지나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정전인 인정전을 마주하게 된다. 태종 5년(1804년)에 지어진 인정전은 결혼식, 즉위식 등 국가의 중요 행사가 행해진 곳으로 사극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장소다. 지금의 인정전은 전소된 후 다시 세워진 것이다. 설명을 듣고 인정전 바닥을 보니 박석이 햇살에 반질반질 빛이 난다. 앞쪽에 깔린 박석이 유독 반짝이는 반면 뒤쪽은 색감과 질감이 다른데, 1950~1960년대 사람들이 박석을 뜯어가 구들장으로 쓰면서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 또 1970년대에 찍은 인정전 사진이 온통 잔디밭인데,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잔디를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 교수는 “당대 위정자에 따라 모습을 달리했고, 왕마다 애호하고 즐겨 쓰는 장소도 달랐다”고 말했다.   

창덕궁의 편전이자 국왕이 평상시 거처하며 신하들과 국사를 의논하던 선정전을 지나 왕비가 거주했던 내전(內殿) 대조전에 이르렀다. 여인네들의 공간인 대조전은 한국식 정원의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곳이다. 경복궁의 교태전과 함께 비교해도 재밌는 이 전각의 뒤쪽으로는 테라스식의 토목 구조물이 자리한다. ‘화계’로 불리는 수경과 완상의 공간이다. 실내에서 주로 생활하는 조선시대 여인들은 마음을 다스리는 공간이 많이 필요했고, 산자락 아래에 거처를 두곤 했다. 토사 유출을 방지하는 목적에서 토목 구조물을 쌓은 게 바로 화계이며, 여기에 식물을 심고 색깔을 입혀 작은 정원으로 조망하기도 했다.
화계에는 몇 가지 요소가 들어가 있다. 갖가지 식물 이외에도 굴뚝이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조선시대의 굴뚝은 신분을 상징하는 증표로 돈이 많은 사대부일수록 굴뚝이 높았다. 화계에 굴뚝이 있다는 건 난방의 증거이기도 하다. 실제 대조전은 온돌 구조를 가지고 있다. 육각형의 굴뚝에는 왕실에서 많이 사용하는 십장생 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굴뚝 옆으로는 괴석이 놓여 있다. 화계 아래에 쌓은 지지대는 직사각형 모양의 돌인 장대석이다. 조선시대에 이 장대석을 쓸 수 있는 공간은 사찰과 궁궐밖엔 없었다. 사대부 집에서는 막돌을 사용했다. 돌 하나, 문양 하나에서까지 신분을 드러내려 했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오늘날보다 더 행복했을까.
대조전 화계를 지나 굳게 닫힌 문(평소엔 개방을 하지 않는다)을 열고 들어간 곳은 고즈넉한 풍경의 가정당이다. 가정당은 아픈 사연이 담긴 장소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총리가 자신의 별장으로 사용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서울 남산이다. 시선이 머무는 곳은 식물원 자리, 과거 일본 신사가 있던 자리다. 조선의 수목이 있던 자리에 일본의 홍단풍을 물들이고 창덕궁 내에서도 최고의 고즈넉한 풍경을 가진 곳에서 일본 신사를 조망하던 이들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가정당에서 조용히 서울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평온함과 쓸쓸함이 동시에 스쳐 가는 듯하다.
가정당을 지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알아본 창덕궁의 후원으로 향했다. 후원 중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곳이 부용지 권역이다. 1970년대 마련된 소방도로가 지금의 진입 통로인데 이날은 특별히 대조전 화계 옆으로 연결된 비밀 통로로 들어가볼 수 있었다. 왕과 왕비가 실제로 드나들던 본래의 동선이다.
창덕궁의 후원은 약 20만 ㎡에 이르는 자연 구릉지에 왕가가 휴식을 취하고 유락을 즐길 수 있도록 수경한 원림이다. 후원은 특징에 따라 부용지, 주합루 일원, 애련지, 연경당 일원, 반도지 일원, 옥류천 일원, 낙선재 일원 등으로 나뉜다. 그중 부용지 권역은 해외에서 한국식 정원의 전형이라고 알려진 곳이다. 서양의 베르사유 궁전과 같이 건물의 중앙이 정원의 중앙을 통과하는 축선을 가진 ‘정형식 정원’이다. 최 교수는 “대한민국 유일의 정형식 정원으로 왕의 파워를 상징한다”고 덧붙였다.
부용지 권역의 참맛은 실제 정조가 그러했듯 주합루 2층에서 내려다볼 때 잘 드러난다. 주합루에 서서 바라다보면 연꽃이 둥둥 뜬 부용정과 뒤쪽 수림을 감상할 수 있는데, 특히 주합루 2층 누에 올라섰을 때는 어수문 끝단과 부용정 뒤편의 수림 부분까지 경관을 이루고 있다. 잠깐이지만 정조의 마음으로 주합루 2층에서 부용지를 내려다보니, 더할 나위 없이 시야가 트이고 마음이 환해지는 느낌이다.
연경당, 애련지 권역은 여기저기 흩어진 구릉과 계류의 모양을 잘 파악하고 적절한 위치에 정자를 세워 놓아 전경을 조망케 했다. 1692년 숙종은 애련정을 지으면서 방지와 정자를 중심으로 한 수경 공간을 완성했으며, 1828년 후원 내 행사를 치르는 대표적인 장소인 연경당을 동쪽과 북쪽으로 확장해 왔다. 이 밖에 과거 왕들이 풍류를 즐겼던 옥류천 일원은 창덕궁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꼭 한적한 지방에 있는 별서 정원과 같은 멋을 내고 있다. 최 교수는 “옥류천은 창덕궁 내에서 가장 내밀한 공간에 위치해 있으며 권력자들이 이곳에서 손님들을 초대해 질퍽한 문화를 즐겼다”고 설명했다. 아쉽게도 지금은 우물물이 말라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후원에서 다시 전각 쪽으로 나와 낙선재로 향했다. 헌종의 숨결이 배어 있는 낙선재 일원에서는 ‘돌배나무’가 유명하다. 수천 명의 무수리들이 궁궐 밖 가족의 무사안녕을 기원했던 정안수로 수백 년 동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창덕궁의 620여 년 역사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기록으로 다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에피소드가 걷는 곳곳에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정조가 ‘지혜의 샘’으로 불렀던 부용지에서 낚시를 하며 심신을 달래는 동안 아래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어떤 여인은 어떤 마음이었을지, 무슨 사연을 품고 있을지 다 알기도 어렵다. 실제 창덕궁 곳곳에는 동궐도에도 묘사되지 않은 이름 없는 전각들이 남아 있다. 앞서 언급한 가정당은 한때 출가 후 아픈 사연을 안고 다시 돌아온 옹주를 위로하는 공간으로 쓰이기도 했다.
이처럼 창덕궁도 사람처럼 애환을 가졌다. 그러한 가운데 창덕궁 후원은 인간의 개입이 최소화된 언덕과 골짜기를 지닌 자연이 만들어낸 정원이었다. 시간의 인내로 빚어진 창덕궁 후원은 여전히 지혜의 샘으로 왕가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묵묵히 그 자리에서 조화로운 자연경관을 만들어내는 창덕궁 후원, 10년 후 다시 찾는 후원은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위로를 줄 수 있을까.

* 창덕궁 탐방 여정  1 금천교 2 대조전 화계 3 가정당 가는 길 4 가정당 전경 5 부용지 6 주합루에서 내려다보는 전경 7 옥류천 8 돌배나무 9 낙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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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17-08-11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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