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STORY]딸·이복형제의 반란
유류분 제도는 과거 상속의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던 딸과 혼외자들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가슴에 품었다. 하지만 최근 잦은 이혼과 재혼 등으로 가족관계가 복잡해지면서 유류분은 가족 간 갈등의 촉매제가 됐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한자리에 모인 상속인들 앞에 유언장이 개봉되자 숨죽이며 지켜보던 딸들은 더 크게 곡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유언장 어디에도 딸들에 대한 상속재산이 언급되지 않았던 것이다.

‘출가외인’이라는 딱지를 무슨 주홍글씨처럼 가슴에 달고 다녔던 과거 가부장제 속 딸들의 모습이 꼭 이랬다. 사실 조선 초기만 해도 ‘제자녀균분상속’이라 해서 재산 상속에 있어 아들과 딸을 따로 구별하지 않았다.

그랬던 것이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호주상속인을 우대하게 됐고, 제사를 주재하는 장자에 대한 상속 우선권이 암묵적으로 인정받았다. 이후 유류분 제도 도입(1977년), 호주제 폐지(2005년) 등의 영향으로 남녀균분상속으로 다시 회귀했지만 아직까지 일부 가정에서의 구습은 여전해 상속 과정에서 소외된 딸들이 쌓아 왔던 억울함을 유류분반환청구 소송으로 폭발시키는 일들이 늘고 있다.

“왜 오빠·동생만”…딸들의 거센 반격
“많이 울죠. 재판 오셔서 많이 울기도 하고 그동안 아버지로부터 당했던 서러움이 폭발하는 그런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마상미 법무법인 지평 변호사는 최근 유류분 반환청구 소송이 폭증하는 데는 긴 세월 동안 켜켜이 쌓아둔 딸들의 서러움이 폭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한 로펌의 관계자는 유독 딸들의 유류분반환청구 소송이 늘고 있는 지와 관련 “딸들은 결혼을 한 후 배우자를 따라 외국으로 이민을 가는 등 멀리 떨어져 사는 경우가 많은데 장남 등의 경우 부모님 인근에 살며 상속재산에 대한 정보를 상세히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딸들은 상당한 소외감과 박탈감을 느끼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실제 2012년 한 언론사의 조사에 따르면 유류분 소송 중 딸의 비중은 56%로 아들 25.2%에 비해 2배 넘게 차이가 났다. 아들과 딸이 다함께 포함된 소송건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가히 ‘딸의 반란’이라 불러도 될 정도다.

Case 1
금강제화 창업주의 딸들은 상속세 통지문을 보고서야 증여·상속 규모를 정확히 알게 됐고, 1000억 원대 재산 대부분을 물려받은 장남을 상대로 유류분 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2010년 벌어진 금강제화 남매의 상속 소송도 딸들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금강제화의 창업주인 고(故) 김동신 명예회장이 1000억 원대에 이르는 재산 대부분을 장남인 김성환 회장에게 물려주자 2남 4녀 중 다섯째인 숙환 씨와 여섯째인 정환 씨 자매가 ‘유류분의 일부인 15억 원씩을 반환하라’며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소장을 제출한 것이다.

김 씨 등은 소장에서 “1997년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김성환 회장이 아버지의 재산이 거의 없다고 속여 재산 상태를 알지 못했다”며 “그러나 최근 상속세 통지문을 보고 아버지의 재산과 증여·상속 규모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됐다”고 주장했다.

사실 두 딸도 김 명예회장 생전에 현금 20억 원, 부동산 15억 원을 합쳐 각각 35억 원씩 유산을 상속받았었다. 하지만 장남인 김성환 회장이 874억 원, 차남이 182억 원을 증여받은 상황에서 상대적인 박탈감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사건은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18부에서 조정으로 종결됐다. 김성환 회장이 두 동생에게 각각 20억 원씩 지급하되 이는 유류분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닌 형제 사이의 배려에 의한 것임을 쌍방 확인한다는 합의를 본 것이다.

구상수 법무법인 지평 회계사는 “유류분반환청구 소송을 진행하다 보면 장남이 다른 형제들에게 상속재산에 대한 정보를 아예 안 주고 독점하는 경우가 있는데 정보에서 소외된 형제들이 감정적인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BIG STORY]딸·이복형제의 반란
Case 2
재산 상속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됐던 누나가 과거 수차례 아버지로부터 수억 원대 부동산을 증여받은 남동생들을 상대로 유류분 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대구지방법원 제11민사부는 누나가 남동생들을 상대로 유류분반환청구 소송을 낸 사건을 심리했었다.

A씨는 “남동생들이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아버지로부터 12억 원 상당의 부동산을 증여받았지만 이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당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에 재판부는 A씨의 유류분이 침해당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남동생들이 증여받은 재산 가운데 각각 자신의 유류분을 뺀 금액에서 법정상속분에 따라 산정되는 유류분을 A씨에게 줘야 한다”고 결정했다.

부모 병수발 든 딸, 기여분을 말하다
부모 곁을 지키며 병수발을 든 딸이 무심한 오빠들을 상대로 분노를 폭발하기도 한다.
평소에는 부모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오빠들이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서로 상속재산을 챙기겠다고 달려드는 모습에 환멸을 느낀 것이다.

평소 묵묵히 부모를 모셔왔던 딸이었지만 고등학교만 나온 자신과는 달리 아들 자식이라고 애지중지 키워 기어코 일류대학을 보내고, 없는 집안 살림에 생활비와 유학비 마련을 위해 발을 동동 구르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게 들어 왔다.
[BIG STORY]딸·이복형제의 반란


Case 3
10년 넘게 부모의 병수발을 든 막내딸은 그동안 외면해 온 오빠들이 상속재산을 공평하게 나눠 갖자고 하자 억울한 마음에 기여분을 주장하고 나섰다.


B씨는 5남매 중에 막내딸이었는데 오빠들은 모두 의사, 변호사, 대학교수, 대기업 임원 등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막내딸은 어느 날 노부모의 효도건강검진 결과를 확인한 후 맥없이 다리가 풀려 오는 것을 느꼈다. 고령의 아버지는 당뇨와 치매가 심한 상태였고, 어머니도 치매도 상당히 진전되고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듣게 된 것이다.

형제들이 모여 부모님의 부양에 대해 논의했지만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결국은 부모님을 요양병원에 입원시키고, 곁에서 병간호를 하는 일은 막내딸이 도맡아야 했다. 처음에는 병원비도 보태주고 병문안도 오던 오빠들이 10여 년이 지나는 동안 병원비는 물론 아예 발길까지 끊어 버렸을 때는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뒤 오빠들을 다시 보게 된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잇달아 돌아가신 뒤였다. 시골에 있는 전답이 수십억 원에 이를 것이라는 소문을 어느새 듣고 상속재산을 챙기겠다며 한걸음에 달려온 것이다. 막내딸은 그동안 부모에게 들어간 병원비나 약값은 물론 10년 넘게 병수발을 든 자신과 병원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은 오빠들이 똑같이 상속재산을 나눠 갖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기여분이다.

기여분이란 공동상속인 중에 피상속인의 재산의 유지, 또는 증가에 특별히 기여를 했거나 피상속인을 특별히 부양한 자가 있는 경우 상속분을 산정함에 있어 이를 고려해 기여자에게 그 고유 상속분에 부양비 등을 더해 지급하는 것을 말한다.

법조계에 따르면 기여분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공동상속인 간 협의가 필요한데 협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에는 가정법원에 기여분을 결정해 달라는 심판청구를 할 수 있다. 문제는 기여분과 유류분의 상관관계인데 기여분 가액이 상속재산 가액의 70~80% 이상이 되더라도 다른 공동상속인의 유류분을 침해할 수 없다는 것이 맹점이다.

만약 자신의 기여분이 너무 커서 다른 상속인들의 유류분이 자신의 기여분을 침해한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공동상속인들로부터 유류분반환청구를 받기 전 신속히 상속재산분할심판 및 기여분결정청구를 제기해야 한다.

유류분 반환청구 사건에서는 기여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기여분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유류분반환청구 사건과 별개로 상속재산분할심판 및 기여분결정청구를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의할 점은 부모가 자신을 봉양한 특정 자식을 위한다고 유언을 통해 기여분을 지정하는 것은 법적 효력을 인정받지 못한다. 기여분을 정하는 방법은 공동상속인 간 협의 또는 가정법원의 심판밖에 없다.

혼외자·이복형제의 이유 있는 항거
상속 문제에서 딸들만큼이나 혼외자나 이복형제들을 둘러싼 분쟁도 잦다. 법무법인(유한) 태평양에 따르면 상속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경우는 피상속인의 재혼 과정이 평탄하지 않은 경우, 이복형제가 있는 경우, 10억 원대 이상 재산이 있는 경우다.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했다면 일단 피상속인 사후 상속 분쟁을 걱정해야 한다는 소리다.

실제 법조계에 따르면 상속 문제로 상담을 받으러 오는 자산가들의 상당수는 이복형제나 혼외자 문제로 골치를 썩고 있다. 최근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혼외자 커밍아웃’이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옛날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 류와는 사정이 다르더라도 재벌가의 혼외자 문제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고 있다.

Case 4
혼외자인 C씨가 유류분 소송 중 발견한 이복형제들의 수상한 금융거래내역서. 그러나 오히려 금융실명법 위반으로 역습을 당했다.


혼외자나 이복형제들의 경우 재산 상속 과정에서 소외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2006년 학교 설립자의 혼외자인 C씨가 학교법인 이사장인 이복형제를 상대로 유류분반환청구 소송을 진행하며 그 과정에서 얻은 금융거래 내역에서 횡령의 의심을 품고 내역서를 첨부해 고소했지만 오히려 금융실명법 위반으로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서울서부지법 형사6단독은 C씨와 학교 노조위원장 D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는데 “개인의 금융정보를 단순한 흥밋거리나 사적 비난의 목적으로 공개한 것이 아니라 학교법인 재산의 불법 유출을 방지하고 이사장과 그 아들의 불법 행위를 수사기관에 고발하기 위한 공익적 목적에 기인한 것으로 위법성이 조각되는 정당 행위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이복형제들이 한국에 남아 있는 공동상속인을 상대로 유류분반환청구 소송을 진행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또한 일부 혼외자들의 경우 피상속인의 사망 이후 불현듯 나타나 친자 인지소송을 통해 혈육임을 증명한뒤 이복형제들을 대상으로 유류분 반환 청구 소송을 벌여 가족간 갈등이 증폭되기도 한다.

Case 5
미국으로 건너가 살고 있는 전처소생의 자식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한국에 남아 경영권을 물려 받은 이복형제와 계모를 상대로 유류분반환을 요구하고 나섰다.


연매출이 300억 원대에 이르는 우량 중소기업의 D회장이 사망하자 전처소생의 3남매 중 장녀와 장남이 한국에 있는 이복동생과 계모를 상대로 유류분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다. D회장은 첫 번째 부인이 사망한 뒤 지금의 처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전처소생 3남매는 결혼 이후 모두 미국과 캐나다에 건너가 살고 있었다. 장녀와 장남은 사업 경영권이 모두 이복동생에게 돌아간 점을 들어 각각 40억 원과 17억 원을 청구했으나, 재판부는 원고와 피고가 형제자매 사이인 점과 이복동생이 부친의 가업을 승계한 점을 참작해 각각 7억 원과 4억 원을 주는 선에서 원만한 조정을 이뤄냈다.

결국 이복형제들이 한국에서의 상속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됐다는 서운함이 소송까지 불사했던 원인이었다. 물위에 떠 있는 빙산처럼 물밑에 잠겨 있는 재산이 더 많을 것이라며 서로를 의심의 구덩이에 함께 몰아넣은 것이다.

임채웅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혼외자나 이복형제는 법률상으로 평등한 자식이기 때문에 상속은 당연히 이뤄진다”며 “다만 혼외자를 둔 사람들의 경우 이를 숨기고 싶은 마음에 근거를 남겨 놓지 않아 나중에 법적 분쟁에 휘말리기도 한다”고 조언했다.
한용섭 기자 poem197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