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미술평론가]한여름의 단짝 중 하나는 장맛비다. 그러다 보니 여름은 무더위와 더불어 비의 계절로도 여겨진다. 아마도 비만큼 가슴을 쫀득하게 만드는 소재도 드물 것이다. 온 대지가 푹신 젖어들듯, 한여름의 시원한 빗줄기는 메마른 감성까지 적셔 새로운 기운을 깨워주기에 충분하다.
고흐·터너·겸재의 ‘비 오는 날의 풍경’
[빈센트 반 고흐, <비(Rain)>, 1889년]

괴팍한 화가로 정평이 난 빈센트 반 고흐 역시 비를 그릴 땐 감수성이 물씬 돋았나 보다. 원래 고흐는 ‘태양의 화가’로 비유될 정도로 햇빛의 인상을 잘 포착했다. 그의 작품 <비(Rain)>도 작렬하는 태양 빛을 쫓아 나섰겠지만, 한낮에 만난 장대비에 매료돼 순간 포착을 하듯 순식간에 그린 듯하다. 고흐의 작품 중에 흔치 않게 비가 등장하는 이 작품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영락없이 장마철 굵은 장대비 소리가 서라운드로 들려온다. 대지에 날카롭게 내리꽂듯 다소 억세게 표현됐지만, 한편으로 오히려 시원한 느낌이 더 강하다. 비가 그치면 드넓은 밀밭이 더욱 파릇하게 느껴질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여름 소나기는 단비로 여겨진다.

‘… 누구의 설움이 비 되어 오나/ 피해도 젖어오는 무수한 빗방울/ 땅 위에 떨어지는/ 구름의 선물로 죄를 씻고 싶은/ 비 오는 날은 젖은 사랑/ (중략)/ 우산을 펴 주고 싶어/ 누구에게나/ 우산이 되리/ 모두를 위해’

이해인 수녀의 시(詩) ‘우산이 되어’의 한 구절이다. 시인의 말처럼 ‘모두를 위한 우산’은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이다.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게 하는 묘한 마력은 함께 받쳐 든 우산 속에 더욱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우산을 애용하게 된 것도 인류사에서 보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일반 사람들까지 우산을 애용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중반 무렵이고, 1850년대 이후에나 생활필수품으로 대중화됐다. 우산이 등장한 초기엔 지위와 부의 상징이었다. 가령 기원전 1200년경 이집트에선 귀족 계층만 우산을 사용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선 우산의 사용에 대해 남녀의 인식이 달랐다. 남성에겐 나약함의 상징이어서 우산 대신 모자를 사용하거나 비를 그대로 맞았지만, 여성들에겐 여전히 부를 상징하는 액세서리였다.

비, 그림의 분위기를 좌우
1750년경부터 ‘우산이 나약한 사람들의 물품’이란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30년간 매일같이 우산을 들고 다녔던 영국의 무역업자 조나스 한웨이(Jonas Hanway)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남자들은 우산을 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한편 한국에는 구한말 개항 이후 선교사들에 의해 우산이 처음 도입된다. 물론 1950년대까지는 부유층의 상징물이었다가 1960년대 넘어서야 대중화됐다. 그렇게 보면 한국 남성들이 편안하게 우산을 들고 비를 반기기까진 영국신사 한웨이보다 250여 년이 뒤진 셈이다.
고흐·터너·겸재의 ‘비 오는 날의 풍경’
[J. M. 윌리엄 터너, <비, 증기, 그리고 속도-대서부역(Rain, Steam and Speed-The Great Western Railway)>, 91×121.8cm, 캔버스에 유채, 1844년, 런던 내셔널갤러리]

비에 관한 명화를 꼽으라면 J. M. 윌리엄 터너(J. M. William Turner)의 작품 <비, 증기, 그리고 속도-대서부역>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은 비와 대기가 서로 엉겨 소용돌이치는 한가운데를 증기기관차가 뚫고 나오는 역동적인 장면을 묘사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칙칙폭폭 기관차의 거친 숨소리와 쇠끼리 부딪치는 둔탁하고 거친 파열음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영국의 템스강을 건너는 초기 증기기관차의 모습이다. 자연과 과학기술의 만남을 자유분방하고 역동적인 붓 터치로 실감나게 포착했다. 산업혁명이 가져온 기술 문명에 대한 낭만주의적 시선을 포착한 터너의 대표작 중 한 점이다.

터너는 ‘영국 근대미술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영국의 국민작가다. 붓 대신 팔레트 나이프를 사용해 거칠고 역동적인 풍경을 즐겨 표현했다. 그중에서도 ‘대기의 화가’로 불릴 만큼 영국 특유의 날씨로 연출되는 ‘대기’의 변화무상한 모습을 포착하려 애썼다. 아마도 터너가 유독 변화무쌍 대기 변화에 집착하게 된 것은 산업혁명 태동기 런던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출생한 그의 이력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이발사인 아버지와 푸줏간 집안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나고 자란 터너는 키가 작고 무뚝뚝했다. 하지만 다행히 27세에 로열아카데미 정회원으로 발탁될 만큼 천부적인 그림 재능을 타고 났다. 물론 나중엔 영국 왕립아카데미 원장까지 역임한다.

터너는 자연 풍광을 실감나게 묘사하기 위해선 어떤 위험도 불사했다. 그림에서 풍경 이면의 냄새까지 날 것 같은 생생함은 스스로 체감한 것을 옮기려 했던 작가적 고집의 결과다. 눈보라 치는 바다를 제대로 그리고 싶어 영국 해협을 오가는 정기선의 돛대에 몸을 묶고 바다를 건넜다는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1844년 완성된 <비, 증기, 그리고 속도-대서부역> 작품 역시 직접 체감하지 않곤 도저히 뽑아내기 힘든 생동감이 압권이다. 보는 사람마저 그 장면의 관찰자가 아니라 직접 그 안에 빨려 들게 만드는 힘은 그냥 나오지 않았다.

억세게 퍼붓는 빗줄기를 뚫고 아스라이 다리 위 철길을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고 상상해보자. 살짝 연 창문으론 숨 막힐 정도의 매서운 비바람 소리와 기차가 내뿜은 증기가 뒤섞여 마구 밀려든다. 고속철도(KTX) 못지않은 엄청난 속도감으로 풍경들을 밀어 젖히는 순간의 포착은 한마디로 경이롭다. 실제로 터너 역시 그림 그리기 전에 비 오는 날을 골라 런던에서 엑서터로 달리는 대서부철도 기차에 몸을 싣고, 차창 바깥으로 몸을 몇십 분간 내밀고 비 오는 풍경을 온몸으로 느끼고 관찰한 다음에 이 작품을 완성했다고 한다.

비, 우리 안에 잠든 예술혼을 깨우다
터너의 인생 자체가 영국의 비 많은 날씨를 닮았다. 지극히 가난한 서민의 집안에서 태어나 화가로서 영국 최고 영예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정작 평생 독신이었으며, 조수나 제자를 두지 않았을 정도로 고독하고 스스로 비밀스럽게 살았다. 말년에는 이름까지 바꾸고 은거하며 외롭게 살다가, 마치 비 오는 날 허공에 흩어지는 증기처럼 76세에 생을 마감한다. 빛과 빛에 의한 색채의 변화를 섬세하게 담아낸 그의 독창적인 작품 철학은 이후에 인상주의를 촉발시킨 클로드 모네에게 결정적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그리고 그를 기리기 위해 1984년 제정된 ‘터너상(Turner Prize)’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현대미술상 중 하나가 됐다.
고흐·터너·겸재의 ‘비 오는 날의 풍경’
[구스타브 카유보트, <파리, 비 오는 날>, 캔버스에 유채, 212.1×276.2cm, 1877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서양 미술에서 비 오는 풍경이 본격적으로 그림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인상파 시대가 아닐까. 그중에 흥미로운 작품 한 점을 소개하자면 인상파 화가들의 컬렉터 출신 작가인 구스타브 카유보트의 <파리, 비 오는 날>이다. 이 작품은 완성된 다음 해인 1878년 4월의 세 번째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된 대작이다. 한바탕 큰 비가 내리고 어느 정도 소강상태를 맞은 파리 시내의 어느 한 장면이다. 전체적으로 촉촉이 젖은 회색빛 거리를 사람들이 마치 비가 내리지 않은 맑은 하늘에 양산 삼아 쓰고 다니는 것처럼 꾸몄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물 고인 바닥과 비에 젖은 듯 무겁게 옷을 치켜 든 여인, 대기를 꽉 채운 뿌연 습기 표현 등이 아주 탁월하다.
고흐·터너·겸재의 ‘비 오는 날의 풍경’
[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우산>, 캔버스에 유채, 180.3×114.9cm, 1881~1885년경, 런던 내셔널갤러리]

또 다른 한 점은 카유보트와도 친분이 두터웠던 르누아르가 1881년부터 1885년에 걸쳐 완성한 작품 <우산>이다. 카유보트의 그림에 등장하는 박쥐 날개 모양의 우산 형태가 같은 것을 보면 당시의 유행이었나 보다. 이 그림은 비 오는 풍경임에도 르누아르 특유의 밝고 경쾌함을 잃지 않았다. 심지어 우산을 쓰지 않은 앞쪽의 소녀들로 봐선 오히려 우산을 들고 춤을 즐기는 축제 장면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카유보트나 르누아르 둘 다 파리의 일상을 담았지만, 도시 풍경보다는 그 안에서 삶을 즐기는 인물에 초점을 맞췄다. 여기에 감성의 깊이를 더해줄 감미료로 ‘비 오는 날’을 선택한 건 신의 한 수였다.
고흐·터너·겸재의 ‘비 오는 날의 풍경’
[이이남, <인왕제색도>, LED 미디어 영상작품 부분]
우리나라 옛 그림 중에 비를 가장 정감 넘치게 표현한 대표작은 단연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일 것이다. 꼭 ‘국보 216호’라는 무게감을 덜어 내더라도, 제목에서부터 이미 ‘비 내린 뒤의 인왕산 모습’이 연상된다. 이 그림은 겸재가 직접 인왕산을 보고 그렸다고 한다. 비 온 뒤 안개가 피어올라 온 산을 휘감은 인상적 순간을 포착했다. 화면 상단을 가득 메운 암반과 화면 아래를 차지한 소나무 숲이 자칫 거칠게 부딪치고 얽힐 수도 있지만, 중간에 안개로 처리한 여백의 운용은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다.

그런데 이 <인왕제색도>의 남다른 감흥은 제작 동기에 있다. 정선에겐 인왕산을 함께 보고 자란 죽마고우가 있었다. 조선시대 진경시의 거장으로 <조선왕조실록>에 사망일까지 기록될 정도였던 인기 시인 이병윤이다. 서로의 시와 그림을 맞바꿀 정도로 절친한 친구가 나이 들어 병상에 눕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의 쾌차를 기원하는 뜻으로 <인왕제색도>를 그린 것이다. 아마도 비 온 뒤 온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한 인왕상의 모습처럼, 다시 아름다운 옛 추억을 교우할 수 있게 훌훌 털고 일어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그림이 완성된 나흘 뒤에 이병윤은 세상을 등지고 만다. 그래도 둘의 우정만큼은 영원하다.
고흐·터너·겸재의 ‘비 오는 날의 풍경’
[겸재 정선, <인왕제색도>, 한지에 수묵, 79.2×138.2cm, 1751년, 리움미술관]

정선의 명작 <인왕제색도>를 현대미술로 재탄생시킨 예도 있다.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미디어아티스트인 이이남 작가의 동명 영상작품이다. 겸재의 같은 그림 그대로 첫 장면이 시작돼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비와 안개, 바람과 눈발이 가세하며 시간과 계절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고즈넉한 가로등 불빛이 가미되면서 분위기는 한껏 풍미를 더한다. 겸재가 이 영상을 봤으면 뭐라 했을까. 마침 “오늘 내가 죽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살아 있는 한 세상은 바뀐다”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스친다. 세월의 무상함과 삶의 참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두 작품의 만남, 그 안의 빗소리는 우리 안에 잠든 영혼을 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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