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 =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영화 속 대사처럼 사랑은 바람 같아서 그 실체를 볼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과연 인류에게 두 감정의 연결고리는 어떻게 연결돼 왔을까.
[big story]사랑을 하면 왜 행복할까
사랑하면 왜 행복하냐고? 바보 같은 질문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아주 당연한 사실이 아닌가? 뇌과학의 엄청난 발전 속도를 감안하면 이미 사랑과 행복 간의 관련성에 관해 완벽한 과학적 증명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복잡한 사랑 방정식에 여러 변수를 넣으면, ‘72.54% 행복함’ 등의 결과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방정식은 없다. 싸구려 SF 영화처럼 연인의 머리에 전극을 붙여 사랑과 행복 수준을 측정할 수는 없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지만, 사랑에 빠지면 행복한 이유는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최소한 과학적으로는 말이다. 심리학자나 신경과학자보다는 시인에게 묻는 편이 더 현명하다.

사랑에 관한 뇌과학의 연구가 더딘 이유는 바로 사랑이나 행복이라는 개념 자체가 너무 애매하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심리학을 지배하던 행동주의의 전통에서 사랑이라는 개념은 연구 대상에 오르지도 못했다. 실증할 수 없으니 연구할 수도 없었다. 물론 사랑 점수나 행복 수치 같은 것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적당한 설문지를 만들어 각각 점수를 매겨 합산하는 식이다. 숫자로 나오니까 객관적인 것 같지만 사실 애매한 주관적 느낌에 적당한 점수를 붙인 것에 불과하다.

정신의학에서는 사랑에 관한 경험적인 연구가 제법 이루어졌는데, 특히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심리학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나눈 사랑의 경험이 여러 단계를 거쳐 성인기의 사랑으로 빚어진다고 주장했다. 물론 사랑은 다양한 갈등과 고통을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고통이 무서워 사랑을 피하는 것도 답이 아니다. 사랑할 대상을 찾지 못할 때 멜랑콜리아(melancholia), 즉 우울증에 빠지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주장은 다양한 학설로 발전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애착 이론’이다. 정신과 의사 존 볼비에 의하면 어린 시절 부모와의 애착 패턴은 어른이 된 후 사랑의 패턴과 깊은 관련성이 있다. 간단히 말해서 어머니와 불안정한 애착을 보인 아이는 나중에 파트너와도 비슷한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애착 이론이 등장하면서 사랑에 대한 학문적 이해도가 훨씬 깊어졌다. 하지만 정신의학적 연구는 심각한 단점이 있다. 건강한 사랑보다는 좀 ‘이상한’ 사랑에 대해 더 잘 설명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건강한 사랑에 대해 알고 싶은 데 말이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
경제학자 로버트 프랭크는 사랑과 같은 감정도 의사결정에 도움을 주는 전략적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은 짝 결속을 강화하고 협력적인 양육을 위한 안정적 구성 단위를 유지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일단 사랑에 빠지는 초기 단계를 생각해보자. 한눈에 반해서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아마 많은 사람이 해보았을 것이다. 눈만 감으면 아롱삼삼 연인이 떠오른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 길거리의 유행가가 다 자신의 이야기 같다. 같이 있으면 편안하고 행복하고 두근거리지만, 헤어지면 불안하고 초조하고 걱정된다. 사실 특정한 대상을 이렇게 과도하게 좋아하는 것은 ‘합리적인’ 반응은 아니다. 흔한 친구의 조언처럼 ‘남자는 혹은 여자는 다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이다.
[big story]사랑을 하면 왜 행복할까
그러나 사랑에 한번 빠지면 절친한 친구의 조언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약간 정신이 나간’ 상태다. 하지만 이렇게 과도할 정도로 사랑에 빠지는 행동은 아주 중요한 적응적 이득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파트너 탐색을 중단시키거나 기존 파트너와의 관계를 종결시키는 강력한 동력을 가지고 있다.

사랑에 빠진 파트너 외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불필요한 탐색 비용을 줄이는 것이다. 연인과의 사랑에 푹 빠지지 못하는 ‘합리적인’ 사람은, ‘거기서 거기인’ 대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을 계속하다가 제때를 놓칠 것이다.

은근한 사랑의 의미
사랑에 푹 빠지는 경험은 아주 신비롭고 소중하다. 그래서 스탕달은 “정열적 사랑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의 절반, 특히 아름다운 쪽 절반을 보지 못한 것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불같은 사랑은 일생에 몇 번 이상 경험하기 어렵다. 사랑의 감정이 강렬할수록 오직 그 대상에 몰입하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새로운 대상이 눈에 들어올 리 없기 때문이다. 단 한 번만 경험하고 끝나 버릴 수도 있다. 뭐, 그래도 아쉬워하지는 않을 테지만.

사랑의 두 번째 기능은 바로 장기적인 헌신이다. 인류는 오랫동안 높은 수준의 일부일처제를 이루고 살아왔다. 파트너 사이의 지속적인 헌신과 끈끈한 결속은 짝 동맹을 통해서 큰 이득을 주었다. 협력의 이득뿐 아니라 자손의 생존율도 높였다.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사랑을 하는 부부가 자식을 더 많이 낳고, 건강하게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평생 그대만을 사랑한’ 조상의 자손일 것이다. 예외도 있겠지만. 한 연구에서 파트너가 바람을 피울 확률을 조사했다. 파트너에 대한 정서적 사랑과 육체적 성욕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 연구했다. 연구 결과는 의미심장하다. 현재의 파트너에 대한 육체적 사랑의 수준은, 타인에 대한 성적 욕망을 잘 억제하지 못했다. 정서적으로 깊은 사랑의 감정이야말로 ‘한눈을 팔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힘이었다.

초기 단계의 열정적 사랑이 영원할 수는 없다. 활활 타오르던 사랑의 모닥불은 점점 사그라진다. 아쉬운 마음도 들고, 사랑이 식은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도 생긴다. 하지만 은근한 사랑은 마치 검은 재속에 있는 붉은 숯처럼 둘 사이의 뜨거운 관계를, 장기적 헌신을 전제로 한 영혼의 동반자 관계로 빚어낸다. 바로 에리히 프롬이 말한 두 번째 결정화 단계다.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아름다운 소금 결정이 다시 한 번 달라붙는 것이다.

우울한 중년의 사랑은
중년의 우울 문제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백 가지 진단, 백 가지 처방이 있다. 과도한 경쟁 사회, 세대 갈등과 문화적 충격, 실직과 경제적 곤란 등이 단골 진단명이다. 하지만 흔히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사랑하는 대상의 부재로 인한 우울이다.

남녀의 사랑은 젊은이의 전유물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중년은 자연스럽게 사랑이라는 파티장에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 같은 느낌을 받는다. 파티장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때 이른 뽀뽀를 하려는 자녀를 윽박질러 데리고 오는 부모 역할을 해야 할 것만 같다. 중년에게 그나마 허락된 사랑은 자녀에 대한 사랑이나 일에 대한 사랑 정도다.

잘해야 독특한 취미나 여행에 빠지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는데, 중년 입장에서는 아주 맥 빠지는 일이다.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경험의 기쁨은 중년이 돼도 변하지 않는다. 반려동물이나 양치식물을 키우고, 낚시나 등산 마니아가 되는 것으로는 도무지 대신하기 어렵다.

아니 중년에게 외도라도 하라는 것인가? 물론 아니다. 사실 사랑하는 파트너를 두고, 뒤늦게 다른 파트너를 탐색하는 행동은 진화적으로도 그다지 적응적인 행동이 아니다.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사회적으로는 더욱 권장하기 어렵다.

번식적 이득은 고사하고 아마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새로운 대상을 만나면 사랑을 처음 시작하던 어린 시절의 묘한 감정을 다시 느낄지도 모른다. 잠시 젊어진 것 같은 착각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옷장 속 고등학교 교복을 꺼내 입은 배 나온 중년에 불과하다. 교복을 입고 거리에 나설 용기가 없다면, 뒤늦은 외도는 자제하는 것이 좋겠다.

물론 이혼이나 사별 등으로 인해서 두 번째 사랑을 만나야 하는 경우라면 예외다. <사랑의 기술>을 쓴 에리히 프롬도 세 명의 아내를 만났으니 말이다. 하지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 배우자가 있다면, 새로운 사랑에 돌입하는 것보다는 현재의 파트너와 새로운 사랑의 단계에 돌입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앞부분만 읽은 여러 권의 책보다 한 권의 책이라도 끝까지 통독하는 편이 더 유익하다.

중년의 사랑과 행복
사랑은 분명 적응적인 감정이다. 이성에게 관심을 두게 되고, 서로 헌신하도록 만든다. 자손을 낳고 키우게 한다. 이후 오랫동안 협력하면서 가정을 만들어 간다. 물론 사랑의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자식을 낳지 않을 수도 있고, 반드시 이성일 필요도 없다. 각자 선택할 일이다. 꼭 부부가 되고 가정을 꾸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긴 진화사를 통해서 모든 문화권에서 부부라는 방식의 짝 결속은 가장 원칙적인 사랑의 구조였고 동시에 사랑의 아름다운 결실이었던 것도 분명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역설적이다. 분명 영장류에서도 관찰되는 보편적인 특질이자 확실한 뇌 활동의 결과다. 긴 진화사를 통해 빚어진 적응의 결과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감정이 이렇게 중요한 적응적 결과라면 이상한 생각이 든다. 왜 우리는 종종 사랑에 빠져서 중요한 판단을 그르치고 엉뚱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일까.

특히 중년은 조심스러운 나이다. 세상 돌아가는 원리도 알 만큼 알고, 사람도 만나볼 만큼 만나보았다. 눈 먼 사랑에 빠지기도 어렵고, 기존의 파트너와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도 쉽지 않다. 다 귀찮고 조금은 두렵다. 사실 파트너와의 깊은 정서적 헌신이라는, 새로운 사랑의 단계를 경험하는 중년은 그리 많지 않다. 타성에 빠진 관계를 그저 유지하기만 하면서 점점 밋밋하게 살아간다. 냉소적으로 변해 버린 중년은 늦바람이 나서 정신 못 차리는 중년만큼이나 안타깝다. 한때는 모두 열정적인 사랑을 하지 않았던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문구로 시작한다. 진화심리학적으로 정말 옳은 말이다. 인간은 안정적인 자원, 편안한 보금자리, 위험으로부터의 자유, 적당한 친구와 동료 관계, 높은 사회적 지위,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자녀 등 다양한 적응적 요구가 만족돼야 행복감을 느낀다. 하나라도 부족하면 불행감을 느낀다. 기본적인 여러 조건이 만족돼야 행복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조건을 달성하는 순간, 이내 행복감은 사라지고 다시 불만족이 시작된다. 사랑의 권태로움이 고개를 드는 것이다.

행복은 그 자체로 최종적인 결과가 아니라, 행복감을 이루는 목적을 달성할 때 느끼는 짧은 성취감에 가깝다. 토머스 제퍼슨은 인간이 ‘행복을 추구할 권리(the right of the pursuit of happiness)’를 가진다고 했다. 행복권이 아니라 행복추구권이다. 그래서 행복하고 싶다면 행복의 조건보다는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자체를 즐겨야 한다. 행복은 어제 먹은 맛있는 음식과 같아서 오늘의 나를 만족시킬 수 없다.

중년의 새로운 사랑이 의미를 찾으려면 바로 이러한 진화적 요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다. 어쩔 수 없이 불가피한 이유로 새로운 사랑을 찾아야 하는 중년도 있고, 오랫동안 같이 살아온 파트너와의 조금은 낡아 버린 사랑의 집을 리모델링해야 하는 중년도 있을 것이다.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한다. 이제 사랑 같은 것은 젊은 사람에게 맡겨 두자고? 젊은 녀석들이 사랑에 얼마나 서투른지는, 겪어본 당신이 가장 잘 알지 않는가. 중년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게 사랑할 수 있는 나이다.

박한선 전문의는…
현재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강의하며, 같은 대학에서 비교문화연구소 연구원을 지내고 있다. 집필 도서로는 <정신과 사용설명서>, <재난과 정신건강>, 옮긴 책으로 <행복의 역습>, <여성의 진화> 등이 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5호(2019년 0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