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정체 은행업, ‘자산관리’로 돌파

국내 은행들이 올 상반기에만 8조 원이 넘는 당기순이익을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4% 늘어난 수치지만, 올 들어 경기 상황이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괄목할 만한 성과다. 문제는 은행 순이익 대부분이 예금과 대출의 금리 차이에서 비롯된 예대마진이라는 점이다. 주요 시중은행들이 비(非)은행 부문 강화에 열을 올리는 것도 ‘땅 짚고 헤엄치기식’ 이자 장사에만 몰두한다는 부정적 여론을 불식시키기 위한 측면도 있다. 특히 고액자산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자산관리(WM) 시장은 금융권의 최대 격전지로 떠오른 지 오래다. 여기에 포화상태에 접어든 가계대출, 인터넷전문은행 등장에 따른 경쟁 격화, 사회·인구구조의 변화 등도 WM 사업 확장의 당위성을 제공하는 요인이다. 글로벌 은행에 비해 아직 걸음마 수준이지만 중장기 생존 방안을 마련하는 차원에서 WM 역량 강화에 더욱 힘써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은행, 자산관리에서 답을 찾다
[한경 머니 = 공인호 기자] 가계부채 1500조 시대. 은행 대출 자산의 성장 정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은행들로서는 비이자이익 확대 등 수익성 방어를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예대마진 위주의 수익 모델에 대한 패러다임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 상반기 국내 은행들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000억 원(4.0%) 늘어난 8조4000억 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했다. 비(非)이자이익은 줄었지만 이자이익이 무려 19조7000억 원으로 10% 가까이 늘어난 덕이다. 이 가운데 KB국민은행을 비롯해 신한·우리·KEB하나은행 등 4대 시중은행이 전체의 절반이 넘는 10조7500억 원의 이자이익을 올렸다. 4대 은행 모두 순이익 ‘1조 클럽’에도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이 같은 실적 호조가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은행, 자산관리에서 답을 찾다
이미 국내 가계부채는 1500조 원대에 육박하며 과포화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이 나오고, 은행 전체 이익에서 이자이익이 차지하는 비중도 80%를 넘어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예대마진 위주의 실적 개선세가 조만간 한계에 봉착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배경이다. 여기에 정부의 은산분리 규제(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보유 제한) 족쇄에서 벗어나는 인터넷전문은행의 2차 공습도 예고돼 있다. 인터넷전문은행의 대표주자인 카카오뱅크는 출범 1년 만에 630만에 달하는 이용자를 모집했다.

이는 올 상반기 기준 경제활동인구(2816만 명)의 20%를 넘어서는 수치로, 5명 중 1명이 카카오뱅크 고객인 셈이다. 덩치도 지방은행과 견줄 수준까지 불어났다. 카카오뱅크 총자산은 지난해 말 5조8400억 원으로 제주은행을 넘어선 뒤, 반년 만에 10조 원에 육박하는 규모까지 불어나며 전북은행을 뒤쫓고 있다.

현재 정부 여당은 인터넷전문은행에 한해 규제 완화를 추진하는 가운데, 혁신 정보기술(IT) 기업의 참여 유도를 위해 국내 1위 포털 업체 ‘네이버’에도 인터넷전문은행 진출을 허용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카카오뱅크의 시장 파급력을 감안하면 네이버의 시장 참여만으로도 기존 은행들은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국내 은행들이 해외 진출과 함께 대형 인수·합병(M&A)에 나서는 것도 은행 중심의 사업 포트폴리오로는 지속 성장이 어렵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읽힌다. 현재 신한금융은 ING생명 인수를 목전에 두고 있으며, 금융지주사 전환을 앞둔 우리은행은 M&A 시장의 ‘태풍의 핵’으로 급부상 중이다. 한편, 각 금융사별 해외 진출 현황을 살펴보면 하나금융이 지난해까지 2년 연속 글로벌 부문에서 4000억 원대 순이익을 올렸으며, 신한금융이 45%대의 높은 성장률로 지난해 2300억 원대 이익을 거두며 하나금융의 뒤를 이었다.

◆ “WM은 성장 산업…금융 산업의 핵심 축”
올 상반기 이후 은행 산업의 성장 정체 우려와 함께 미·중 무역전쟁, 신흥국 금융 불안 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국내 은행의 주가도 크게 흔들렸다. 실제 KB금융과 신한금융, 하나금융은 연고점 대비 20% 넘게 하락한 상태다. 그나마 우리은행이 금융지주 전환 호재에 힘입어 10% 수준의 하락폭을 기록 중이다.
은행, 자산관리에서 답을 찾다
이런 가운데 은행업에 대한 인식 전환을 상기시키는 증권사 보고서가 나와 눈길을 끌었다. 백두산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도약하는 수수료이익’이라는 제목의 분석 보고서를 통해 “금융업은 경제 및 금융서비스 고도화와 사회 전체적으로 높은 레버리지, 경쟁 심화로 저성장 사이클 산업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고 전제한 뒤, “하지만 자산관리(WM)는 단연코 성장 산업이다”라고 강조했다.

WM 사업의 기초인 금융자산의 경우 지난 30년간 명목 경제 성장 속도를 앞질러 왔으며, 연금 시장 성장과 맞물려 고속 성장을 이어갈 것이라는 전망에서다. 올 들어서도 WM 부문의 주요 수익원인 신탁보수와 펀드 판매 수수료의 경우 지난 1분기 기준 전년 대비 각각 34%, 30%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현재 국내 은행의 경우 전체 영업이익에서 비이자이익이 차지하는 비중이 10% 안팎에 불과하지만, 글로벌 은행들은 40~50% 수준에 달한다. 바꿔 말하면 국내 은행의 비이자이익 잠재력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은행, 자산관리에서 답을 찾다
백 연구원은 “올해 은행 업종 순이익은 14조3000억 원으로 전년 대비 18%(2.2조 원)가량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는데 이 가운데 수수료 수익이 1조3000억 원으로 이익 증가에 일익을 담당할 것”이라며 “올해 수수료 수익은 신탁보수, 펀드 판매 수수료, 증권 브로커리지 수수료 수익을 중심으로 급성장 중이며 이 중 신탁보수와 펀드 판매를 아우르는 WM 사업은 장기적으로 봐도 금융 산업 성장의 핵심 축이다”라고 강조했다.

WM 부문에서는 단연 신탁 성장세가 눈에 띈다. 금감원에 따르면 지난 2011년부터 7년간 은행 금전신탁은 연평균 21%, 재산신탁은 15%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지난해 말 은행 금전신탁 202조 원 가운데 96조 원인 특정금전신탁은 같은 기간 연평균 13% 증가했고, 이에 기반한 신탁 손익은 연평균 25%나 증가했다. 일례로 신한은행의 경우 전체 수수료 수익에서 신탁보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지난 2014년 6% 수준에서 올해 1분기에는 21%까지 급격한 증가세를 나타내기도 했다.

백 연구원은 “최근 은행 신탁보수 급증이 펀드와 주가연계신탁(ELT) 판매 증가에 기인했다면 신탁 산업의 장기 성장 동력은 퇴직연금 시장”이라며 “정부의 정책적 지원과 시장 상황, 인구구조를 고려할 때 퇴직연금을 중심으로 연금자산 증가는 지속돼 신탁 수익도 커질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다만 WM 시장이 은행의 성장 동력으로 자리매김을 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리스크 관리 및 프라이빗뱅커(PB)들의 역량 강화가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상명하달식 상품 판매의 경우 ‘쏠림현상’이 발생할 수 있고, 이는 수익률 하락에 따른 평판 리스크 및 규제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다. 최근 코스닥벤처펀드 및 주가연계증권(ELS) 쏠림현상이 재개되고 있다는 점도 우려 요인으로 지목된다.
은행, 자산관리에서 답을 찾다
◆ 트렌드 역행?…디지털 세대 등장의 과제
주요 시중은행들도 WM 사업을 중장기 성장 동력으로 인식하고 고객 선점을 위한 치열한 쟁탈전을 이어가고 있다. 디지털 금융 트렌드에 발맞춰 매년 일정 수준의 영업점을 폐지하면서도 WM 특화 영업점은 늘리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상대적으로 이자이익 비중이 낮은 외국계 은행의 경우 소매금융 수익에서 WM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이미 20% 수준까지 확대됐다.

최근 수년간 이어져 온 국내 WM 시장의 트렌드는 ‘PB 서비스의 대중화’로 요약된다. 각 은행들이 PB 서비스의 자산 기준을 줄줄이 하향 조정하며 점유율 확대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실제 KB국민은행과 신한은행, 우리은행 등이 PB 서비스의 하한선을 금융자산 1억 원으로 낮춘 가운데 KEB하나은행은 PB 고객의 기준을 3000만 원까지 크게 내려 운영하고 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은행들의 이런 움직임이 ‘PB 서비스=저비용 서비스’라는 인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현금자동입출금기(ATM) 등 일부 수수료가 부과되는 금융서비스가 공공재로 인식되면서 은행들이 가격 책정에 애를 먹고 있는 것도 은행 간 무분별한 경쟁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은행, 자산관리에서 답을 찾다
오히려 글로벌 WM 시장의 트렌드는 차별화, 고급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 JP모건은 PB 서비스 제공의 최소 기준을 종전 500만 달러에서 1000만 달러로 상향 조정했고, 글로벌 자산관리회사들도 단순 점유율 확대보다 수익성을 담보할 수 있는 지역 등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다. 주윤신 하나금융연구소 연구원은 “최근 사회·인구학적 여건 변화에 따른 다양한 고객군 부상으로 고객에 대한 보다 세분화된 전략과 맞춤형 상품 제공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며 “금융사들은 시장 전망 및 수익성 여부 등을 고려한 타깃 고객군 설정 등 WM 비즈니스에 대한 전략적 비전을 명확히 하고, 이를 기반으로 조직구조, 상품, 인력 등의 측면에서 WM 역량 강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를테면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는 30~40대 디지털 세대의 경우 평소에는 비대면 상담을,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대면 자문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하이브리드형 자문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디지털에 익숙한 세대의 증가는 대면 중심의 영업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며 “특히 기존 금융회사에 집중돼 있던 소비자 정보의 공유가 활성화되면 핀테크업체의 경쟁력이 강화돼 기존 금융회사와의 경쟁이 한층 치열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0호(2018년 09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