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joy] 내 인생의 마지막 1년
건강염려는 죽기가 싫은 병이다. 다르게 말하면 살고 싶은 욕구가 큰 사람에게 찾아오기 쉽다. ‘내일 꼭 살아야 한다’고 걱정하는 사람은 그 걱정에 오늘을 엉망으로 보내게 되는
황당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미래인 내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서 있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불안과 걱정은 미래를 생각할 때 찾아오는 감정들이다.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내일의 오늘이기에. 그러나 그 염려가 오늘을 망가트릴 정도가 된다면 문제다. 과거도 생각해야 한다. 보다 나은 오늘을 위한 지혜와 경험을 주기에. 그러나 지나치게 과거에 빠져 있으면 우울이 찾아오기 쉽다.

나는 어느 시점의 생각을 주로 하고 살고 있는가를 적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생각의 3분의 1만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염려로 차 있어도 사람은 현재의 행복을 잘 못 느낀다고 한다.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염려 자체가 나쁜 콘텐츠는 아니다. 생존과 연결된 소중한 것들이다. 그런데 생존, 즉 사는 것 자체에 너무 집중하게 되면 왜 사는가 하는 본질에서 멀어질 수 있는 것이다.

바니타스 예술이 가져다주는 역설적 긍정성
나이가 들수록 삶에 초연해진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을수록 삶이 더 소중해진다.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는 “살 만큼 살았다”란 말은 반만 진실인 것이다. 삶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구는 진실이지만 실제로 자유로워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살 만큼 살았다란 말엔 그래도 정말 더 오래 살고 싶다란 생존에 대한 욕구가 같이 섞여 있다. 생존에 대한 욕구가 증가하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생존은 결국 죽지 않는 것이기에 생존에 대한 욕구 증가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강화하는 것으로 연결되면 삶의 질이 떨어지게 된다. 건강염려, 불안장애로 이어지기도 한다.

어렸을 때부터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금기 사항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명확한 사실은 우리가 죽는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단어를 회피만 하며 살기에는 죽음은 우리 인생의 매우 중요한 구성 요소다. 항노화란 말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들어 있다. 그러나 항노화는 불가능하다. 어떻게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을 막을 수 있겠는가.

죽음이란 두려움에 등을 보이지 말고 당당히 바라보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죽음은 피하려고 하면 끝도 없이 공포로 다가오지만 막상 마주하면 우리 마음 안에 그것을 수용할 용기가 이미 프로그램 돼 있다. 항노화는 비겁한 말이다. 웰다잉(well-dying)이 용기 있는 정답이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내 삶의 한계를 인정하면 역설적으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약해지면서 현재의 소중한 가치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내일이 당신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어떻게 하루를 보내시겠습니까.” 모임이나 회식 장소에서 사람들에게 짓궂게 이 질문을 툭 던질 때가 있다. 일 핑계로 아내에게 소홀했던 남편들은 거의 모두 같은 답을 한다. “아내와 단둘이 하루를 보내고 싶다”고. 그런데 그 사람들의 아내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대부분 “남편과 떨어져 하루를 조용히 보내고 싶다”고 답한다. 울어야 될지 웃어야 될지, 오늘의 생존을 위해 중요한 가치를 뒤로 계속 밀어 놓고 살다 보면, 막상 삶의 마지막이 찾아왔을 때 섭섭한 인생이 되기 쉽다.

바니타스 예술이라는 것이 있다. 바니타스는 라틴어로 인생무상이란 뜻이다. 인생이 한시적이며 덧없다는 것을 예술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바니타스 미술 작품을 보면 집에 걸어 놓기가 망설여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이 그림의 주인공인 경우가 많고 옆에 조연으로 한시성을 상징하는 모래시계가 자주 등장한다. 우린 모두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이다. 거울도 종종 등장하는데 인간의 허영을 그린 것이라 한다. 가뜩이나 사는 것도 빡빡한데 그림이라도 산뜻해야지 이런 칙칙한 그림을 집에 갖다 놓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겠지만, 17세기 이런 그림이 유럽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였다고 한다.

죽음은 가장 무서운 공포다. 그래서 우리는 대체로 회피하고 도망치려 한다. 그러나 사실은 헛수고다. 내 인생의 시계는 마지막을 향해 돌아가고 있기에. 죽음을 항상 생각하며 살 필요는 전혀 없지만 가끔은 인생의 한시성을 느껴보는 것이 상당한 심리적 유익을 줄 수 있다. 죽음을 생각하면 내 마음이 원하는 소중한 가치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질투, 경쟁심에서 다소 자유로워지며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심리적 겸손은 남을 향한 태도가 아닌 내 마음이 소탈해지는 현상을 이야기한다. 겸손은 내 마음의 행복감을 지킬 수 있는 최고의 심리 요소다. 겸손하면 내가 가진 것을 오히려 감사하며 더 즐길 수 있고 사람과의 관계도 더 진실해져 더 깊은 인간애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해의 시작, 1월이다. 2016년이 내 인생의 마지막 해라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보고 리스트를 세 개 정도 적어보는 시간을 갖기를 권하고 싶다. 해골이 있는 바니타스 예술이 너무 칙칙하다면 쓸쓸한 경치를 바라보며 적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그중 하나를 선택해 실천했으면 한다. 생존이 아닌 가치 중심적인 삶을 사는 연습이 될 것이다.

글·사진 윤대현 서울대학교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