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영원한 갈망, 존재의 한계를 넘어서는 도약의 환상.


노란 색조가 화면 가득 밝게 퍼진다. 거기에 황토색, 갈색, 초록, 파랑의 세모꼴들이 흩어져 여러 개의 느슨한 사각형 구조들을 이룬다. 간간이 십자형으로 교차된 선들이 구조의 형성을 도와준다. 그 추상적인 형태는 어찌 보면 주택이나 교회당, 혹은 창문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를 배경으로 그림의 중앙 맨 아래에서 광대 복장을 한 남자가 사다리를 오르고 있다. 그의 머리 위쪽에 마리(Mari)라는 초록색 굵은 글자가 보인다. 여자의 이름인 그 글자를 중심으로 또 다른 네 명의 여자 이름이 사방에 적혀 있다. 몇몇 이름 밑에 가느다란 사다리가 걸쳐져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남자의 머리를 따라 계속 위로 올라가면 중앙의 십자형을 거쳐 꼭대기의 초승달과 별에 도달하게 된다.
파울 클레, ‘바바리안 돈 조반니’, 1919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파울 클레, ‘바바리안 돈 조반니’, 1919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이 작은 수채화는 20세기 전반의 독보적인 화가 파울 클레(Paul Klee)의 작품이다.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클레의 그림에는 단편적인 조형 요소와 기호, 이미지, 문자 등이 혼재한다. 한눈에 의미를 알려주지 않고 뭔가 수수께끼 같은 암시를 던진다. 수수께끼의 실마리는 작품의 제목 ‘바바리안 돈 조반니’에서 찾을 수 있다. 돈 조반니(Don Giovanni)는 모차르트의 유명한 오페라 제목이자 그 주인공의 이름이다. 잘생기고 부유한 귀족, 돈 조반니는 갖은 술수로 여자를 후리는 어마어마한 호색한이다. 그림에 등장한 광대는 돈 조반니가 여자에게 구애하기 위해 하인 레포렐로와 옷을 바꿔 입은 장면을 상기시킨다. 그를 둘러싼 여자 이름들은 돈 조반니의 엄청난 여성 편력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클레의 돈 조반니는 단지 전설적인 극중 인물이 아니라 화가 자신의 희극적 자화상이기도 하다. 클레는 음악과 미술의 공통점을 인식하고 회화에서 음악의 동적인 요소를 끊임없이 추구했다. 이 그림에서도 소재뿐 아니라 구성의 대칭, 반복, 변주 등에서 음악적 특징을 엿볼 수 있다. 그림 속 이름들 중 엠마(Emma)와 테레즈(Theres)는 당대의 유명 소프라노를 가리킨다. 한편 마리(Mari), 첸즐(Cenzl), 케이티(Kathi)는 클레와 실제로 염문이 있었던 여성들이다. 클레는 자신의 사생활을 드러내 극중 바람둥이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는 돈 조반니처럼 변장을 하고 현실과 다른, 보다 자유로운 삶을 꿈꿨는지도 모른다. 나아가 예술가로서 존재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적 도약을 원했을 것이다.


‘야곱의 사다리’에서 비롯된 상징성
자유와 초월에 대한 환상을 도와주는 유일한 수단이 그림 속에 있다. 그건 바로 여기저기 걸려 있는 사다리들이다. 곡예를 하듯 주인공이 올라가는 중앙의 사다리가 있고, 클레와 관계를 맺었던 세 여성의 이름 밑에도 작은 사다리들이 놓여 있다. 사랑의 편력에 따라 사다리가 분리되고 이리 저리 방향을 바꿔 이동한다. 사다리란 높은 단계로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과 함께 도중에 떨어질 수도 있는 위험을 내포한다. 사랑에의 도달은 그처럼 노력이 필요한 열렬하고 위태로운 상승이라는 의미일까?
요한 클리마쿠스 필사본에 따른 이콘, ‘신성한 상승의 사다리’, 12세기, 카타리나 수도원, 이집트 시나이 산
요한 클리마쿠스 필사본에 따른 이콘, ‘신성한 상승의 사다리’, 12세기, 카타리나 수도원, 이집트 시나이 산
서양에서 사다리가 중요한 상징성을 띠게 된 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사다리’에서 비롯됐다. 야곱은 꿈에서 사다리가 지상과 천국에 걸쳐 있고 그 위를 천사들이 오르내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말하자면 사다리는 지상의 존재가 천국으로 올라갈 길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계단이다. 중세 7세기에 수도원장 요한 클리마쿠스(John Climacus)는 야곱의 사다리에서 영감을 얻어 ‘신성한 상승의 사다리’라는 필사본을 완성했다. 예수의 30년 고행의 생애를 30개의 장으로 구성한 그 책에는 장과 장 사이에 매번 사다리 그림들이 등장한다. 천국을 향해 놓인 사다리를 수도승들이 차례로 올라가는 그림이다. 이후 제작된 여러 모사본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이 사다리를 오르는 동안 주위에서 천사들이 상승을 도와주는 반면 악마들은 갈고리로 끌어내리려 한다. 악마에게 이끌려 발을 헛디디면 돌이킬 수 없이 지옥의 불구덩이로 추락하게 된다. 가장 높은 곳 천국에서는 그리스도가 성인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다.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사다리 끝까지 다 올라가면 그리스도가 환영하며 왕관을 씌워준다. 이러한 사다리 그림을 통해 선과 악의 투쟁 결과를 상승과 추락이라는 상반된 개념으로 표현할 수 있고, 더욱이 존재의 상태를 단계적 질서로 알아보기 쉽게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오랫동안 다양한 사다리 유형들이 만들어져 정신의 수양을 독려하기 위해 널리 펴져 나갔다.
파울 클레, ‘줄 타는 사람’, 1923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
파울 클레, ‘줄 타는 사람’, 1923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
전통적으로 종교적 의미가 강한 사다리 모티프를 20세기 화가 클레는 어떻게 변용했을까? 클레의 다른 그림 ‘줄 타는 사람’에도 사다리가 등장한다. 이 그림에서 뚜렷이 보이는 형상은 긴 막대를 들고 줄 위에 서 있는 광대와 그가 밟고 올라갔을 왼쪽의 줄사다리다. 광대가 서 있는 팽팽한 가로줄 밑 넓은 공간에는 알 수 없는 검은 선들이 기하학적으로 복잡하게 그어져 있다. 유심히 살펴보면 아래쪽에 사람의 머리 형태가 은근히 드러난다. 비스듬한 수평선이 두 개의 점으로 표시된 숨은 눈을 가로질러 왼쪽은 위에서 내려온 수직선과 사다리에, 오른쪽은 또 다른 수직선에 연결된다. 그 직선들로 커다란 사각형이 만들어지는데, 그 안에는 수렴하는 직선들과 작아지는 검은 면들이 있어 회화의 원근법을 상기시킨다. 마치 감춰진 얼굴의 머릿속에서 이뤄지는 사고를 보여주는 듯, 세계에 대한 합리적·이성적 태도를 엿보게 한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사각형 바깥쪽에서 사다리가 따로 저 높이 광대가 있는 곳으로 상승한다. 그가 서 있는 외줄에 이르러 사다리는 직선들과 만나게 된다. 또한 배경에는 커다란 흰색 십자가가 보이는데 그 가로선도 외줄과 일치한다. 정리해보면 숨은 두상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이성의 작용이 사다리를 통해 추구하는 초월적 세계와 합치되며, 이는 곧 십자가의 지향점과 일치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줄 위에 있는 광대는 누구인가? 그는 내면적 갈등과 사회적 위험을 감수하며 엄숙한 진리에 도달하려는 현대의 예술가가 아닐까? 아마도 화가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다시 말해 아래쪽의 모호한 얼굴이 화가 내면의 숨은 자화상이라면 위에서 줄 타는 사람은 드러난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배경의 하얀 십자가가 그들을 하나로 관통하며 연결한다. 이는 클레가 예술 창조를 합리적 이성과 초월적 신비의 통합으로 여겼음을 암시한다.

전통적 사다리의 의미는 클레의 작품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초월을 향한 매체로서 여전히 유효하다. 단지 종교적 교훈만이 아니라 돈 조반니처럼 이성과의 사랑이나 성적 환상을 위해서도 동원된다. 클레는 사다리 이미지를 자주 이용해 상승, 진보, 변화 등의 개념을 나타내곤 했다. 그것은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영원한 갈망, 존재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열렬한 상승의 꿈을 반영한다.

박은영 미술사가·서울하우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