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꽃 소식과 함께 다가온다. 꽃이 핀 곳에는 나비가 찾아들기 마련이다. 꽃밭에서 나비는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생애의 짧은 한때를 즐긴다. 오랜 어둠의 기간을 보낸 벌레가 마침내 아름다운 날개를 달고 나비라는 이름으로 가장 높이 비상하는 시기다.
암브로시우스 보스카르트, 꽃 정물화’, 1614년, 로스앤젤레스 게티미술관
암브로시우스 보스카르트, 꽃 정물화’, 1614년, 로스앤젤레스 게티미술관
꽃을 그린 그림에 나비가 따라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고 흔한 일이다. 정물화라는 회화 장르를 탄생시킨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은 흐드러지게 핀 꽃이나 농익은 과일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작은 곤충을 첨가해 장면에 생기를 불어넣곤 했다.
당시 꽃 정물화의 일인자였던 암브로시우스 보스카르트(Ambrosius Bosschaert the elder)의 그림 한 점을 보자. 활짝 핀 각종 꽃이 바구니에 가득 꽂혀 있고 바닥에도 몇 송이가 흩어져 있다. 아름다운 꽃들 사이에 나비 두 마리가 보인다. 잠자리와 벌, 애벌레도 있다. 자연에서 식물에 곤충이 모여드는 것은 향기가 짙고 먹이가 있다는 물리적인 이유 때문이지만 정물화에서는 보다 깊은 상징적 의미가 있다.
즉 활짝 핀 꽃은 줄기가 잘려 이미 생명을 잃었고, 곧 스러진다는 것을 암시한다. 곤충은 살아 있지만 수명이 짧으니 삶의 덧없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나비는 지상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존재로서 일시적 삶에서 끝나지 않고 부활하는 영혼을 뜻한다. 따라서 이 그림은 꽃의 아름다움을 즐기면서 그 무상함을 인식하고 세상의 악을 물리쳐 영혼의 부활을 준비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프시케의 사랑과 영혼
나비는 고대 그리스어로 프시케(psyche)라 하는데 프시케는 영혼, 정신을 뜻하기도 한다. 서기 2세기, 로마의 소설가 아풀레이우스(Lucins Apuleius)는 ‘변형담’ 또는 ‘황금나귀’라 불리는 책에서 프시케를 아름다운 공주로 체현시켰다. 프시케는 빼어난 미모로 남성들의 관심을 독차지해 비너스의 질투를 사게 된다. 비너스는 큐피드에게 프시케가 세상에서 제일 비열한 남자를 사랑하도록 시켰는데, 큐피드는 프시케를 보고 자신이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는 호화로운 궁전에 프시케를 데려다 놓고 신분을 숨긴 채 어두운 밤에만 찾아온다. 그리고 절대로 자기 얼굴을 보면 안 된다고 단단히 일러 둔다.
프시케를 시기한 언니들은 그가 괴물일지도 모른다며 몰래 얼굴을 보라고 동생을 부추긴다. 의심이 생긴 프시케는 급기야 큐피드가 잠든 틈에 등불을 비춰 그 얼굴을 들여다본다. 빛 속에 드러난 얼굴은 흉측한 괴물이 아니라 너무도 잘생긴 청년, 사랑의 신이 아닌가! 그런데 그것을 확인한 순간 등잔의 기름 방울이 큐피드의 얼굴에 떨어진다. 놀라서 잠을 깬 큐피드는 지체 없이 프시케를 떠나 버린다. 프시케는 잘못을 깨닫고 비너스에게 찾아가 큐피드를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하지만 그녀에게 주어진 것은 감당하기 힘든 과제들뿐이다. 온갖 시련을 겪는 프시케를 몰래 지켜보던 큐피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제우스에게 도움을 청한다. 마침내 프시케는 큐피드와 결혼하고 영원한 삶을 얻게 된다.


시련과 고난, 그리고 자유
프시케는 순수한 사랑으로 고난을 감내하고 참된 행복을 얻는 인간의 영혼을 상징한다. 그 이름이 나비와 같은 것은 나비도 애벌레 시절 음침한 땅속 생활을 겪고 인내 끝에 스스로 단단한 고치를 뚫고 나와 새롭게 날아오르기 때문이다.
프랑수아 제라르, ‘프시케와 큐피드’, 1798년, 루브르미술관
프랑수아 제라르, ‘프시케와 큐피드’, 1798년, 루브르미술관
해피엔딩으로 끝난 사랑의 신화는 신고전주의를 계승한 미술가들이 사랑스런 연인의 모습으로 재현하면서 큰 호응을 얻었다. 그중 프랑수아 제라르(Francois Gerard)의 ‘프시케와 큐피드’는 프시케가 처음으로 큐피드의 키스를 받는 순간을 그렸다. 싱그러운 들판에서 순백의 얇은 옷을 반쯤 걸친 프시케와 날개 사이에 화살 통을 맨 나체의 큐피드가 막 포옹을 하려고 한다. 청순한 프시케는 보이지 않는 남자의 손길에 수줍은 듯 긴장하면서도 다가오는 운명에 몸을 맡기고 있다. 이들의 백옥같이 희고 매끄러운 피부가 푸른 자연과 함께 창백함을 더해 관능성에 치우치지 않고 고결함마저 느끼게 한다. 남녀의 사랑으로 표현된 이 장면은 단지 에로틱한 결합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프시케의 머리 위에는 봄날 꽃에 날아들듯이 한 마리 나비가 맴돌고 있다. 나비는 그녀의 순수한 영혼이며 아직 알지 못하는 미래의 수난도 함축한다. 이 그림은 진실한 사랑으로 시련을 극복하고 정신을 정화해 영혼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구현한 것이다.
오딜롱 르동, ‘나비들’, 1913년, 개인 소장
오딜롱 르동, ‘나비들’, 1913년, 개인 소장
한 세기가 지나 상징주의 화가 오딜롱 르동(Odilon Redon)도 많은 나비를 그렸다. 그의 ‘나비’ 그림들에는 더 이상 프시케와 큐피드의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화사한 배경에서 각종 나비들이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유유히 떠다닌다. 르동은 눈에 보이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예술을 통해 살아 존재하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현실을 통찰하고 오랜 상징과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다양한 나비들을 그리며 화가는 무엇을 보았을까? 르동의 그림에 보이는 나비는 보이지 않는 많은 것을 내포한다. 나비는 계절의 전령이며 연인들의 사랑이고 지상에서 영원으로 올라간 영혼이다. 르동이 나비를 자주 그린 것은 아마 자연과 인간의 합일로 생겨나는 지고의 가치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비와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궁극적인 자아, 즉 자신의 참 존재를 보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환상적인 르동의 그림을 보면 어느 날 나비의 꿈을 꾼 장자의 말이 떠오르는 것이 그리 엉뚱한 일은 아닌 듯하다.
“내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꿈속에서 내가 된 것인가?”

박은영 미술사가·서울하우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