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ond Act ] 강지원 전 변호사

[한경 머니 = 문혜원 객원기자│사진 이승재 기자]

푸르메재단 이사장, 타고난적성찾기국민실천본부 상임대표. 이 밖에 고정으로 출연하고 있는 방송도 여럿 된다. 수년 전에는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상임본부와 자살예방대책추진위원회 위원장도 역임했다.

한 사람이 과연 이렇게 많고도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을까 싶다. 법조계의 이단아로 통했던 강지원 전 변호사의 얘기다. 강 전 변호사는 3년여 전 한 가지 명함을 더 추가했다. 바로 노르딕워킹IK협회 총재란 직함이다.
“노르딕워킹으로 건강 전도사 꿈꿉니다”
강지원 전 변호사를 만난 건 장마가 시작된 7월 초입이었다. 굵은 빗줄기가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던 때 그는 서울지하철 사당역에 위치한 작은 찻집으로 기자를 초대했다.
“원래 항상 스틱을 들고 다니는데 오늘 비가 온다기에 스틱 대신 장우산을 들고 왔죠. 노르딕워킹을 접한 이후로는 정장 차림으로 도심에 다닐 때도 늘 스틱을 들고 다녀요. 저는 원래 남들이 어떻게 보느냐는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요. (웃음)”

노르딕워킹이라는 이름부터 생소했다. 노르딕워킹은 원래 유럽의 스키선수들이 여름철에 연습을 못 할 때 스틱만 들고 연습하던 것에서 착안한 운동이다. 그저 스틱만 들고 걸으면 되는 운동인 데도 그가 체험한 운동 효과는 남달랐다. 이미 수년 전 노르딕워킹의 효과를 톡톡히 본 그는 노르딕워킹IK협회를 설립하고 총재직까지 맡고 있다. 이후 지방자치단체와 제휴를 맺어 노르딕워킹법을 보급하는 일을 도맡고 있다.

“사람은 걷는 동물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잘 걷는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허리나 어깨를 구부정하게 하고 걷는다든가 발걸음도 팔자 아니면 오자로 걷기 일쑤거든요. 저 역시도 60년 이상을 걸었지만 걷는 것에는 무지했던 것이나 다름없었죠. 노르딕워킹은 잘 걷는 것을 돕는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잘 걷는 게 뭔지를 모르고 지내오던 강 전 변호사는 스틱을 들고 걷는 노르딕워킹을 접하고서야 비로소 제대로 걷는 게 어떤 건지를 깨닫게 됐다. 우선 스틱을 들고 걸으니 척추가 바로서고 균형이 잡히는 것이 느껴졌다. 척추의 중요성이야 두말하면 잔소리. 또 스틱을 드니 걸으면서도 상체 근육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전신의 근육운동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두 발로 걸을 때 무릎에만 가해지던 충격이 스틱에 나눠지니 무릎에 가해지는 부담도 줄어든다. 네 발로 걷는 것과 같은 효과를 지니니 속도가 붙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보다 빨리, 많은 거리를 걷는 효과도 있다. 이 밖에 노르딕워킹IK협회에서 연구한 효과는 양쪽 팔을 움직임으로써 심장에도 영향을 줘 혈액순환을 좋게 한다. 혈액순환이 좋으니 뇌 건강도 좋아지고, 치매 방지, 건망증 예방 등의 효과까지 가져올 수 있다고 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게 그가 그동안 몸소 체험한 결과다.

강 전 변호사가 이처럼 운동과 건강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건 3~4년 전 한 방송국에서 뉴스 해설자로 활동하면서부터다. 매일 오후 5시에 뉴스를 진행하면서 군것질이 늘다 보니 체중이 급속도로 늘었다. 1년 새 60kg대였던 체중은 10kg 이상 불어나 70kg대가 됐다. 방송을 앞두고 출출해진 배를 달래기 위해 군것질을 하던 게 원인이었다.

그때 그는 운동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60대의 나이에 그에게 맞는 운동을 찾던 끝에 그는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노르딕워킹을 접하게 된다. 60대의 나이에 걸으면서도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노르딕워킹과 함께 현미식을 하고 밀가루 음식을 모두 끊었다. 매일 반신욕과 냉·온욕을 반복하는 등 깊은 수면을 취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이런 노력 끝에 몸은 절로 회복됐다. 10kg 이상 불어난 체중은 다시 제자리를 찾아 13kg을 감량했다.

“요즘에 제가 이 나이에 피부가 좋아졌다는 말을 듣는다니까요. 듣기 좋으라고 하는 얘기일지는 모르지만요. 노르딕워킹과 함께 건강관리에 좀 더 신경을 쓰다 보니 다시 검은 머리도 자라나고 있어 신기했죠.”

노르딕워킹을 보급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최근 빛을 발하고 있다. 서울숲에서 공개 강좌를 열었고, 전라남도 완도에서는 협약(MOU)을 맺어 완도수목원에 노르딕워킹 코스를 만드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전남 고흥 역시 노르딕워킹 코스를 만들기 위해 MOU를 체결한 상태다.

“최근 들어서 노르딕워킹에 대한 관심이 전국적으로 크게 늘어났어요. 강연을 다니고 지자체에 보급하느라 전국 각지를 다니죠. 강연을 다녀보면 노인들의 반응이 특히 좋아요.”

몇 년 전에는 복잡한 서울을 떠나 경기도 화성으로 이주했다. 강 전 변호사는 자신이 ‘서울 탈출론자’라 더 탈출해야 하는데 아직 경기도 화성까지밖에 못 왔다며 웃었다. 변호사업은 그만뒀지만 각종 사단법인 업무와 방송을 위해 거의 매일 서울로 출퇴근하다시피 하는 그. 그는 스틱을 쥐고 걸으며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간간히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있지만 개의치 않는다.

“불교용어 중에 ‘무재칠시(無財七施)’라는 게 있어요. 돈 없이도 7가지를 베푼다는 뜻인데 그중 하나가 ‘화안시’ 즉 상대방을 보며 환하게 웃어주는 얼굴입니다. 웃는 얼굴로 베푼다는 거예요. 저를 알아봐주시는 분들께 웃는 얼굴로 베푼다는 생각을 하면 참 쉽습니다.”

평생직업 변호사 그만둔 이유

강 전 변호사는 몇 년 전 변호사사무실을 폐업했다. 그의 블로그에는 ‘법률적인 상담은 젊은 변호사들과 하세요’라고 아예 못을 박았다. 이른바 ‘평생직업’인 변호사를 왜 그만뒀을까. 변호사업을 계속해야 노후 등이 보장되지 않을까.

“사람들은 저를 변호사라고 하는데 전 본질적으로는 사회운동가예요. 지금 하고 있는 노르딕워킹IK협회를 비롯해 청소년지킴이 활동, 국민적성찾기 운동, 장애인 재단인 푸르메재단 총재 등 가지고 있는 명함만 해도 여럿 돼요. 그중에서 법조인은 저와 맞지 않는 타이틀이었어요.”

30여 년을 법조인으로 살아온 그의 대답이 의아했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행정고시에 패스한 이후 사법고시에 수석 합격해 검사와 변호사로서 수십 년을 살아왔으니 말이다. 게다가 아내는 그 유명한 김영란 전 대법관이 아닌가.

그러나 그의 프로필을 찬찬히 뜯어보면 “법조인과 맞지 않았다”던 그의 말에 수긍이 갈 듯했다. 그는 1989년 청소년 교화기관인 서울보호관찰소장을 맡으며 청소년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후 아예 자신의 삶의 방향을 청소년 보호 운동에 맞췄다. 한직인 서울고검 연구직을 자원해 청소년 문제 연구에 매달렸다. MBC TV의 <이경규가 간다>에는 ‘청소년지킴이’를 자청하며 고정출연해 국민적인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검사와 변호사 시절에도 실질적으로는 청소년 운동을 해 왔던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검사를 한다면 저처럼 해서는 안 됐죠. 검사란 직업이 범인을 잡아넣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데 저는 청소년 상담을 하고 이들을 돌보는 것이 더욱 뿌듯했거든요. 지금도 누가 법률적인 걸 상담하고 싶다고 하면 질색을 하지만 청소년 문제를 상담하고 싶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해요.”

그가 변호사업을 그만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적성에 맞지 앉는 일을 인생 2막에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변호사업은 미련 없이 그만뒀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사는 인생 2막이 되니 오히려 신바람이 난다. 적성에 맞지 않는데도, 돈벌이를 위해서, 명예를 위해서 일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돈에 대한 욕심, 권력, 지위를 모두 내려놓으니 한결 가볍다.

혹자는 얘기한다. “권력을 내려놓는다면서 왜 2012년 대선에는 출마한 것이냐”고. 그는 당선되기 위해 출마한 것이 아니었다고 선을 그었다.

“저는 제 당선 가능성을 1%도 꼽지 않았어요. 전 단지 매니페스토 정책선거운동을 하기 위해서 출마했을 뿐입니다. 현수막 한 장 내걸지 않고 차량 유세도 하지 않고 오직 정책으로만 승부를 봐야 한다는 겁니다. 요즘도 선거철만 되면 정치권의 러브콜이 계속됩니다. 하지만 모두 거절했죠. 정치는 절대 하지 않겠다는 제 소신 때문입니다. 다만 저는 정치는 안 하지만 정치개혁 운동은 더욱 가열차게 전개할 겁니다.”

검사와 대법관으로 살아온 강 전 변호사 부부의 화려한 이력과 달리 재산은 청빈한 삶을 보여주듯 집 한 채가 전부다. 각종 재단 일을 도맡으면서도 무보수, 사회봉사의 개념으로 여겼다.
“돈이 중요했다면 아내 역시 퇴임 후에 바로 변호사업을 개업했겠죠. 하지만 저희가 변호사업을 계속한다면 그건 순전히 자녀들에게 물려주기 위한 이유밖에 되지 않죠. 그걸 제가 왜 해야 하나요. 자녀들의 자립 능력만 빼앗을 뿐인데.”

세상 사람들의 관심인 노후 계획이나 자녀 상속 등의 문제는 그에게만은 걱정과 고민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보다 사회적으로 열려 있었다. 일흔을 바라보는 종심(從心)의 나이, 체면과 겉치레를 떠나 순수한 열정을 좇아 사는 강 전 변호사의 인생 2막은 그래서 더욱 특별했다.

“노르딕워킹으로 건강 전도사 꿈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