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박은영 문학박사·서울하우스 편집장] 피리는 인류 최초의 악기이며, 일반적으로 목관악기를 총칭하는 이름이다. 여러 문화에서 피리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마성의 악기로 여겨진다.

피리는 본래 갈대나 대나무처럼 속이 빈 식물로 만들어 가볍게 휴대할 수 있는 편리한 악기다. 소리를 내려면 악기에 직접 입을 대고 숨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래서 피리는 자연적이며 감각적이며 직접적인 것, 즉 야생의 동물과 같이 다듬지 않은 원초적 본성과 연결된다.
에두아르 마네, 피리 부는 소년, 1866년, 오르세 미술관
에두아르 마네, 피리 부는 소년, 1866년, 오르세 미술관
아테나가 만든 디오니소스의 악기
그리스 신화에서 피리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발명했으나 곧 버림받은 악기다. 아테나가 만든 피리는 아울로스라는 쌍피리였다. 흡족한 마음으로 아울로스를 불어보던 아테나는 뺨이 부풀어 얼굴이 미워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다른 신들의 웃음거리가 된다는 이유로 여신은 그만 피리를 땅에 던져 버린다. 그러자 음악을 좋아하는 마르시아스라는 이름의 사티로스가 버려진 피리를 주워 갖는다. 사티로스는 반인반수 모습을 한 자연의 정령들인데 주신(酒神)인 디오니소스를 따라다니며 술과 여자, 춤과 노래를 즐긴다. 피리는 디오니소스 축제 때 자주 연주되며 디오니소스의 상징으로 억제되지 않은 감정이나 폭발하는 열정을 표출하곤 했다.
피리가 아테나 여신으로부터 만들어져 사티로스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은 그 악기가 고결한 태생을 지녔지만 그것을 이탈해 무절제한 감성이나 저열한 동물적 본능과 결합했다는 뜻이다.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피리의 신비한 소리는 실제로 새나 뱀 같은 짐승을 부르거나 길들이는 용도로 사용된다. 전설, 동화, 예술작품 등에서는 마법의 피리가 기적이나 재앙을 가져오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림 동화로 잘 알려진 <피리 부는 사나이>에서 피리는 마을을 황폐화시킨 쥐들을 홀려 없애 버리지만, 결국에는 순진한 아이들까지 유혹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한다. 또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서는 피리가 어둠과 악의 상징인 ‘밤의 여왕’의 악기였지만, 고통을 기쁨으로 바꿔주는 마력으로 주인공들을 도와 해피엔딩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피리는 이성과 감성, 인간과 짐승, 남성과 여성, 낮과 밤, 선과 악의 이중성을 가지고 양편의 경계를 뒤흔들어 놓는다. 상반되는 양자들 중에서 전통적으로 우월한 가치로 여겨진 전자들보다는 오히려 열등하게 취급된 후자들 편에서 피리는 그동안 서양 문명이 배제한 ‘타자’들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그림에 감춰진 타자의 얼굴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의 그림 <피리 부는 소년>에서도 억압된 타자의 얼굴을 찾을 수 있을까? 마네는 왕실 군악대 소년을 모델로 이 그림을 그렸다. 소년은 제복인 붉은 바지와 금속 단추가 달린 검은 상의를 입고 붉은 깃털이 달린 검은 모자를 썼다. 그는 정면으로 서서 검은 피리를 불고 있는데 상체에 두른 흰색 천에 노란 금속제 피리 케이스가 매달려 있다. 이 앳된 소년의 얼굴을 보고 사람들은 레옹 렌호프와 빅토린 뫼랑을 동시에 떠올렸다. 레옹은 마네의 아들인데 어쩌면 마네 부친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있어서 가족 간의 모호한 관계가 논란거리가 된 인물이다. 빅토린 뫼랑은 마네의 회화 모델을 자주 섰던 여성인데, 마네의 그림에 부르주아 남성들의 동료로, 나체의 매춘부로, 투우사로 다양하게 등장했다. 이렇게 <피리 부는 소년>에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상반된 성이 모호하게 공존하며 사회적 다수와 통념으로부터 소외된 타자들의 얼굴이 숨어 있다. 무기 대신 악기를 든 연약한 소년은 군대 속의 타자이며, 아버지가 누군지 불분명한 아들은 가족 간의 타자이고, 여성 화가로서 남성 화가의 그림 속에서 다양하게 변신한 여인은 사회 속의 타자인 셈이다. 다시 말해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은 여러 타자들이 교묘히 결합된 다중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피리 부는 소년>은 내용뿐 아니라 형식에서 기존 관념을 깬 새로운 조명암 대조를 생략한 채 그림자도 거의 없이 표현했다. 몇 가지 기본 색만을 대담하게 적용하고 도려낸 듯 명확한 윤곽으로 배경과 강한 대조를 이뤄 분리시켰다. 그 결과 인물이 마치 색종이를 오려 붙인 듯 선명하고 평면적인 성격을 띤다. 이러한 표현은 전통적 재현 방식을 파괴한 것이어서 당시 미술계에서 심한 질타를 받았다. 이미 몇 년 전부터 파격적 행보를 보인 마네는 이 작품에서 사물의 그럴듯한 재현을 목표로 하는 회화 전통과 결별하고 기꺼이 화단의 타자 역할을 맡아 회화의 자율성에 대한 신념을 확고히 표명했다.
좌)앙리 루소, 뱀 부리는 여인, 1907년, 오르세 미술관 우)아울로스를 부는 아테나, 그리스 적화식 도기, 기원전 375~350년, 피렌체 국립고고학박물관
좌)앙리 루소, 뱀 부리는 여인, 1907년, 오르세 미술관 우)아울로스를 부는 아테나, 그리스 적화식 도기, 기원전 375~350년, 피렌체 국립고고학박물관
20세기 초 프랑스 화단의 타자였던 앙리 루소(Henri Rousseau)도 <뱀 부리는 여인>이라는 그림에서 피리를 매개로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환상적으로 풀어냈다. 보름달이 뜬 조용한 밤, 밀림에서 나체의 검은 여자가 달빛을 등지고 서서 피리를 분다. 치렁치렁한 긴 머리와 각질처럼 단단한 피부의 건강한 육체를 지닌 그녀는 마치 원시인처럼 보인다. 최소한의 의복도 없이 여자가 가진 물건이라고는 오직 피리뿐이다. 그 피리소리에 어두운 숲속에서 커다란 뱀들이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슬금슬금 다가온다. 여인의 목에도 뱀 한 마리가 걸려 있다. 뱀과 잘 통하는 야생의 여자라면 에덴동산의 이브가 연상된다. 피리소리로 사람과 뱀이 공모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위험한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밀림은 안락한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다. 거기엔 어둠, 흑인, 여자, 짐승 등 문명으로부터 도외시된 타자들이 숨어 있다. 피리소리는 그들을 춤추게 한다. 어둠의 심연에서 피리는 마법의 소리를 울려 문명에 젖은 사람들을 잃어버린 원초적 낙원으로 이끈다. 그곳은 오랫동안 멀리 해 낯설고 기이하고 두렵게도 여겨지지만, 사실은 본능과 욕망과 열정이 꿈틀대는 친숙한 생명의 고향이다.형성을 구사한 작품이다. 그림의 배경은 벽과 바닥의 구분 없이 하나로 처리했고 인물은 세부 묘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