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이석원 여행전문기자] 이탈리아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주세페 타르티니(Giuseppe Tartini)가 격정적으로 연주했을 ‘바이올린 소나타 G단조 악마의 트릴’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길은 조금은 낯설다. 발칸반도의 제일 북쪽, 알프스의 장엄한 활개가 남동쪽에서 끝나는 율리안 알프스의 나라 슬로베니아(Slovenia). 지난해 5월 TV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이하 디마프)>속 조인성(서연하 역) 덕에 알려지긴 했어도 슬로베니아는 아직 낯선 나라다.
격정의 바이올린 선율 흐르는 ‘디어 마이 프렌즈’ 슬로베니아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과 프란체 프레셰렌의 동상으로 둘러싸인 프레셰렌 광장은 류블랴나 여행의 시작점이자 마침표다.]

격정의 바이올린 선율 흐르는 ‘디어 마이 프렌즈’ 슬로베니아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은 류블랴나의 랜드마크. TV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조인성이 고현정에게 프러포즈를 하려던 곳으로 더 잘 알려졌다.]
격정의 바이올린 선율 흐르는 ‘디어 마이 프렌즈’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성 전망대에서 바라본 도시의 한쪽. 가운데 프레셰렌 광장과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이 보인다.]

“그는 어느 날 밤 악마와 계약을 하는 꿈을 꾸었다. 그는 악마에게 자신의 바이올린을 건네주었다. 악마가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모습에 놀랐다. 그는 즉시 방금 전 자신이 들은 것을 악보로 옮겨보았다. 그리고 그는 ‘악마의 트릴’을 작곡할 수 있었다. 그는 다른 일을 하며 살아갈 수만 있다면 자신의 악기를 깨부수고 영원히 음악을 포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찰스 버니의 음악기행집 <프랑스와 이탈리아 음악의 현황> 중 한 대목이다. 갈구하는 듯 애절한 선율로 시작된 바이올린은 끊어질 듯 힘겹게 이어갔다. 그러다가 예기치 못한 대담한 도약. 선율은 파격적이다. 얌전하지만 과감하고, 정연하지만 크게 요동친다. 그리고는 이내 웅장하다. 진짜로 악마와 계약이라도 했던 걸까? 도대체 이 오묘하고 감미로우면서도 격한 감동을 주는 선율은 무엇일까? 사람의 것일까? 타락한 천사의 것일까?

타르티니를 만나기 위해서 먼저 들른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Ljubljana).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의 지배,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탈리아·헝가리의 분할 통치, 피지배와 독립을 반복하다가 1992년 유고내전을 거쳐 고단하고 힘겨운 역사를 끊어낸 슬로베니아. 그 첫 관문인 류블랴나는 ‘사랑스럽다’는 뜻처럼 언제 그 참혹한 전쟁을 겪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답고 우아한 알프스의 끝, 발칸의 시작이다.

19세기 말 아르누보 양식의 수려한 건물들이 류블랴니차강을 중심으로 파노라마를 그리고 있는 류블랴나는 도시의 가장 높은 곳 류블랴나성 전망대에서 바라봤을 때 포괄적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저 멀리 율리안 알프스의 최고봉 트리글라우산의 만년설을 따라 코앞으로 달려온 도심의 풍광은 유럽의 흔한 그것이라고만 얘기하기에는 정교함과 예술성이 남다르다.

<디마프>에서 조인성이 고현정에게 청혼을 하기 위해 달려오다가 자동차에 치인 비극적인 프레셰렌 광장(Prešernov spomenik)이며, 슬로베니아 지성의 보고라고 불리는 류블랴나대 앞 콩그레스 광장, 그 주변을 붉은 꽃으로 물들인 류블랴나는 피렌체나 프라하와는 또 다른 소박하지만 풍성한 아름다움을 잔뜩 품고 있다.

드라마 속 조인성이 차에 치인 프레셰렌 광장이 원래는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보행자 전용 도로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장난스런 웃음을 참는다. 조인성이 “그 성당에서 오후 6시에 프러포즈를 하면 영원한 사랑이 이뤄진다는 전설이 있대”라고 말한 ‘그 성당’,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Frančiškanska cerkev)이 보는 이들을 압도하지 않고 편안히 품어줄 모양으로 서 있다. 그 한편 슬로베니아가 가장 사랑한 민족시인 프란체 프레셰렌의 동상은 건너편에 있는 이루지 못한 사랑 율리아나를 168년째 바라보고 있다.
격정의 바이올린 선율 흐르는 ‘디어 마이 프렌즈’ 슬로베니아
[블레드성 안에는 지금도 중세 방식 그대로 종이를 인쇄하는 곳과 중세 동전을 만드는 곳,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와인을 만드는 와이너리가 있어 여행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격정의 바이올린 선율 흐르는 ‘디어 마이 프렌즈’ 슬로베니아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블레드 호수는 둘레가 6km에 불과한 크지 않은 호수지만
그 아름다움은 유럽에서 최고라고 불린다.]

‘알프스의 눈동자’, 그리고 피란
블랴나에서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1시간,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에서 멀지 않은, 율리안 알프스와 조금 더 가까이 간 곳에 슬로베니아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블레드(Bled) 호수가 있다. 율리안 알프스의 만년설이 녹아내린 물이 모여 묘한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곳. 현실 세계의 실존하는 장면이 아닌 듯, 천상의 오아시스인 양 존재만으로도 지극한 아름다움을 머금고 있는 곳이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이후 23척의 플레트나라는 전통 나룻배만이 호수를 오갈 수 있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 유고 연방 대통령이 구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 그리고 북한의 김일성과 쿠바의 카스트로에게까지 한껏 자랑하며 사랑하던 곳이다. 언젠가 티토 전 대통령의 초대를 받은 김일성이 호수 옆 티토의 별장인, 지금은 호텔로 쓰이는 빌라 블레드에서 하루를 묵은 후 “피곤한 조국에 돌아가기 싫다”고 말한 일화도 있다.

블레드성에서 내려다본 블레드 호수의 모습은 치명적인 아름다움이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엄연한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해진다. 그런데 만약 이 블레드 호수에 다이아몬드처럼 박혀 있는 블레드섬이 없었다면 지금의 이 비현실감이 조금은 누그러질까? 전체 해안선 길이가 46.6km에 불과한 슬로베니아에서 유일한 섬인 블레드섬. 그 ‘단 하나’의 섬은 유럽 사람들에 의해 ‘알프스의 눈동자’라고 불린다. 알프스의 눈동자에 담긴 작고 아담한 성모승천 성당은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결혼식 장소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마침내 만난 슬로베니아의 서쪽과 남쪽의 끝 피란(Piran). 그런데 피란까지 오는 길에 만난 슬로베니아는 이상하다. 어디에도 타르티니가 없다. 사실 타르티니는 슬로베니아 사람이 아니다. 그는 18세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음악가다. 지금은 슬로베니아의 영토인 피란이 그가 태어난 18세기에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공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슬로베니아의 음악가’가 아닌 ‘피란의 음악가’로 불리게 된 것이다.

타르티니를 품고 있는 해안 도시 피란은 흡사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를 닮았다. 아드리아해를 향해 달리고 있는 것도 그렇고, 도시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작은 반도 위 베네치아풍 붉은 지붕들이 아드리아해의 찬란한 태양과 만나 선홍빛으로 빛나는 것도 그렇다.

타르티니에 대해서는 유럽 고전음악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로 꼽히면서도 체계적인 연구가 많지 않다. 게다가 그의 삶과 관련해서는 사실보다는 전설처럼 떠도는 이야기들이 훨씬 많다. 앞서 언급한 ‘바이올린 소나타 4번 G단조 악마의 트릴(Les trilles du diable)’에 얽힌 이야기 같은 것들이다.

1692년 피란(이탈리아어 피라노)에서 태어나 바로크 시대와 고전주의 시대의 전환기에 활동한 타르티니는 태어나기는 피란에서 태어났지만 이탈리아 베네치아 근교 파도바와 아시시에서 음악 공부를 했고, 본격적인 바이올린 연주자와 작곡가로서의 활동도 주로 베네치아에서 했다. 그런데 당시 그 누구보다도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이면서 작곡가였던 그였지만 그의 작품과 관련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심지어 타르티니 최고의 역작으로 알려진 ‘악마의 트릴’은 정확한 작곡 연대도 모른다. 그가 1770년 사망하고도 한참 후 1798년 프랑스 파리의 한 출판사에서 악보가 출판된다. 당연히 ‘악마의 트릴’이라는 부제도 그때 출판사에 의해 붙여진 것이다. 지금 연주되는 ‘악마의 트릴’은 모두 19세기 이후에 출판된 악보에 의존한다. 타르티니 전문가들은 타르티니 본인이 직접 썼던 악보와는 상당히 다르다고 주장한다.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만큼은 아니지만 현재 연주되는 ‘악마의 트릴’은 실제 타르티니의 것에서 많이 왜곡됐다는 주장인 것이다.
격정의 바이올린 선율 흐르는 ‘디어 마이 프렌즈’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와 혼동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닮은 피란반도의 끝, 성벽 위에서 바라본 피란은 아드리아해에 핀 꽃이라고 부른다.]
격정의 바이올린 선율 흐르는 ‘디어 마이 프렌즈’ 슬로베니아
[유리야 대성당에서 내려다본 타르티니 광장과 피란 항구.]

악마와 거래한 자, 타르티니의 역설
피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타르티니 광장(Tartinijev trg)이다. 피란 시청 앞 타르티니의 동상은 한 손에 바이올린 활을 움켜쥐고 무언가 격한 표정으로 광장을 노려보고 있다. 실존 인물의 동상치고 상당히 역동적인 동작을 취하고 있는 것도 ‘악마의 트릴’과 무관하지 않다.

악마와 거래한 자, 악마의 영혼을 입어 위대한 작품을 만든 자에 대한 형상화일까? 도시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곳, 성 유리야 대성당(Župnijska cerkev sv. Jurija)의 종탑에서 바라보는 타르티니 광장은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힌 피란이 어떻게 정연하게 정돈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광장이 타르티니 광장으로 명명되고 타르티니의 동상이 세워진 이유는 광장 한쪽에 그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타르티니 기념관으로 사용되는 캬우호바 울리카(Kajuhova ulica) 12번지다. 연한 베이지 톤의 건물 1층은 레스토랑이고 2층이 타르티니의 생가다. 타르티니가 사용하던 바이올린과 악보 등을 전시해 놓았지만 소박하다. 오히려 매년 9월 열리는 타르티니 페스티벌 때 이 건물의 연주장에서 열리는 타르티니 연주회가 볼 만하다.

이제 타르티니를 따라 나선 낯선 여행의 피날레가 다가온다. 도시의 제일 높은 곳, 과거 피란을 보호했을 법한, 그러나 지금은 무너져 초라한 일부만이 남아 있는 성벽에 오르면 아드리아해를 향해 내달리다가 피란반도 끄트머리에서 흠칫 멈춰 버린 슬로베니아를 직면하게 된다.

격정의 바이올린 선율 흐르는 ‘디어 마이 프렌즈’ 슬로베니아
[타르티니 광장 한 옆에 있는 생가 건물. 붉은 주단이 걸린 2층이 지금은 타르티니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격정의 바이올린 선율 흐르는 ‘디어 마이 프렌즈’ 슬로베니아
[성당의 크기는 작지만 흔치 않은 백색의 내부는 예술적 아름다움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격정의 바이올린 선율 흐르는 ‘디어 마이 프렌즈’ 슬로베니아
[타르티니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서 세워진 동상. 바이올린 활을 쥐고 광장을 노려보는 듯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주변의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처럼 찬란한 중세 문화를 자랑하지도 않고, 땅의 70%는 험준한 알프스에게 내준 슬로베니아가 율리안 알프스에서 흘러내려 여기까지 온 듯하다.
붉은 성채 도시 두브로브니크를 빼닮아 수려한 붉은 꽃으로 피어난 도시. 악마에게 영혼을 판 건지, 아니면 그 자신이 실은 악마의 현생인지 본인도, 주변 사람들도 알 수 없었던 기이한 광란의 바이올리니스트 타르티니와는 언뜻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평화로움.

차라리 타르티니보다는 조인성과 고현정이 커피 광고 찍듯 뛰어다니는 모습이 더 어울리는 그런 평화로움이 있다. 그런 피란을 품은 슬로베니아는 이탈리아의 낭만과 슬라브 민족의 정서, 그리고 발칸이 지닌 격동적 투쟁의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유럽 최고의 여행지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