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 Passage No.181006, 캔버스에 아크릴릭, 162×130cm, 2018년
Un Passage No.181006, 캔버스에 아크릴릭, 162×130cm, 2018년
Un Passage No.181007,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162cm, 2018년
Un Passage No.181007,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162cm, 2018년
LIFE • Artist
김윤섭 소장의 바로 이 작가 - 하태임

[한경 머니 =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미술사 박사]

2018년 6월 12일, 전 세계인의 이목은 싱가포르 최고의 카펠라호텔에 쏠렸다. 지난 70여 년을 서로 반목하던 북한과 미국의 양국 정상이 두 손을 맞잡은 역사적인 순간이 연출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센토사섬의 이 호텔은 또 다른 관점에서 미술 마니아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CNN을 비롯한 주요 미디어에 김정은 위원장의 모습이 생중계 되는 순간, 소파에 앉은 김 위원장 등 너머의 호텔 벽면에 낯익은 두 점의 그림이 등장하게 된다. 바로 하태임 작가의 칼라밴드 시리즈 작품이 그 주인공이었다.

하태임 작가의 작품이 북미 정상회담 장소에 걸리게 된 사연은 아주 극적이고 우연이었다. 2007년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에 참가했던 하 작가의 작품을 인상 깊게 본 미국의 한 유태인 아트딜러가 작품 4점을 주문하면서 인연은 시작됐다. 하 작가는 뜻밖의 제안에 당시 미국 산타모니카에 거주했던 그를 직접 찾아가기까지 했다. 그 자리에서 싱가포르 센토사섬 카펠라호텔 도면을 보며, 그림이 걸릴 위치를 확인하게 된다. 그 그림을 우리는 10년을 기다렸다가 역사적인 순간과 함께 만난 것이다.

하 작가의 작품이 발산하는 가장 큰 매력은 ‘밝고 경쾌한 색 띠의 중첩’이 연출하는 생동감과 균형미에 있다. 단순하고 완만한 곡면의 컬러밴드들을 통한 리듬감은 음악적인 선율처럼 화면을 유영한다. 보이는 대상을 묘사했다기보다는 마음속에 잠들었던 음률의 파동을 일깨워 눈앞에 펼쳐놓은 색채의 환상곡에 가깝다. 눈으로 듣는 한 편의 감미로운 시(詩)의 운율을 만난 듯하다. 그 안엔 하 작가만의 남다른 절제된 흥겨움이 담겨 있다.

말 그대로 흥(興)은 ‘재미나 즐거움을 일어나게 하는 감정’이다. 흔히 사람과 천지의 기운이 만나 일으키는 즐겁고 행복한 감정에 비유되기도 한다. 흥(興)의 감정은 ‘한(恨)’과 대조되는 긍정적인 기운의 표상이다. 오죽하면 13세기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는 “흥이 깃들이고 사물과 부딪칠 때마다 시(詩)를 읊지 않은 날이 없다”고 했을까. 또한 19세기 조선 후기 철학자인 혜강 최한기(惠岡 崔漢綺)는 “사람을 포함해 천지의 기운은 ‘활동운화(活動運化)’한다”고 했다. 결국 흥의 실체는 ‘사물과 자아가 만나 하나가 돼 발현되는 즐거움’인 셈이다. 하 작가 그림의 첫 대면에서 흥을 발견하게 되는 이유도 그 연장선이다.

그는 10년이 훨씬 넘도록 만곡(彎曲)의 색 띠만을 그려 일명 ‘컬러밴드(color bend) 작가’로 통한다. 저마다의 색들은 고유의 율동으로 마치 생명 근원에 대한 환희를 환기시켜주는 듯하다. 빛의 충만한 기운을 품은 제각각의 색 띠들은 환상 속의 감성적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 흥겨운 놀이 과정을 하 작가는 “내게 색은 감성적 공간 건축의 재료다”라고 부른다. 또한 그가 연출해 놓은 감성공간의 구조물 사이사이는 그대로 소통의 경로가 된다. 그래서일까. 일괄적인 작품 제목은 <통로(Un Passage)>라고 명명됐다.

하 작가는 프랑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이미 10대부터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며 미술가의 꿈을 키웠다. 가장 든든한 후견인이었던 아버지 하인두 선생 덕분이다. 청화 하인두(靑華 河麟斗, 1930~1989년) 화백은 한국 현대미술 1세대로 엥포르멜(비구상)운동의 선두주자였다. 주로 오방색과 단청(丹靑), 만다라 같은 전통적 미감의 조형성과 불교적 소재를 통해 한국적 추상미술을 만들어낸 작가다. 어쩌면 하 작가가 컬러밴드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그는 색의 원형미를 조율할 수 있는 DNA를 타고 났기 때문이다.

이젠 하 작가에게 색과의 만남은 매일 쓰는 일기와도 같다. 수없이 반복되는 물감 올리기 행위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지치도록 온 열정을 다한 이후엔 한없이 고요하고 평온함의 안위를 선사받는다. 폭풍이 지나간 이후의 수면(水面)처럼, 숨을 고르듯 지친 일상을 보듬어주는 화면의 끌림이 더없이 매력적이다. 현재의 컬러밴드 추상 작업의 제대로 된 출발은 프랑스 유학 시절이다. 프랑스에는 하인두 화백의 권유로 가게 됐지만, 진정한 감성적 소통을 위한 자신만의 조형적 언어를 만든 것은 오로지 그의 몫이었다.

하 작가는 박사 논문의 제목이 ‘컬러밴드를 이용한 비선형 만곡패턴 구성의 회화적 역동효과’일 정도로 색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과 조형적 변용을 꾸준히 천착해 왔다. 진정한 소통은 지식이나 언어 혹은 텍스트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림에서 인위적인 문자와 부호들을 하나씩 지워 나갈 때, 오히려 감성이 서로 통할 수 있는 통로는 더 넓어진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만곡(彎曲) 형태 색 띠의 조화, 반복되는 행위의 중첩, 상호 교차되는 투명성의 틈새 등 하태임 회화의 주요 구성요소는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컬러밴드(색 띠) 하나를 만들기 위한 수많은 행위들은 자아의 긍정과 부정, 현실감의 초월을 반영합니다. 이러한 반복적인 제스처는 몸을 축으로 해 넓게 뻗은 팔 길이만큼의 필력에 의해 완성됩니다. 그 안엔 느린 속도의 붓질과 팽팽한 캔버스와의 탄성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를 포함하지요. 맑고 투명한 보색대비와 유사대비를 통해 일정한 패턴이 배열되면서 일어나는 틈새의 연출은 태초의 에너지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반복 행위로 비롯되는 중첩과 교차, 그리고 병렬의 과정은 처음의 것들을 해체하며 ‘그리기와 지우기의 간극(crack)’을 연출하는 목표를 달성하게 됩니다.”

하 작가의 그리기 방식은 서양화 재료를 사용하지만 한국화에 더 가깝다. 빈 캔버스에 팔 길이만큼 단숨에 긋는 붓질 방식이 화선지의 일필휘지(一筆揮之) 그 자체다. 이는 기운생동을 온전히 담아내려 한다는 측면이 둘의 공통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물감 층을 두텁게 올려 마티에르를 얻기보다는, 오히려 물감이 얹어질수록 더 두드러지는 투명성 역시 ‘한지에 채색 기법’을 고스란히 닮았다. 단순히 작품 제작의 방법론을 떠나, 하 작가는 그 붓질을 통한 시간의 축적이 곧 보는 이의 마음을 위로하는 힐링의 대명사가 되길 기대할 것이다. 하 작가 작품의 전시 가격은 100호(162.2×130.3cm) 기준 약 2000만 원 선에 형성돼 있다.
‘북·미 정상 등 너머 칼라밴드 색채 환상곡’
김윤섭 소장은…
미술평론가로서 명지대 대학원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월간 미술세계 편집팀장, 월간 아트프라이스 편집이사를 역임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및 서울시립미술관 작품가격 평가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교보문고 교보아트스페이스 기획위원, 숙명여대 겸임교수,
계간 조각 편집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심의추천위원,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