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 자기타일로 꾸며진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발렌시아 남쪽 해안에 위치한 도시 알테아의 전경.
흰색 자기타일로 꾸며진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발렌시아 남쪽 해안에 위치한 도시 알테아의 전경.
[한경 머니 기고=글·사진 구민정 작가·<사적인 가이드북: 두 번째 스페인, 발렌시아> 저자 ]일반적으로 스페인 하면 떠오르는 건 플라멩코나 알함브라 궁전, 열정적인 축구 등이 아닐까. 하지만 당신이 스페인을 두 번째 방문한다면 도시 곳곳에 다양한 매력을 숨겨 놓고 있는 발렌시아에서의 소소한 휴식을 꿈꿀지도 모른다.

스페인 여행 좀 다녀보았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발렌시아를 제대로 가본 사람이 있을까. 건축과 미술에 조예가 깊거나 축구를 좋아한다면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를 먼저 떠올렸을 것이고, 플라멩코나 알함브라 궁전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다면 스페인 남부 세비야와 그라나다를 그려보았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스페인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발렌시아는 2017년 미국 경제 잡지 포브스(Forbes)에서 뽑은 밀레니얼 세대들이 꼽은 살기 좋은 도시 50위 중 13위, 2018년 영국 일간지 더 가디언(The Guardian)이 꼽은 여름휴가를 보내기 좋은 40개 도시 중에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발렌시아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원석 같은 매력들이 숨어 있는 곳이다.

바르셀로나 혹은 마드리드에서 기차를 타고 발렌시아 북역에 내려 모자이크로 장식된 대합실을 나오면 투우장과 낮은 높이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한겨울에도 강한 햇살과 낮에는 영상 10~15도를 유지하는 온화한 지중해성 아열대기후 덕분에 따뜻한 기온과 파란 하늘이 여행객을 맞이한다. 흐리고 비 오는 날일지라도 한적한 길만큼 여유 넘치는 사람들의 표정이 발렌시아만의 정취와 어우러져 따뜻하게 감싸준다. 먼저 구도심으로 불리는 시우닷 베야(Ciutat Vella) 지구를 느린 보폭으로 느껴보기로 한다.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을 촬영했던 고성과 바로 앞 아름다운 해변이 펼쳐져 있는 근교 도시 패니스콜라(Peniscola)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을 촬영했던 고성과 바로 앞 아름다운 해변이 펼쳐져 있는 근교 도시 패니스콜라(Peniscola)
01 오렌지 향 가득한 이국적인 도시

도심 곳곳의 오렌지 가로수와 쭉 뻗어 자란 야자수가 이국적인 광경은 발렌시아를 가장 사랑스럽고 이색적인 장소로 만들어준다. 발렌시아는 오렌지 향이 가득한 도시다. 마치 우리나라의 은행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져 가을이면 후두둑 열매가 떨어지는 것처럼 발렌시아에는 키 낮은 오렌지나무가 길을 따라 줄지어 서 있다. 겨울에도 영상 5도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 지역으로 1년 내내 오렌지나무가 자라고, 1~2월에는 진한 주황색으로 탐스럽게 열린 오렌지들을 마주한다. 시내 카페나 바 어디서든 직접 짜서 더욱 신선한 발렌시아산 오렌지주스를 맛볼 수 있다.

구도심을 천천히 걷다가 마르케스 도스 아구아 궁전(Palacio Marques dos Agua) 앞에 머문다. 아름다운 대리석과 화려한 조각에 이끌려 발걸음을 떼는 순간,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에서 우디 앨런이 홀린 듯 드나들었던 선술집이 보이고, 어디선가 반가운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자네 이거 한번 맛보지 그래.” 1950년대부터 미술, 음악, 문학, 정치 등의 인재들의 사교의 장으로 북적이던 라 세르베세리아 마드리드(La Cervecería Madrid)다. 티노(Tino)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화가 콘스탄테 길(Constante Gil, 1926~2009년)이 운영해 그의 그림이 가득하던 곳. 이곳에서 발렌시아 대표 칵테일인 ‘아구아 데 발렌시아(발렌시아의 물)’가 탄생했다. 1978년 작가 마리아 앙헬레스 아라소(María Ángeles Arazo)가 <발렌시아의 밤(Valencia Noche)>이라는 책에 티노가 직접 만든 아구아 데 발렌시아에 대해 소개하기도 했다. 지금 티노의 바는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발렌시아 곳곳에는 여전히 오렌지의 향긋함이 가득하다.
도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오렌지나무.
도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오렌지나무.
02 시간여행의 도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다시 길을 나서 중심가를 따라 걷다 보면, 발렌시아의 황금기였던 15세기의 유물 같은 건물들이 이어진다. 실크 무역의 구심점이던 실크거래소와 대성당, 도시의 중심을 이루는 레이나 광장, 구도심을 구분하던 문인 세라노 타워 등 랜드마크가 남아 있다. 특히 꼬불꼬불한 골목이 늘어선 엘 카르멘(El Carmen) 지역은 옛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굽은 길 사이에 심어진 올리브나무 아래 작은 타파스바와 이베리아반도가 이슬람의 지배를 받던 타이파 시대에 만들어진 세월의 흔적이 공존한다. 그리고 이 골목골목에서 이색적인 그라피티 작품을 마주하게 된다. 때로 작품이 헐려 없어지거나 또 다른 그림으로 뒤덮이는 일도 있지만, 아쉬움보다는 위트 있는 새 낙서를 만나보는 즐거움이 더 크다. 폐허 같아 보여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표면을 감싼 그라피티가 너무도 강렬해 넋을 놓고 셔터를 누르게 된다.

미로 같은 좁은 길을 지나 큰 대로변에 이르면, 20세기 말부터 문화 도시의 자질을 높이려고 지어 올린 현대식 건물들이 보이고 역시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멋지다. 둥글게 원형으로 자리한 발렌시아 중심가의 끝, 도심을 둘러싼 녹색의 풍경인 투리아 정원과 마주한다.

스페인 도심에 자리한 최대 규모의 정원으로 손꼽히는 곳이자 홍수로 범람하던 강을 메워 정원으로 바꾼 곳으로 아직 18개의 다리가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한강시민공원처럼 조깅, 사이클 등 운동과 피크닉을 하거나 선탠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당장이라도 그들과 함께 발렌시아의 일상 속에 녹아들고 싶어진다.

그리고 초록빛으로 이어진 정원 끝에 미래의 도시를 연상시키는 스페인의 유명 건축가인 산티아고 칼라트라바(Santiago Calatrava)와 펠릭스 칸델라(Felix Candela)가 설계한
‘예술과 과학의 도시’가 있다. 이처럼 발렌시아에서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여행자의 하루를 경험한다.
발렌시아 대성당과 비르헨 광장과 미게레테 종탑을 볼 수 있는 레이나 광장.
발렌시아 대성당과 비르헨 광장과 미게레테 종탑을 볼 수 있는 레이나 광장.
미래의 도시를 연상시키는 스페인 유명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와 펠릭스 칸델라가 설계한 ‘예술과 과학의 도시.
미래의 도시를 연상시키는 스페인 유명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와 펠릭스 칸델라가 설계한 ‘예술과 과학의 도시.
03 에메랄드 빛 지중해를 만나다

이제 도보 거리의 발렌시아 도심에서 벗어나 버스를 탄다. 20분을 달려 내린 정거장에서 한 블록만 걸어 나가면 눈앞에 탁 트인 바다가 펼쳐지고, 지중해를 마주한 야자수가 에메랄드빛 해풍에 한들거린다. 마드리드 동쪽으로, 바르셀로나의 남쪽에 위치한 해안 리조트 지역인 발렌시아는 스페인에서도 여름 휴양지로 인기가 높은 곳이다. 특히 이비자의 클럽을 떠올리게 하는 흥겨운 비치클럽과 해변을 따라 늘어선 유서 깊은 레스토랑, 바, 카페, 라이브 음악클럽 등 나이트 스폿도 다양하다.

발렌시아시를 중심으로 해안가를 따라 북쪽에는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을 촬영했던 고성과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이 들어선 페니스콜라 등이 있는 코스타 델 아사아르(Costa del Azahar) 지역이 자리하고, 남쪽 해안에는 미식으로 이름난 데니아를 비롯해 하비아(Xàbia), 칼페(Calpe), 알테아(Altea), 베니돔(Benidorm) 등 서로 다른 매력을 지닌 휴양 도시들이 연이어 있는 코스타 블랑카(Costa Blanca) 지역이 이어진다.
지중해 전역에서 가장 높은 절벽인 석회 바위산과 바다가 이어져 절경을 이루는 근교 도시 칼페.
지중해 전역에서 가장 높은 절벽인 석회 바위산과 바다가 이어져 절경을 이루는 근교 도시 칼페.
스페인 대표 음식, ‘파에야’의 본고장

하루에 다섯 끼를 먹는 스페인식 식사 중에 가장 배를 든든하게 채우는 점심시간(오후 2~4시)인 세 번째 코미다(Comida) 시간이면 동네 반찬가게에 길게 줄을 선 모습을 볼 수 있다. 큰 팬에 만들어진 파에야(Paella)를 덜어서 사 가기 위해서다. 그리고 온전히 나만을 위해 작은 팬에 조리해주는 전통식 파에야 레스토랑은 예약이 필수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음식인 파에야의 본고장도 발렌시아다. 요리의 주재료인 쌀의 주 생산지가 발렌시아 지방이기 때문이다.
파에야 발렌시아나.
파에야 발렌시아나.
채소, 육류, 해산물 등 무엇을 넣느냐에 따라 여러 종류의 파에야가 있지만, 발렌시아에서는 콩, 녹색채소, 토끼, 달팽이, 닭고기 등을 넣은 전통식인 ‘파에야 발렌시아나ʼ가 가장 인기 있다. 발렌시아의 흔한 일요일 오후 풍경에는 늘 파에야가 중심에 있다. 가족, 친구들과 별장에 모여 닭고기보다 작고 쫄깃한 토끼고기와 긴 콩, 달팽이가 쏙쏙 박혀 있는 파에야 발렌시아나를 나무 숟가락으로 다 같이 퍼서 먹으면서 발렌시아 로컬들의 일상의 일부가 돼 가는 것이다.
스페인 3대 축제이자 발렌시아 전통 축제인 라스 파야스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니놋이라고 불리는 인형 작품들이 거리를 채운 모습.
스페인 3대 축제이자 발렌시아 전통 축제인 라스 파야스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니놋이라고 불리는 인형 작품들이 거리를 채운 모습.
파예라가 바친 꽃으로 단장을 한 성모상을 보기 위해 비르헨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과 발렌시아 전통의상을 입고 라스 파야스 축제 퍼레이드에 참가한 사람들.
파예라가 바친 꽃으로 단장을 한 성모상을 보기 위해 비르헨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과 발렌시아 전통의상을 입고 라스 파야스 축제 퍼레이드에 참가한 사람들.

04 라스파야스, 불의 축제


3월에 발렌시아를 방문한다면 매우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여유로운 도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흥겨운 음악과 폭죽 소리에 혼잡하고 때로는 몰려드는 인파에 정신없는 날들이 이어진다. 바로 발렌시아 지방의 수호성인인 성 요셉의 축일(3월 19일)을 기념해 전통 축제인 ‘라스 파야스’가 매년 3월 15일에서 19일까지 진행되고, 이를 준비하는 행사가 한 달 동안 진행되기 때문이다.
파야스란 고전 라틴어 ‘팍스(fax)’에서 유래한 중세 발렌시아어로, ‘높은 위치에 놓인 횃불’을 뜻한다. 오늘날에는 축제와 축하행사용으로 만든 기념 작품을 가리킨다. 발렌시아 시민들은 이 축제를 위해 기금 모금행사를 진행하며, 1년간 ‘니놋(Ninot) 인형’을 구상하고 만들어 축제 기간에 거리를 채운다. 거리마다 건물보다도 높게 솟은 인형들이 이어져 어느 하나 놓칠세라 계속 걷다 보면 어느 샌가 집을 지나치게 된다.
콘테스트를 통해 오직 1등 작품만 파야스 박물관에 보관하고 나머지는 축제 마지막 날에 불태움으로써 행사를 마무리한다. 원래 이 축제는 봄맞이 대청소를 위해 낡은 집기나 인형 등을 모닥불에 태워 없애는 관행에서 시작됐다. 그러다 18세기부터 전문 목수와 예술 및 건축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모여 니놋을 만드는 현재의 형태로 발전했다.
라스 파야스는 2016년 11월 30일에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됐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모퉁이마다 완성돼 가는 형형색색의 니놋과 고운 빛깔의 전통 옷을 입고 축제에 참여하는 파예라, 파예로들의 모습만 보아도 눈이 즐거운 한 달이 금방 간다.
스페인의 첫 여행은 자연스레 독특한 가우디 건축물, 빨간 드레스를 입은 플라멩코를 추는 여성, 지중해의 아름다운 풍경, 파에야와 타파스와 같이 어디서 들어 봄직한 스페인 음식들이 무엇일까 기대하며 시작됐을 것이다. 그리고 크고 웅장한 성당에 놀라는 것도 잠시, 붐비는 관광객에 치여 지쳐 어디라도 몸을 기대고 싶었던 기억도 함께 떠오를 것이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훌쩍 떠나고 싶을 분들과 빽빽하고 긴 여행 일정은 잠시 접어 두고 스페인 현지인들의 소소한 일상을 직접 체험하면서 삶에서 휴식을 찾는 분들에게 두 번째의 스페인은 발렌시아가 됐으면 한다.

글·사진 구민정 작가·<사적인 가이드북: 두 번째 스페인, 발렌시아> 저자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6호(2019년 03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