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Artist 김윤섭 소장의 바로 이 작가 - 박경률
박경률 작가.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nd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박경률 작가.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nd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한경 머니 =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미술사 박사] 전시장에 온갖 오브제들이 흩뿌려져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다양한 덩어리들의 향연이다. 그나마 벽면에 화려하고 거친 붓 터치로 마무리된 캔버스라도 걸려 있으니 전시 중인가 싶다. 온갖 오브제와 기물들은 캔버스의 이미지와 닮아 있어, 얼핏 그 화면에서 쏟아져 나온 것처럼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백아트 서울(Baik Art Seoul)에서 진행 중인 박경률의 개인전 ‘온 이븐니스(On Evenness)’의 전경이다.

평면회화와 세라믹, 조각 등 색다른 조합의 공간 구성은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제목처럼 ‘균등하고 평등한 것’에 대한 화두를 건네는 듯하다. 박경률의 회화는 온전한 평면회화를 기대한 관객들에게는 당혹감을 선사한다. 그림은 벽에 얌전하게 걸려 있어야 한다는 상식을 보기 좋게 비튼다. 그의 그림은 몇 가지의 오브제가 합류해야 제대로 완성되는 예가 많다. 가령 벽에 기대어 있는 대형 작품을 오렌지 몇 알이 떠받치고 있다든가, 어떤 경우엔 그림에 종이테이프를 아래로 쭉 늘어뜨려 완성하기도 한다. 또한 바닥에 널브러진 소품들을 따라가다 보면 벽에 안착된 그림과 만나기도 한다. 처음엔 낯설고 생경하다. 희한하게도 자꾸 보면 어느새 그 불편함이 싫지 않다. 마치 그림 속 그것들이 나를 맞이하러 앞 다퉈 뛰쳐나온 듯 반갑기까지 하다.

박경률 작가는 2013년 이후 영국 유학 시절을 기점으로 자신의 회화 형식을 적극적으로 실험하고 있다. 특히 최근엔 다양한 공간 연출 방식에 주목한다. 유기적 형태들의 자유로운 배치로 평면 화면에선 충족할 수 없는 생동감의 확장성을 캔버스 주변의 공간적 요소를 활용해 완성해낸다. 이러한 박 작가의 실험 의지는 공간의 특정한 제한성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굴곡진 벽이나 중간 중간의 기둥들, 유리창과 조명 등도 장애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공간의 여백미와 밀도감을 조율하는 훌륭한 조력 담당 역할로 탈바꿈시키곤 한다.

특히 온전한 평면회화, 회화와 공간의 만남, 널찍한 창으로 쏟아진 빛줄기 등 제각각인 요소들의 하모니를 연출해내는 그의 특별한 재능에 자주 놀라게 된다. 전시된 작품들의 시각적 비주얼을 극대화시킨 ‘공간적 회화’는 관객의 동선과 시선을 적극적으로 안배한다.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던 관객은 어김없이 매순간 새로운 작품들을 만나는 기분이다. 큰 회화를 배경으로 보았던 기물들은 몇 발자국만 옮기면 어느새 빈 여백의 벽면에 전혀 색다른 존재감을 드러낸다. 관객들의 작은 움직임이나 시선의 이동마저 놓치지 않는 박 작가의 배려심이 돋보인다. 그 섬세한 교감은 쉽게 잊히지 않는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Revolving Figure, 캔버스에 유채, 250×200Cm, 2017년
Revolving Figure, 캔버스에 유채, 250×200Cm, 2017년
“2017년 런던에서 활동하던 시절 그림 구경을 하러 찾아온 손님이 있었어요. 당시 스튜디오가 테이트브리튼과 가까워 헨리 무어의 조각들을 자주 보았지요. 그중 무어의 조각 형태를 띤 드로잉 작업이 있었는데, 그 손님이 몇 가지 질문을 하고는 어느 순간 풀썩 주저앉아 한참을 소리 없이 울었습니다. 저는 작가 특유의 감수성을 보여주거나 인간 본성의 본질적인 감성(감정)을 회화 위에서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나 헨리 무어의 포개어진 남녀 형상을 연상케 하는 둔한 선과 형상은, 마법처럼 저의 세계관을 무시하고 그의 감성에 맞닿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울림을 주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다른 이에게 작품에 대한 평가를 전해 들었던 에피소드 중에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사연이다. 처음 만난 한 관람객이 보여준 갑작스런 눈물, 그것은 박 작가에겐 뜻밖의 깨달음과 같았다. 평소 ‘그려진 이미지보다 완성해 가는 행위가 더 중요하다’고 믿었던 그에게 그 눈물은 신념에 대한 방증이자 피드백이었다. 아마도 ‘탈위계적인 인지 감각을 유지하는 작가’로 기억되고 싶다는 그의 바람에 한발 더 가깝게 인도된 느낌이었을 것이다.

장르적 접근보다는 ‘회화적인 것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해석해 나가는 데 관심이 많다. 그것을 박 작가는 스스로 ‘조각적 회화’라 불러 왔다. 회화를 조각적으로 혹은 조각을 회화의 영역에 교차시키는 시도는 그의 작품 세계를 좀 더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또한 일련의 이러한 과정이 ‘직관적으로 자연스럽게 진행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그림들 혹은 작품들은 사유될 시간도 없이 인지된 순간 동시에 화면에 투영된 결과들이다. 그렇다고 무의미하게 즉흥적이란 것은 아니다. 순간순간의 감흥과 감정이 퍼즐처럼 맞춰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 듯싶다. 순간적으로 빠르게 그려낸 방식이지만, 그 직관적인 흔적은 철저하게 작가만의 아이덴티티 기반에서 출발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조각적 회화는 회화를 제작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용어인 셈이죠. 이미지의 위치, 구성, 틀과 같이 회화를 이루는 외부적 요소만으로 내러티브를 발생시키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각적 회화’의 본질은, 개별 이미지를 회화 표면 위에 두는 행위와 캔버스에 올린 물감 덩어리(붓질의 흔적)를 개별적인 오브제로 보는 관점이 핵심입니다. 즉, 회화는 어떠한 환영(illusion)을 부르는 공간만이 아니라, 물성이 일어나는 장소로 의미를 갖는다는 점입니다. 이미 완성된 회화조차 전시장에서 다시 한 번 오브제들과의 만남을 통해 전환점이 이뤄지게 됩니다.”

박경률 회화의 가장 큰 매력 중 빼놓을 수 없는 하나는 ‘회화를 보는 사고의 확장을 경험시켜준다’는 점이다. 다양한 조각의 형식과 설치작업이 하나의 회화가 되고, 오브제나 붓질의 효과를 대신한다는 역발상의 창의적인 실험을 보여준다. 그림 자체보다 ‘끊임없는 그리기 과정’에 더욱 애정을 쏟는다. 그래서 박 작가는 작품에 특정한 메시지를 담지 않는다. 다양한 회화적 실험을 반복하면서 작가 스스로 ‘일정한 관념들’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그에겐 작품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관객들이 만나는 생경하면서도 색다른 감흥들이 곧 작품의 메시지인 셈이다.
The Specter, 캔버스에 유채, 182×227Cm, 2019년
The Specter, 캔버스에 유채, 182×227Cm, 2019년
그림을 그리거나 오브제들을 만들 때는 미리 경계를 설정하지 않는다. 창작자나 창작물이 무위적이고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만나기를 희망한다. 그렇지만 개인전처럼 특정한 목적성이 있을 때는 큰 주제의식을 설정해서 공간을 연출한다. 이렇게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설치 방식은 지극히 문학적이고 영화적인 미장센으로 읽히기도 한다. 한동안 그 설치물 속에 서 있어본 이라면 누구나 그것들이 ‘연쇄적으로 이미지가 덧붙여지는 방식’으로 완성됐다는 점을 눈치 채게 된다. 마치 끝말잇기 게임 같다. 첫 단어와 마지막 단어 사이의 모든 단어들이 깊은 관련성은 없으면서도 서로서로 맞물린 고리처럼, 결국에는 한 덩어리로 의외의 재미를 선사하는 끝말잇기 놀이가 완성된다.

박 작가의 작품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 국공립이나 사립미술관과 주요 기업에 많이 소장돼 있다. 지난해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 출품된 작품이 기존 작품 가격의 2배에 가깝게 낙찰돼 주목을 받았다. 작품가는 갤러리와 함께 정하는 편이며, 대략 캔버스 유화 작품 기준 ‘80×80cm 500만 원’에서 ‘145×145cm 1200만 원’ 등으로 형성돼 있다. 백아트 서울의 개인전은 이번 달(5월) 8일까지 진행되며, 오는 8월에는 중국 베이징의 주요 기획전, 내년 6월의 두산갤러리 개인전 이후엔 6개월 동안 두산뉴욕레지던시에 참여할 예정이다.

김윤섭 소장은…
미술평론가로서 명지대 대학원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월간 미술세계 편집팀장, 월간 아트프라이스 편집이사를 역임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및 정부미술은행 작품가격 평가위원, 인천국제공항 문화예술자문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숙명여자대학교 겸임교수, 계간조각 편집장, 2019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 예술감독, 2019 경주국제레지던시아트페스타 전시감독,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 등으로 활동 중이다.


아티스트 박경률은…
1979년생. 홍익대 회화과 학사 및 석사 졸업 후 다양한 전시 활동을 하던 중 2013년도에 영국으로 유학, 2017년 첼시 칼리지 오브 아트 앤드 디자인 석사 졸업 후 국내외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2008년 개인전을 시작으로 꾸준히 바쁘게 활동하면서도 ‘동어반복하고 있지 않은 것’을 작가적 신념으로 삼고 있다. 최근 성과로는 런던 렁리 갤러리 및 서울 백아트의 초대 개인전과 로스앤젤레스(LA), 뉴욕, 상하이, 런던에서의 해외 기획전에 참여했고, 서울문화재단에서 후원하는 디스위켄드룸과 서울로 미디어캔버스 협력전시 ‘픽 유어 픽(Pick Your Pic)’에서 페인팅으로 스크리닝 된 것이다. 또한 2018년 송은미술대전 우수상, 2017년 북서울미술관 ‘도시, 도시인(City and the People)’ 2016년 두산갤러리 ‘보기 위해 눈을 사용한 일(Using the Eye in Order to See)’ 등의 기획전시에 선정되기도 했다. 참여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는 2019~2020 인천아트플랫폼(인천문화재단), 2018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12기(서울시립미술관), 2012 국립고양미술창작스튜디오 8기(국립현대미술관) 등이 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8호(2019년 05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