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이동찬 기자] 미운 4살, 미운 7살. 아니다. 이제는 미운 14살이다. 인생의 과도기적 시기다. 처음으로 교복을 입고, 두발 규제도 당해보고, 시험 성적으로 인한 본격적인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고, 연애의 쓴맛을 미리 겪어보기도 한다. 얼굴에는 뾰루지가 올라오고 2차 성징을 맞이한 몸은 왠지 낯설다. 하지만 어디 인생에서 힘든 시간이 이때뿐이랴. 슬럼프, 역경, 고난. 인생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모든 시련들을 ‘미운 14살’이라는 단어로 함축시키기로 했다. 각 분야에 정통한 이들은 이 미운 14살을 어떻게 헤쳐 나갔을까. 그들을 만나 질문을 던졌다. ‘당신의 14살은 어땠나요?’


[Special] 나의 미운 14살, 슬럼프 극복기 - 1
양재웅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행복해지려면 자신을 표현하고 살아야죠”

‘정신과’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차가운 철제 베드, 온몸이 꽁꽁 묶여 몸부림치는 환자, 감옥처럼 설계된 입원실이 연상되진 않는가. 감기에 걸리면 내과를 방문하고, 뼈가 부러지면 정형외과를 찾게 되건만, 마음이 아프면 선뜻 정신과에 가지 못한다. 자신에게 나약한 인간이라는 오명이 씌워지는 것 같다. ‘힘들다’를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개개인의 나약함을 인정하지 않는 이 시대,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양재웅 W진병원 원장에게 그 해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상담했던 환자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 있나요.
“10년 전쯤 제가 레지던트일 때 만났던 망상증 환자가 기억에 남아요. 그분은 상대방의 모든 행동들이 자신이 영향을 줬다고 착각하는 관계망상을 앓고 있었어요. 동시에 저희들이 표현하기로는, 굉장히 나르시스틱한 분이었어요. 의사에게 반항적이면서 권위를 깔아뭉개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죠. 저보다 한참 어렸는데도, 저를 ‘양재웅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면담을 1년 넘게 진행하고, 나중에 그 환자가 다 망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을 때, 충격과 환희를 동시에 느꼈어요.”

마음이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감정이 이입될 거 같아요.
“감정이입을 심파시(sympathy)라고 하고, 정신의학과 의사들은 엠파시(empathy)를 하도록 배워요. 상대방과 같은 입장이 되기보다는 그 사람과 얘기하고 있는 내가 있고 이 상황을 관찰하고 있는 또 다른 나를 키우는 것이죠. 따라서 환자들의 심리적 아픔이 저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아요. 하지만 치료를 계속하는데 변화가 없거나 에너지를 많이 쏟았는데 자살과 같은 좋지 않은 선택을 하는 분들을 보면 힘들죠.”

자책도 많이 했을 거 같아요.
“예전에는 다 제 잘못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러지 않아요. 저는 신이 아닌 한 인간이잖아요. 이 사람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고 전제를 한 다음 치료를 시작해서 예전만큼 힘든 건 없는 거 같아요. 스트레스를 받고 우울해지거나 화를 내는 등 제 행동에 변화가 생길 때는 잠깐 멈추고, 일도 줄이고, 사람도 덜 만나고, 스스로 재충전을 하는 편이에요.”

원장님에게도 힘든 시절이 있었나요.
“20대가 저에겐 일종의 과도기였어요. 외환위기 때문에 집안 상황도 좋지 않았고, 너무 가고 싶었던 대학에 진학한 것도 아니었고, 공부에 큰 흥미를 느끼지도 못했죠. 경제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들이 얽혀서 방황 아닌 방황을 했던 거 같아요. 원래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는데 그 상황에서 진로를 바꿨다가는 이도 저도 되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나요.
“그냥 버텼어요. 대신 제가 할 수 있는 걸 하면서요. 가끔 수업도 빼먹긴 했지만, 학교는 꾸준히 나갔죠. 그렇게 버티다 보면 인생이 참 재밌게도, 국면이 바뀌더라고요. 상황이 좋아질 거라고 믿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포기를 하고 막 살거나, 목숨을 끊는 등 나쁜 선택을 하는 건 아니죠."

사실 저도 20대에 비슷한 고민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은 적이 있어요. 주변에서 그 사실을 알고 놀라더라고요.
“인식이 많이 개선됐지만, 여전히 정신과를 다닌다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게 현실이에요. 정신과 상담을 받은 사람은 ‘의지가 약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죠. 취업 시 상담 이력이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오해하기도 하고요. 이런 인식 구조를 뜯어 고치려고 하지만 어려움이 많아요. 제가 방송에 출연하는 이유도 물론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기도 하지만, 정신과의 대중화를 원해서예요. 저라는 채널을 통해 정신과 상담이 별거 없다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요즘은 많은 연예인들이 공황장애를 공공연히 밝히면서 인식이 개선되고 있지만 아직 멀었죠.”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것도 이런 인식 구조와 연관이 있는 거 같아요.
“맞아요. 사실 왜 자살을 많이 하냐는 질문은 왜 우울증을 빨리 치료하지 않느냐는 문제로 접근해야 해요. 우리나라에선 ‘우울증이 있어요’라고 얘기하는 거 자체가 힘들어요. 불면증은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데 우울증은 되게 심각한 일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사회 풍토가 가장 큰 문제죠. 그들이 병원에 오는 건 더 힘든 일이고, 약을 처방받는 건 더 어려운 일이에요. 정신과 약을 먹으면 큰일 나는 줄 아니까요. 따라서 이를 수면 위로 올려야 우울증을 치료받고 자살을 예방할 수 있겠죠.”

[Special] 나의 미운 14살, 슬럼프 극복기 - 1
외국에서는 개인 클리닉이 있을 정도로 정신과 상담이 대중적이죠.
“국내에도 상담 시장이 커지고 있어요. 정신과는 주홍글씨가 찍히니까 가기가 꺼려지고, 니즈는 많아지니 심리상담센터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기고 있어요. 문제는 아무나 이 센터를 설립할 수 있다는 거예요. 상담의 질이 균일하지 않다 보니 효과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죠. 이를 해결할 제도적인 방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유럽에서는 정신과에 다니는 것이 ‘힙’하다고 여길 정도인데, 안타깝죠. 우리나라는 개개인의 정신력을 너무 강조하는 것 같아요.”

W진병원은 알코올 중독 치료 전문 병원이기 하죠. 왜 사람들은 힘들면 술이나 마약, 도박 같은 나쁜 것을 찾게 될까요.
“건강이 좋아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악화되는 건 순식간이죠. 뇌도 마찬가지예요. 도파민이 분비되는 보상회로 자체가 순간적인 자극에 발동되거든요. 물론 운동 중독이라는 단어도 쓰는데, 이건 중독이라기보다는 습관의 문제죠. 운동을 함으로써 도파민이나 엔도르핀이 분비되긴 하지만 술이나 마약, 도박을 통해 나오는 양과 비교할 수 없이 달라요. 운동을 하루 이틀 하지 않는다고 발작을 일으키진 않잖아요.”

지금 젊은이들은 N포 세대라고 해서, 연애까지 포기하는 이들도 많아요.
“문화의 변화인 거 같아요. 예전엔 한 대상이 간절하고 애틋했단 말이죠. 소통 방법이 제한적이고, 그런 과정에서 상대방에 대한 심상을 키울 수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발달해서, 누구 한 명을 내 안에서 키울 여력도 없는데 그 한 명마저도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어요. 진심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것이 부담스러운 시대인 거죠. 흥미롭게도 지금 20대들은 실버타운에 들어가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다고 해요. 관계를 지속시키는 거에 대한 부담감이 기저에 깔려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현상인 거죠.”

강연과 방송 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는데, 이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무엇인가요.
“정신과 의사로서 진료만 10년 이상 하다 보니 스스로가 감정의 쓰레기통이 된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결국 사람이 행복하려면 자신을 표현하고 사는 게 필요하더라고요. 물론 정신과 의사가 제 천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면에선 분명히 한계가 있어요. 그 돌파구로, 현재 방송뿐만 아니라 정보기술(IT) 회사에서 이사로 활동하면서 제가 생각한 아이디어들을 생산하고 저를 보여줄 수 있는 활동들을 하고 있어요. 물론 육체적으로 힘들 때가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더 풍요로워짐을 느껴요.”

더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가 있나요. 영화감독에 대한 미련이 아직 있을 거 같아요.
“그렇죠. 일본에 정신과 의사 출신의 영화감독이 있어요. 언젠가는 그분처럼 제가 생각한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요. 여건이 안 되면 투자라도. 투자를 하면서 약간의 개입 정도는 할 수 있겠죠. (웃음) 물론 마음이 맞는 분과 작업해야겠죠. 심리상담센터들의 전반적인 개혁에 참여하고 싶기도 해요. 의사로서 꿈꾸는 궁극적인 목표죠.”

마지막으로, 원장님의 14살은 어땠나요.
“전북 전주에 있다가 경기 분당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했어요. 저는 학원에 다녀본 적이 없는데 친구들은 이미 선행학습을 마친 상태였죠. 당연이 성적이 뒤처질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공부를 하지 않게 되고, 마침 형과 누나가 모두 대학생이어서 저도 대학생처럼 놀았던 기억이 나요. 지금도 어머니께서 참 대단하시다고 느껴지는 게, 그 당시 저만 데리고 다시 전주로 가셨어요. 거기서 첫 시험을 봤는데 공부를 하지 않아도 성적이 잘 나온 거예요. 덕분에 공부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아마 그때 공부를 하지 않았으면 지금의 저는 없었겠죠. 꾸준히 하다 보면 언젠가 빛을 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시기였어요.”


[Special] 나의 미운 14살, 슬럼프 극복기 - 1
김문정 뮤지컬 음악감독
“힘든 시간, 울고 싶을 때 울면서 치유하세요”

<맨 오브 라만차>, <맘마미아>, <레미제라블>, <영웅>, <엘리자벳>. 뮤지컬에 관심 없는 이들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작품들이다. 관객석에서는 보이지 않는 무대 어딘가에서 이 흥행작들의 음악을 전두지휘한 사람이 있다. 바로 뮤지컬 음악감독 김문정이다. 명실상부 국내 최정상 음악감독이자 JTBC <팬텀싱어>에서는 걸크러쉬 심사위원으로 존재감을 뿜어냈던 그가 6월 7일, 8일 자신만의 단독 콘서트 <온리(ONLY)>를 통해 무대 앞으로 나온다. 아담한 체격의 그에게서 이런 폭발적인 에너지가 나오는 비결은 뭘까. 그라면 어떠한 역경도 쿨하게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저런 궁금증을 안고, 직접 찾아가 질문을 던졌다.

첫 단독 콘서트를 한다고요. 어떻게 기획하게 됐나요.
“국내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제가 다작을 한 음악감독이 아닐까 싶어요. 우리나라 음악 뮤지컬의 특성상 브로드웨이처럼 한 공연이 몇 십 년씩 계속되지 않고 단기간으로 반복되는 것이 많잖아요. 작품을 통해서 만났던 좋은 인연들도 있었고 아쉬웠던 부분들도 있었는데 이런 저의 스토리를 한번 펼쳐 놓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다행히도 제가 아이디어를 냈을 때 흔쾌히 도와준다고 했던 스태프와 오케스트라, 게스트들이 있어서 용기를 내게 됐죠.”

뮤지컬 음악감독의 단독 콘서트라.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합니다.
“대부분 기존의 갈라 콘서트를 1차원적으로 기대하실 것 같아요. 하지만 기존의 갈라 콘서트와 다른 점은 저만의 해석을 넣었다는 거죠. 예를 들면, 한 뮤지컬에서 호흡을 맞췄던 배우가 다른 곡을 해도 멋있겠다고 생각했다면 이번 콘서트에서 실현하는 거예요. 제가 아는 아티스트들과 협업하기도 하고요.”

만 18년의 음악감독 경력을 포함해 20년이 넘도록 음악 활동을 하셨죠. 한 분야에 오랫동안 매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뭔가요.
“음악이죠.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종사했다고 하면, 매일 똑같은 일을 한다고 생각할 거 같은데 전 사실 매일 매일이 달라요. 다양한 작품을 하고, 또 매일 다른 관객을 만나고, 다른 걸 도전해보기도 하고요. 물론 반복되는 일정이나 프로세스가 있지만 이는 거듭될수록 숙련되는 것이죠. 제가 좋아하는 일이기에 쉽고, 잘할 수 있고, 삶을 살아가는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음악이 감독님에게 굉장히 특별할 것 같아요.
“음악은 뭐든 것을 다 채워주는 존재예요. 나쁜 상황도 바꿔줄 수 있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마법도 갖고 있어요. 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힘들고 스트레스를 받아 다 내려놓고 싶은 순간이 있었어요. 하지만 든든한 오케스트라 멤버들과 배우들을 보니 이대로 세상이 멈춰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어떤 약 기운 같은 게 돌더라고요. 어쩔 수 없죠. (웃음) 이 순간이 좋아서 계속 하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음악을 단순히 감상자로서 대하는 게 아니라 연구하고 실행해야 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작은 트러블부터 심각한 상황에까지 노출되기 마련인데, 모든 상황들이 합을 이뤄 완성체에 다다랐을 때는 그 어떤 것도 용서돼요. 음악 앞에서는 헛똑똑이인 셈이죠.”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요.
“포기하고 싶었지만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문제가 생겼을 때 접어 버린다면 그전까지 해 왔던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되는 거니까요. 오히려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플랜 A·B·C를 세우죠. 푸념을 늘어놓거나 잘못을 캐내 누군가를 다그치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요. 대안은 늘 열심히 고민하면 생기더라고요.”

오랜 경험 끝에 체득한 방법인 것 같네요.
“저도 처음에는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면 분노를 표출했던 순간도 있었어요. 피트를 예로 들어볼게요. 오케스트라를 위해 무대 아래 구덩이처럼 배치한 공간을 피트라고 하는데, 이곳의 상황은 늘 열악해요. 아무리 연습을 멋지게 해도, 비좁고 먼지가 쌓인 피트를 마주하면 난감할 때가 많아요. 물론 늘 예상은 하지만, 그 상황에서 화를 내는 건 무의미해요. 대신 최대한 공간을 만들고 자리의 각도를 조절해 연주자들의 팔이 서로 부딪히지 않게 배치하는 등 순발력 있게 대처 방안을 생각해야 하죠. 무대를 허물고 피트를 다시 지을 순 없으니까.”

음악감독도 크리에이티브한 능력을 필요로 하죠.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땐 어떻게 하세요.
“생각이 막힐 때는 새로운 것을 경험하려고 해요. 전시 보는 것도 좋아하고, 여기저기 구경하는 여행을 가기도 하고요. 잠깐이었지만 승마와 같은 스포츠를 배우기도 했고요. 원체 가만히 앉아 휴양을 못하는 성격이에요. 작품 해석의 크리에이티브한 능력을 뽑아낼 때는 오리지널로 돌아가요. 뮤지컬의 원작 소설을 혹은 그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한 영화를 보면서 최초 크리에이터의 의도를 파악하는 거죠.”

[Special] 나의 미운 14살, 슬럼프 극복기 - 1
어머니께서 적금을 깨 사주신 피아노 덕분에 피아니스트를 꿈꿨다는 인터뷰가 인상 깊었어요. 피아니스트가 아닌 뮤지컬 분야로 진입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청소년기에는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성행하지 않았는데, 단체로 <아가씨와 건달들>을 보러 간 적이 있었어요. 이 공연이 제게 너무 강렬하게 다가왔어요. 집에 가는 길에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이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사서 그 노래들을 다 외울 정도로요. 마니아가 된 거죠. 그 후에 모든 음악 장르에 매력을 느끼게 됐고, 우연히 뮤지컬의 건반 세션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뮤지컬 음악을 하기로 결심했죠. 1997년부터 지휘와 보컬 레슨을 받고, 심지어 국악도 배우면서 3~4년 동안 음악에 정진했어요. 그러다 보니 운이 좋게도 2001년, 한 뮤지컬의 음악감독으로 참여할 수 있었죠.”

음악감독으로서 데뷔 무대, 많이 떨렸겠어요.
“거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스스로는 준비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언젠간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잘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떨리진 않았어요. 제가 음악감독으로 참여한 첫 공연이 뮤지컬 <둘리>였는데, 당시 영부인이었던 이희호 여사가 소년소녀 가장들, 장애인, 고아원 아이들 등 불우 청소년들을 초청한 공연이기도 했죠.”

첫 무대부터 어마어마한데요.
“영부인이 참석한 자리인 만큼, 보안이 철저했어요. 경비 업체가 입장을 저지해 리허설도 늦은 시간에 시작했고, 그들이 장비를 건드리는 바람에 음향과 조명이 난리가 났죠. 갑자기 공연 3시간 전에는 원곡자가 음악을 쓰지 못하게 하는 사태도 일어났고요. 저작권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긴급히 멜로디를 수정해야 했죠. 그때까지도 사실 긴장은 안 됐거든요. 그런데 로비에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들을 보니, 그때부터 막 떨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아이들의 기대치만큼 우리는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너무 미안한 감정이 들어서요.”

배운 점도 많았을 거 같아요.
“저희가 야심 차게 준비한 장면들이 있었어요. 그중 둘리와 친구들이 길동이에게 쫓겨나서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 노래를 부르며 엄마를 그리워하는 신이 있었는데, 기대만큼 아이들의 반응이 좋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후반부에 둘리가 엄마를 찾는 장면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나왔어요. 그들에게는 부모님이 보고 싶은 건 일상이지만 엄마, 아빠를 찾는 건 소원이었던 거예요. 첫 공연에 정말 많은 걸 배웠어요. 관객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들이 원하는 시각에 맞춰 공연을 풀어줘야 한다는 것도요.”

[Special] 나의 미운 14살, 슬럼프 극복기 - 1
도전하고 싶은 분야가 있나요.

“체계성과 깊이, 밀도에 더 집중하고 싶어요. 우리나라 뮤지컬 오케스트라의 시스템화, 그리고 뮤지컬 연주자들의 처우 개선에도 힘쓰고 싶고, 뮤지컬을 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을 위한 작은 워크숍도 개최하고 싶어요. 개인적으로는 음악도로서 곡을 쓰고 싶죠. 이제 한 걸음 물러나 사색의 시간을 가지며 한두 곡씩 끄적여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조언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사실 그들에게 힘내라고 말하는 건 그들이 맞닥뜨린 상황을 외면하는 거 같고, 버티라고 다그치는 느낌이 들어요. 저도 힘들어봤으니까 알잖아요. 세상이 무너지는데 그 어떤 조언도 들리지 않죠. 저는 힘들면 힘들어도 된다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지나와서 돌이켜보니, 힘든 데 다 이유가 있더라고요. 개인적으로 그 시간이 창작 활동에 도움이 될 때도 있었고, 인간관계가 정리되는 경우도 있었어요. 인생을 수업이라고 봤을 때, 내가 좋아하는 과목도 있고 싫어하는 과목도 있잖아요. ‘언젠간 지나가리라’라는 마음으로, 울고 싶을 때 울면서 스스로를 치유하다 보면 힘든 과목들도 나중에는 값진 것이었음을 알게 될 거예요.”

마지막으로, 감독님의 14살은 어땠나요.
“염불을 외우고 있었어요. (웃음) 불교 재단의 여중을 갔거든요. 뭐든 것이 새롭고 받아들이기 급급했던 시기였어요. 과목마다 선생님이 달랐던 것도 신기했고, 교실을 찾아다니는 것도 특이했어요.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처음 핸드벨을 접해서, 악기에 대한 욕심이 커졌던 시기이기도 해요.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아마 14살이 가장 큰 변화를 맞이하는 시기가 아닐까요.”


사진 서범세·이승재 기자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9호(2019년 06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