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원 빈트갤러리 대표

“나무에 입혀진 세월, 편안함이 좋았죠”

[한경 머니 = 문혜원 객원기자 | 사진 이승재 기자]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삶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발자취를 쫓아 보면 덕후 같은 기질이 있음을 알게 된다. 한경 머니는 덕후 같은 수집가들을 만나 그들의 수집 이야기와 노하우를 들어 보고자 한다. 그 첫 주인공은 빈티지 가구 수집가인 박혜원 빈트갤러리 대표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작은 건물. 성수동 거리가 그렇듯, 그저 무심히 지나칠 법한 낡고 오래된 건물에 박혜원 대표의 빈트갤러리가 숨겨져 있다. 정말 숨겨져 있다는 말이 어쩌면 맞을 터. 떠들썩한 간판도, 네온사인도 없이 아는 사람만 조용히 오가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곳이 보물섬 같은 곳이다. 요즘 핫한 피에르 잔느레의 오리지널 피스를 비롯해 이름만 들어도 ‘아‘ 하고 무릎을 칠 만한 빈티지 가구들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피에르 잔느레 등 희귀 빈티지 120여 점 수집


“개인적으로 피에르 잔느레의 가구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고 자부해요. 의자는 물론 책상, 책장, 파티션 등만 해도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니까요.”


박 대표는 13년 전부터 피에르 잔느레의 가구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미 국내에서는 가수 태양이 사용하는 가구로 잘 알려진 피에르 잔느레의 가구는 의자 1점에 수천만 원을 호가한다. 그는 가구를 수집한 23년의 세월 중 절반 이상 시간이 피에르 잔느레와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피에르 잔느레의 가구가 현재 재생산되지 않는다는 점과 인도의 공공 프로젝트에 사용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박 대표는 “피에르 잔느레는 건축과 디자인을 특권층에 국한시키지 않고 사람들의 삶의 기준을 향상시킴으로써 20세기 디자인의 경계를 확장시킨 데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피에르 잔느레는 사촌형인 건축계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의 부탁으로 인도 펀잡주 찬디가르 지역 공공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 그는 건축 외에 인도인의 기후와 생활에 맞게 공공시설은 물론 개인들이 사용할 가구를 제작했는데, 이것이 현대에 와서 그 가치가 재평가되고 있다.


그는 피에르 잔느레 가구를 비롯해 의미 있는 빈티지 가구 작품만 추려도 120여 점 소장하고 있다. 가지고 있는 제품을 판매도 하지만 그게 주는 아니다. 팔리지 않는 가구더라도 컬렉션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꼭 구매해 소장한다. 이런 제품들은 그가 여는 전시회에서 이야깃거리를 던진다. 꼭 팔릴 만한 작품만 사 모았다가 가치가 뛰면 파는 장사꾼과는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이쯤 일을 해 보면 어떤 게 팔릴지, 어떤 게 팔리지 않는지는 감이 오죠. 희귀성과 희소성을 따져야 하고, 디자인적으로도 아름다운 작품을 골라야 하죠. 하지만 팔겠다는 생각보다는 포트폴리오를 채워 간다는 생각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캥거루체어. 피에르 잔느레가 수유부를 위해 고안한 캥거루체어는 전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제품이다. 등받이가 바닥과 직각을 이루는 것이 아닌 뒤로 자연스럽게 몸을 젖혔을 때 더욱 편한 이 의자는 아이 엄마가 아기를 위해 수유를 할 때 편안하도록 고안된 제품이었다.


그는 피에르 잔느레의 피스를 찾고 연구하기 위해 인도 펀잡주 찬디가르만 수차례 다녔다. 한여름 폭염의 한국을 떠나 더 푹푹 찌는 날씨의 인도 기후를 경험해 보면 피에르 잔느레 가구의 진가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것. 덥고 습한 날씨 속에서 목재가 부식되기 쉬운데 여전히 견고하게 남아 있는 것은 피에르 잔느레가 목재를 잘 고른 덕이 크다. 단단한 로즈우드는 벌레가 꼬일 틈이 없다. 습한 기후 속 통풍까지 고려한 케인 줄기로 짠 등받이와 좌판은 피에르 잔느레 가구의 미덕으로 통한다.


“2019년에만 전시를 위해서 인도 찬디가르에 2번이나 다녀왔어요. 다 아는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경험하고 느끼는 것은 매번 다르기 때문이죠.”


그렇게 모은 가구들은 그의 전시 기획에 따라 새롭게 해석되고 재창조된다. 그런 과정 끝에 2019년에는 가구회사인 까시나와 협력해 ‘르 코르뷔지에가 질투한 디자이너전’이란 전시회를 열었다. 벌써 그가 연 다섯 번째 전시였다. 잔느레와 사촌형이자 위대한 건축가인 르 코르뷔지에, 가구 제작자인 샬롯 페리앙 3명의 이야기가 담긴 전시다. 하루에 한두 차례, 10명 안팎의 소규모 인원만 초청해 진행되는 이 전시는 박 대표의 전시 큐레이션으로 이야기의 깊이를 더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빈트갤러리의 전시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입소문이 나 포털사이트에서 전시 부문 상위에 노출되기도 했다. 메이저 미술관이 아닌 개인 갤러리가 연 전시로서는 대단한 쾌거다.


그가 수집한 가구들은 컨디션에 따라 전문가의 손을 거쳐 적절하게 재탄생되기도 한다. 케인을 재조립한다든가, 가구에 새로운 가죽을 입히는 등 그만의 노하우가 재컨디셔닝에도 오롯이 담겨 있다.


“목재는 영원할 수는 없어요. 수십 년 가구를 모아 오다 보니 부식되거나 가치가 없어지는 경우도 있죠. 그럼에도 이 일이 좋아요. 나무에 세월이 입혀질 때만큼 아름다운 게 없거든요.”
그는 최근에는 조지 나카시마의 가구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다. 목재가 주는 묵직한 영감은 일본계 미국 디자이너인 조지 나카시마의 가구에서도 진하게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적산가옥 출신 ‘나무성애자’

“나무에 입혀진 세월, 편안함이 좋았죠”
박 대표는 노바티스사의 자회사인 시바비전의 한국지사장으로 일했다. 해외 경험이 많은 그는 미국에서 파견근무를 할 당시부터 빈티지 가구를 조금씩 사 모으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시작했으니 20년 이상 모아 온 가구는 어느덧 더 큰 공간을 원했다.


“마치 첫 가구를 고르듯이 미국에서 가구를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어요. 새 가구는 어쩐지 싫었어요. 새 차를 산 후 눈비 맞히기 아쉬워하며 전전긍긍하다가 긁히고 난 후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치랄까요? 빈티지 가구가 주는 편안함이 좋았죠.”


그러던 차에 생각보다 빨리 은퇴가 찾아왔다. 그는 빈티지 가구 전시장을 여는 게 운명과 같다고 여겼다.


“저는 자칭 나무성애자예요. 제가 적산가옥 출신이거든요. 예전 일제강점기에 지어졌던 적산가옥은 대부분이 나무집들이잖아요. 거기서 나무의 온기를 느끼고 나무 냄새를 맡으며 자라서 그런 것 같아요.” (웃음)


창고를 가득 메울 만큼 가구를 모았을 때 그는 가구의 컨디셔닝도 생각해야 했기에 더 큰 공간이 필요했다. 특히나 창고에만 넣어 두고 혼자만 즐기는 것이 아닌 좀 더 많은 사람에게 빈티지 가구를 알리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그래서 이름을 ‘마켓’이 아닌 ‘갤러리’로 지은 것이다.


“1년에 2번씩 전시를 하겠다고 생각하고 갤러리를 오픈했어요. 저는 스스로를 딜러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제가 가구 수집을 위해 공부하고 느낀 것들을 전시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전시회를 기획하고 준비하려면 6개월이 걸리는 만큼 품도 많이 들지만 제가 노력을 쏟아야 하는 일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박 대표는 올해도 새 전시를 준비 중이다. 전시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은 힘들고 고되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설레는 일이다.


“2019년 피에르 잔느레 작품을 더 모으기 위해 프랑스 출장을 다녀왔어요. 거기서 또 아주 희귀한 제품을 발굴해 왔죠. 피에르 잔느레의 케인 소파 등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이에요. 새로운 전시는 여전히 까다롭지만 또 일을 시작해야겠죠.”(웃음)


빈티지 가구, 어떤 것을 컬렉션할까?

빈티지 가구가 전에 없는 인기를 끌고 있다. 리빙 시장이 커진 만큼 수요도 고급스러워지기 때문이다. 박혜원 빈트갤러리 대표에게서 빈티지 가구를 잘 고르는 노하우를 들어 봤다.


1. 디자이너가 누구인가
빈티지 가구의 가치를 높이려면 디자이너를 먼저 봐야 함은 기본이다. 특히 디자이너가 어떤 역사성과 대표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이는 제품의 희소성과도 연결된다.


2. 희소성이 있는 제품인가
계속 생산되는지 여부도 중요하다. 빈티지 가구 중에서도 현재 재생산되는 가구들은 그 당시와 차이가 있더라도 아무래도 가치가 떨어진다. 특히 나무 자체도 당시에는 로즈우드나 최고급 티크로 제작했다면 현재는 그런 질 좋은 나무를 구할 수 없는 상태다.

재생산의 문제도 생각해 봐야 한다. 르 코르뷔지에를 예를 들면 엘시(LC) 라인은 현재도 계속 생산 중이다. 아무리 초기 디자인이라고 해도 굉장히 많이 생산이 되고 지금도 언제든지 그걸 살 수 있기 때문에 제품을 소유하지 못할 것에 대한 조바심이 나지 않는다. 르 코르뷔지에의 작품이 역사성과 대표성이 있더라도 희소성이 떨어지는 이유다.
박 대표가 주로 컬렉션하는 제품은 피에르 잔느레와 조지 나카시마의 작품이다. 피에르 잔느레의 작품은 아직까지 모조품은 많지만 오리지널 제품을 재생산하고 있지 않다. 조지 나카시마는 딸인 미라 나카시마가 제품을 다시 생산하고 있다. 물론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관리가 철저하다. 조지 나카시마가 제작한 것과 미라 나카시마가 제작한 제품을 정확하게 구분하고 있고 그 관리를 굉장히 철저히 하고 있다. 소비자가 주문한 리스트를 가지고 있어서 구입 연도와 이름만 말하면 언제든지 구입에 대한 기록을 받을 수 있다. 어떤 이들의 손을 거쳐 갔는지 알 수 있기에 관리가 보다 철저하다.


3. 시대성이 있되 너무 트렌드에서 멀어지지 않기
결국은 디자인 자체란 얘기다. 트렌드에서 떨어진 구식 디자인은 오래도록 사랑받기 어렵다. 따라서 가치가 지속되는 것들을 찾아야 한다. 왜 그렇게 그 디자이너의 작품이 당시에 각광을 받았나를 떠올려 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박 대표가 조지 나카시마의 작품에 열광하는 것도, 기능도 기능이지만 작품이 예술 그 자체의 영역에 미치기 때문이다. 시적인 느낌으로 표현한 조지 나카시마의 작품은 다른 사람의 작품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6호(2020년 0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