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노트]디지털 과식
[한경 머니= 한용섭 편집장]부끄러운 고백을 해봅니다. 사실 저는 중학생 딸의 휴대전화 전화번호를 외우지 못합니다. 더 솔직히는 아내의 휴대전화 번호도 헷갈릴 때가 많죠.

저랑 비슷한 사람들이 더러 있나 봅니다. 잘 알고 지내는 은행원 한 분이 그러더군요. 그 정도면 약과라고. 스마트폰을 잃어버렸던 적이 있는데 15년 동안 같이 일했던 아주 친한 사무실 동료의 전화번호를 몰라 난감했답니다. 심지어 전날 저녁에 함께 술을 마시며 사진까지 찍어 공유한 끈끈한(?) 직장동료였는데도 말이죠.

스마트폰만 열면 수많은 사람들의 번호와 추억이 저장돼 있지만 그 디지털 기기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머릿속에서 겨우 이름 서너 개만을 끄집어낼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 수많은 인맥을 자랑하고, 매일 그들에게 화려한 이모티콘과 ‘좋아요’를 남발하지만 어쩔 때는 그것이 허무한 디지털 족쇄일 뿐이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가족들과 여행을 하거나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슬금슬금 손은 스마트폰을 더듬거립니다. 가족들 옆에 머물러 있긴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스마트폰 화면 속 불특정 군중들의 메시지를 읽고 있을 때도 많죠. 과유불급(過猶不及), 정도를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고 하는데 어느새 저는 헛배만 부르는 ‘디지털 과식’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한경 머니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적 삶의 균형점을 제시하기 위해 준비한 8월호 빅 스토리
‘디지털 행복 밸런스’에서 디지털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만들어 가기 위한 다양한 조언을 담았습니다. 기사에는 김정운 문화심리학 박사가 그의 책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중년 남자들이 마음을 달랠 곳도 없고, 애정을 줄 곳이 없어서 스마트폰을 대신 만지작거리는 것이다”라고 지적한 부분을 전하며, 스마트폰이 실제 인간관계를 대신해 아쉬운 대로 ‘연결성’의 대리만족을 할 수 있는 도구가 됐지만 배우자나 친구와 대화를 하거나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앉아 있는 것’에 다시 익숙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디지털 미니멀리즘>의 저자인 칼 뉴포트는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 중독 탓에 직장 밖에서 시간을 보낼 때조차 의미 있는 시간과 만족을 얻기 힘들다고 토로했다”고 합니다. 실제 스마트폰에 대한 높은 의존도는 기억력 감퇴와 창의력 후퇴는 물론 스마트폰 블루라이트, 디지털 격리 증후군, 강력한 자극에만 뇌가 반응하는 팝콘브레인, 거북목 증후군, 스트레스 증후군 등 다양한 형태의 정신적·신체적 장애를 초래한다고 하네요.

물론 스마트폰이나 각종 디지털 기기가 바꾼 혁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지나친 ‘디지털 과의존’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러한 이유로 디지털 역시 간헐적 단식을 시도해도 좋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가끔은 스마트폰 화면에서 눈을 떼 가족의 눈동자를 쳐다보고, 주변 지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디지털 과식을 막는 행복의 지혜가 될 테니까요.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1호(2019년 08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