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동 고시촌’의 어제와 오늘
‘신림동 고시촌’은 청춘들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전국의 고시생이 꿈을 위해 젊음의 낭만을 뒤로 한 채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로스쿨이 도입되고 2017년 사법시험 폐지를 앞둔 지금 ‘신림동 고시촌’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값싼 주거지를 찾아 흘러든 20대와 함께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신림동 고시촌’의 과거를 찾아서
오는 11월 8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진행되는 ‘신림동 청춘-고시촌의 일상’ 전시회는 ‘신림동 고시촌’의 변천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신림동 고시촌의 과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1960년대 신림동=사진 제공 서울역사박물관
집성촌에서 철거민마을로
관악산 자락인 이곳은 나무가 무성해 ‘신림(新林)’이라 불렸다. 이 일대에는 여러 집성촌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60년대 서울시는 도시개발을 위해 도심의 무허가주택에 살던 사람들 중 일부를 신림동 일대로 이주시켰다. 그 후 해방촌·청계천·이촌동·공덕동, 그리고 한강 주변 등에서 떠나온 철거민들의 삶의 터전이 됐다.
1970년대 서울대 관악 캠퍼스 전경=사진 제공 서울역사박물관
서울대 관악 캠퍼스와 신림동
1975년, 서울 동숭동에 있던 서울대가 신림동으로 이전하면서 신림동은 ‘빈민촌’이 아닌 ‘대학동네’로 변모했다. 1980년대 서울대에는 관악세대라고 불리는 학생운동가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독재정권 퇴진과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신군부 집권에 반대하는 집회와 시위가 학교 정문과 신림동 일대에서 끊임없이 벌어졌다.
1980년대 녹두거리에서 열린 자주관악제=사진제공 서울역사박물관
고시촌 전성기
1980년대 말 고시학원이 등장하고, 사법고시를 통해 법조인을 대거 선발하던 1990년대가 되자 전국의 고시생이 신림동으로 모여들면서 신림동 고시촌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1991년 신림9동(현 대학동)의 고시생은 5000여 명에 달했다. 1992년에는 여성 전용 고시원도 생겨났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고시생이 증가하면서 1998년 고시촌 상주인구는 2만 명을 넘어섰다. 주민의 절반 이상이 고시생이었던 셈이다. 고시생을 대상으로 한 독서실·식당·헌책방·복사집 등 고시 관련 업종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신림동 고시촌은 고시에 특성화된 공간이 됐다.
지금의 신림동
2008년 로스쿨 제도 도입, 2017년 사법시험 폐지 등으로 인해 많은 고시생이 신림동을 떠났다. 이들을 기반으로 했던 다양한 시설도 폐업하거나 규모를 축소했다. 과거 민주화운동의 메카였던 고시촌 인근 번화가 ‘녹두거리’에는 여느 대학가와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식당과 술집, 바 등 각종 유흥시설이 즐비하다.
현재 녹두거리
15년째 녹두거리에서 고시생들의 끼니를 책임져온 ‘장우동’ 사장은 “예전에는 지방에서 상경한 고시생도 많았는데, 요즘엔 그런 사람은 거의 없다. 로스쿨이 생기고 나서 원래 있던 고시생도 많이 나갔다”고 말했다. 신림동 토킹 바 종업원 A씨도 “손님들이 ‘말이 고시촌이지 이제 고시촌 같지 않다’고 한다. 지금 이 골목에는 토킹 바가 스무 곳 정도는 될 것”이라고 전했다.
청춘들의 보금자리로
고시생이 떠난 빈자리는 국가고시준비생·취업준비생·외국인유학생·직장인·저임금노동자·기초생활대상자 등 다양한 ‘1인가구’가 채우고 있다. 저렴한 집세와 생활물가 때문이다. 서울 관악구는 전국에서 ‘1인가구’ 비율이 가장 높다. 그 중 신림동은 25~34세 청년층이 특히 많이 거주한다. 아직 남아 있는 고시준비생과 불안정한 고용, 실업, 학업, 취업준비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많은 청년이 이곳에 모여 산다.
고시촌에서 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신림동
최근 신림동에서는 공동화하는 고시촌을 활성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문화사업이 진행 중이다. 관악구 문화체육과는 2013년 9월부터 ‘스토리텔링 작가클럽하우스’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빈방을 전문작가들에게 창작공간으로 제공해 지식마을로 육성하기 위해서다. 현재 원룸 10실을 운영한다. 입주를 희망하는 작가들의 신청을 받아 심사를 거쳐 창작공간을 제공한다. 입주자에게는 원룸 1실에 월세 20만 원을 지원한다. 1년 단위로 계약하지만, 계약 만료 전에도 퇴실할 수 있다.
'제1회 고시촌 단편영화제=사진 제공 관악구 문화체육과
이외에도 입주작가가 참여하는 주민참여형 ‘극단 고시촌’ 운영, 지역주민 대상 영상문화 강좌 등 주민들의 문화생활 기회도 확대하고 있다. 지난 8월에는 ‘제1회 고시촌 단편영화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쉐어어스' 건물 외관
공실률이 높아져가는 신림동 일대 고시원의 변화를 모색하는 움직임도 한창이다. 노후 주거환경 재생사업과 소외계층 주거지원사업을 하는 선랩(SUNLAB)이 이에 동참했다. 선랩은 신림동 고시촌 내 ‘에벤에셀고시원’을 장기임대해 공유 주거공간 및 커뮤니티 공간인 ‘쉐어어스(SHARE-US)'를 만들었다.
'쉐어어스' 공유 주거공간
‘쉐어어스’는 공유 주거공간과 커뮤니티 공간으로 나뉜다. 공유 주거공간은 화장실·샤워실·거실·공부방·부엌·발코니 등을 공유하는 ‘유닛(UNIT)’으로 이뤄진다. 총 19실의 1+1인, 2인, 3인, 6인 등 4가지 유닛 중 선택할 수 있다. 입주기간은 6개월 단위다. 주거공간에는 현재 10명의 대학생이 입주해 있다.
오는 11월 오픈 예정인 6개의 커뮤니티 공간은 입주자뿐 아니라 지역주민도 함께 이용할 수 있다. 다양한 방식의 커뮤니티 공간은 유료로 운영된다. 1층은 공유 부엌과 오픈 카페, 학습·작업공간, 지역정보 및 생활 서비스(택배 수취, 공구 대여, 비상약 공급 등)를 제공하는 공간으로 구성된다. 2~4층에는 1인가구를 위한 다양한 형태의 모임공간과 미디어 공간이 들어선다. 내년에는 야외활동과 이벤트가 가능한 옥상정원을 조성해 입주자와 지역주민에게 편의를 제공할 계획이다.
글 강진주 인턴기자│사진 이승재 기자·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온라인에디터 jobnj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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