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프로그래머

세계를 누비며 재밌는 영화를 마음껏 볼 수 있다면? 좋은 영화를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다면? ‘영화제 프로그래머’는 문화 기획 분야로 진출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워너비’ 직업 중 하나다.

그러나 좋은 작품을 찾기 위해 하루 대여섯 편의 영화를 봐야 하는 고충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한 작품을 놓고 벌이는 영화제 간의 치열한 신경전도 드러나지 않은 어려움이다.

진짜 ‘영화제 프로그래머’의 세계는 어떨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활동하는 전진수 프로그래머의 삶을 들여다봤다.
[멘토에게 듣는 직업 세계] “‘이 영화다’ 싶은 순간, 기획자로서 희열 느끼죠”
“영화를 얼마나 보냐고요? 셀 수도 없죠. 한 달 동안 최소 150편은 봤을 겁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는 전진수 씨는 올해로 6년째 좋은 음악 영화를 찾는 여정 중이다. ‘원스’ ‘카핑 베토벤’ ‘솔로이스트’ ‘로큰롤 인생’ 등 국내 영화 팬들에게 호평을 얻은 작품들은 모두 그가 몸담고 있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를 통해 이름을 알렸다.

“영화제 프로그래머에게 필수적으로 필요한 자질은 좋은 영화를 골라낼 수 있는 ‘감’입니다. 이 능력이 없다면 프로그래머 일이 힘들게 느껴질 겁니다. 이것은 영화 이론을 공부한다고 키워지는 게 아니죠. 일단 영화를 많이 보고 많이 느끼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는 감독이었던 고모부의 영향으로 영화와 친숙한 환경에서 자랐다(‘바보들의 행진’을 만든 하길종 영화감독이 그의 고모부다). 대학 졸업 후 영상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도 동기들 중 가장 영화를 많이 보기로 유명한 영화광이었다.

“태어나서부터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적어도 2000편 넘는 영화를 봤다”는 것이 그의 말. “그 당시엔 상영 금지된 영화도 많았고, 비디오테이프도 흔하지 않을 때였는데 단순히 영화가 좋아서 열심히 구해서 봤죠. 그때의 열정이 지금 영화제 일을 하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축제기획자의 삶은 ‘축제’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는 영화제 결산을 마치면 바로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다. 매년 10월 벨기에 겐트 지역에서 열리는 음악 영화제를 시작으로, 스페인 바르셀로나 음악다큐 영화제를 거쳐 이듬해 베를린 영화제와 칸 영화제까지 방문한다.

“해외 영화제와 필름 마켓을 돌아다니며 우리나라에 소개할 만한 좋은 영화가 있는지 찾습니다. 이 시간은 오롯이 내년 영화제를 구상하는 데 쓰입니다.”

영화제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해외 영화제 프로그래머부터 영화배급업자, 감독까지 다양하다. 영화제에 초청할 감독, 배우 등 해외 인사를 섭외하는 것 또한 프로그래머의 역량이 미치는 분야다. “자유롭게 의사소통할 수 있는 어학 능력이 필수”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해외 곳곳을 돌아다니며 이듬해 열릴 영화제의 큰 그림을 그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6개월 남짓. 좋은 영화를 섭외하기 위해서라면 발품 파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필름 마켓에서는 하루에 5~6편의 영화를 연달아 보기도 한다.

그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는 음악 영화라는 특색이 있기 때문에 경쟁이 덜한 편이지만 좋은 영화를 서로 가져가려고 다른 영화제와 신경전을 벌이는 일도 많다”는 말로 치열한 프로그래머의 세계를 드러냈다.

좋은 영화를 발굴하는 기쁨
[멘토에게 듣는 직업 세계] “‘이 영화다’ 싶은 순간, 기획자로서 희열 느끼죠”
아무리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수백 편의 영화를 봐야 한다면 지겹지 않을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 영화제 상영작 중 ‘원스 인 마이 라이프(For Once in My Life)’라는 영화는 지체장애아들을 모아 밴드를 만드는 이야기인데요, 아주 재밌고 감동적입니다.

영화제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 작품처럼 ‘바로 이 영화다!’ 하고 느낌이 오는 영화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짜릿한 희열을 느끼죠.”

영화제를 두세 달 앞둔 시기는 본격적인 영화제 준비로 사무국이 가장 분주하게 움직이는 때다. 이 시기에 초청작과 출품작들을 살피며 회의를 통해 전체 영화제 프로그램을 결정한다. ‘관객에게 좋은 영화를 소개하겠다’는 일념으로 음악 영화의 특성을 담고 있는지뿐 아니라 영화 자체의 만듦새도 꼼꼼히 따진다.

그는 영화제가 하나의 문화 축제로 자리 잡아가는 추세를 언급하며 “영화제 기획 일에 대한 수요는 계속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프로그래머라는 하나의 직업만 고집하기보다 영화제 기획 업무를 전반적으로 생각하고 준비하라”는 현실적인 조언을 덧붙였다.

“프로그래머가 되는 데 공식적인 루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무국에서 자원활동가로 시작하는 경우도 있고, 평론 공모전에 당선돼 영화평론가로 활동하다가 프로그래머가 되기도 합니다. 영상 대학원에 진학해 영화 계통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도 도움이 될 겁니다.”

인맥을 쌓아가는 한편 꾸준히 영화를 보며 좋은 영화를 고르는 감각과 판단력을 키울 것을 강조했다. “‘프로그래머가 되려면 영화를 몇 편 이상 보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열정을 바쳐 좋아할 수 있는 분야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취향을 애호가 수준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수단을 찾아야 합니다. 책이 될 수도 있고 사회에 진출한 선배가 될 수도 있겠죠.”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호기심을 잊지 말 것도 당부했다. 영화를 접하는 플랫폼은 다양해지지만 오히려 관객의 선택권은 줄어드는 현실 속에서 중요한 것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좋은 영화를 관객에게 알리겠다”는 프로그래머의 소명의식이라고 강조했다.

“트렌드를 좇기보다 다양한 영화를 존중할 수 있는 열린 마음, 영화에 대한 멈추지 않는 호기심을 유지하는 것이 영화제 프로그래머에게 꼭 필요한 자질입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JIMFF)는?

지난 2005년 시작된 아시아 유일의 음악 영화제다. 특성화된 장르인 음악 영화 100여 편과 30여 회 공연이 함께 열리는 것이 특징이다. ‘스윙걸즈(Swing Girls)’ ‘원스(Once)’ ‘로큰롤 인생’처럼 마니아층의 두터운 사랑을 받은 음악 영화를 발굴하며 대중에게 이름을 알려왔다.

7회째를 맞는 올해는 8월 11일부터 16일까지 청풍호반무대와 제천 시내, 의림지 등에서 101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50여개 팀의 음악 공연도 열릴 예정이다.
20100812/제6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개막식/청풍호반무대/PHOTOLUDENS
20100812/제6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개막식/청풍호반무대/PHOTOLUDENS
영화제 프로그래머에 대해 궁금한 점 몇 가지

▶ 영화제 프로그래머란?

영화제 ‘소프트웨어’를 기획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하는 사람. 주업무는 해외 영화제에 참가해 영화제 성격에 맞는 작품을 고르고 판권자를 섭외하는 것이다. 출품작들을 평가해 영화제 상영작을 결정하는 것 역시 프로그래머의 일이다.

그렇게 모은 영화들을 큰 틀에 따라 프로그램으로 구성하고 감독과의 대화, 강연, 세미나 등을 기획한다. 그 밖에 브로슈어에 영화에 대한 소개 글을 작성하고 이벤트를 진행하기도 한다.

▶ 채용 방식은?

영화제 프로그래머는 그 역사가 짧은 만큼 영화 관계자의 추천으로 일하게 되는 특채 방식이 많다. 최근에는 공개적으로 채용하기도 하지만 수요가 많지 않다. 영상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영화제 현장에서 자원봉사 활동, 스태프 활동을 통해 경험을 쌓으며 인맥을 다지는 것이 도움이 된다.

▶ 도움되는 전공 및 어학 능력은?

특별히 정해진 전공이나 자격은 없다. 단, 수많은 영화를 보고 양질의 작품을 골라낼 수 있어야 하므로 영화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쌓을 필요가 있다. 각종 해외 영화제에 참여해 관계자들을 만나는 일이 많으므로 외국어 회화 능력도 필요하다.

전진수

제천국제음악영화제 프로그래머
1992~1994년 삼성영상사업단 음반 프로듀서
1994~2000년 프랑스 파리 8대학 영화학 석사(다큐멘터리 이론 전공)
2005년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2006년~현재 제천국제음악영화제 프로그래머


글 김보람 기자 bramvo@hankyung.com
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