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현해탄 너머 일본 오사카에서 한국 야구사에 큰 획을 그을 아이가 태어났다. 그 이름은 장명부. 그 당시 여느 재일조선인들처럼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 아이는 야구만이 궁핍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유일한 수단임을 깨닫고 공을 던지고 또 던졌다.
[Milestone] 불꽃과도 같았던 삶, 슈퍼스타 장명부
그리고 일본 야구 명가인 요미우리 자이언츠, 난카이 호크스, 히로시마 카프를 거치며 세계 정상의 일본 프로야구에서 91승 84패(13시즌)를 거두는 중견급 투수로 성장했다. 1983년, 그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출범 2년차인 한국 프로야구에서 다시금 꿈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100,00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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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길을 필요로 한 팀은 프로 출범 첫해인 1982년 전·후기 도합 15승 65패를 기록, 최약체로 꼽히던 삼미 슈퍼스타즈였다. 장명부는 계약금 1억, 연봉 5000만 원(추정)을 받고 입단했는데, 당대 최고 투수였던 OB 베어스 박철순의 연봉이 2400만 원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실로 엄청난 대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문제는 계약금이나 연봉이 아니었다. 입단 기자회견에서 장명부가 “20승은 기본, 30승이 목표”라고 발언한 것을 두고 허형 삼미 사장이 “30승 달성 시 보너스로 1억 원을 준다”고 농담조로 얘기한 것.

당시 1억 원이면 서울의 웬만한 아파트 4, 5채는 살 수 있는 돈이다. 허 사장의 이 한마디는 장명부의 투지를 불태움과 동시에 한국 야구계의 전무후무한 기록을 낳게 했다.


30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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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로고는 야구 배트를 든 슈퍼맨이었다. 1983년 장명부는 바로 그 슈퍼맨 자체였다. 한 시즌 100경기가 열리던 당시 그는 60게임에 등판했고 36번 완투했으며, 이 중 26번 완투승(완봉승 5회 포함)을 거뒀다.

그가 소화한 이닝 수는 가히 초인적인 427 1/3이닝. 이렇게 많이 던지고도 방어율은 리그 2위인 2.34였다.

그런 그에게 팬들은 ‘너구리’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상대 타자의 머리를 향해 심심치 않게 빈볼을 던지고 놀란 타자를 보며 실실 웃는 모습이 마치 너구리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구리는 그 해 기어코 단일 시즌 30승을 달성했다. 그를 슈퍼맨으로 만들었던 ‘보너스 1억 원’도 손에 들어오는 듯했다.

인간이 아니었던 장명부의 1983년 성적

30승 16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2.34 완투36회(완봉 5회) 탈삼진 220개 투구 이닝 427 1/3


25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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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보너스 1억 원 요구에 대한 구단의 대답은 “정식 계약이 아니었으므로 줄 수 없다”였다. 애당초 허 사장이 농담조로 했던 말이기도 하고, 구단 사정이 넉넉하지 못해 1억 원이라는 큰돈을 그에게 쥐어주기도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적당히 5000만 원을 받는 선에서 마무리됐지만 이는 장명부의 야구 열정을 꺾는 단초가 됐다. 전년도의 혹사와 사라진 열정은 1984년 시즌 13승 20패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지긋지긋하게도 해결되지 않은 계약 탓에 동계 훈련을 등한시했던 1985년에는 한국 야구 역대 최다 패인 25패(11승)를 기록하기도 했다.

한 시즌 30승을 거두며 단일 시즌 역대 최다 승리를 거둔 선수가 단일 시즌 역대 최다 패배인 25패를 기록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2년이었다. 1986년, 퇴물이 돼버린 장명부는 빙그레 이글스에서 재기를 다짐하지만 1승 18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내며 은퇴했다.

그리고 1991년 마약 상습 복용 혐의로 구속, 한국 야구계에서 제명되며 일본으로 돌아갔다. 화려하게 등장했다가 쓸쓸하게 퇴장한 장명부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2005년 4월 일본 와카야마현의 자신이 운영하던 마작점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마치 순간 타오르다 금세 사라지는 불꽃같은 삶이었다.

글 양충모 기자 gaddjun@hankyung.com·@herejun(Twitter)│사진 한국경제신문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