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봉사에서 천직을 찾다 (4)

“제 삶에서 최고의 선택이었죠.”

시간을 되돌린다면 다시 해외봉사를 떠나겠느냐는 질문에 이효실 씨는 웃으며 답했다. 국제구호개발 NGO ‘굿네이버스’에서 일한 지 만 1년. 스리랑카 봉사 경험은 400 대 1에 달하는 입사 경쟁률을 뚫은 무기가 됐다.

NGO 단체는 사회복지 전공자만 갈 수 있다는 인식은 고정관념. NGO의 역할과 업무가 다양해지면서 비전공자에게도 채용 문이 열리고 있는 추세다. 이 씨 역시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구호사업에 대한 뚜렷한 목표와 의식으로 당당히 입사할 수 있었다. “결국은 마인드가 중요한 것 같아요.” 스리랑카에서 2년간 쌓은 해외봉사 경험이 그 ‘마인드’를 찾은 열쇠였다.
[KOICA 공동기획] “하나를 주고 두 개를 받는 봉사, 참 매력 알고 나니 길이 보였어요”
“아브지를 아브지라 부르지 못하고….”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서 열린 한국어 말하기 대회. ‘신 홍길동전’ 공연을 펼친 이들은 캔디 직업학교 학생들이었다. 발음은 서툴지만 눈빛은 누구보다 진지했다. 지켜보던 관객석에서 연달아 웃음과 탄성이 터졌다.

지난 2008년부터 2년간 스리랑카에서 해외봉사단원으로 활동한 이효실 씨는 기획에서 연출까지 직접 맡은 이 공연을 뿌듯한 추억으로 회상했다.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는 주로 대학생이 나가요. 직업학교 아이들은 참가할 수 없으니까 대신 찬조 출연으로 무대에 설 기회를 만든 거죠. ‘우리가 어떻게 하냐’며 망설이던 아이들도 한 달 반 동안 연습하니까 자신감을 찾더라고요.”

이 씨가 머문 지역 ‘캔디’는 콜롬보에서 차로 3시간 반가량 걸리는 산간 지역. 한번도 고향을 떠나본 적 없는 아이들이 으리으리한 호텔 무대에 오르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학생들에게도 이 씨에게도 그날 공연은 잊지 못할 추억이 됐다.
[KOICA 공동기획] “하나를 주고 두 개를 받는 봉사, 참 매력 알고 나니 길이 보였어요”
이 씨가 스리랑카로 떠난 것은 대학 졸업 직후인 2008년 3월. 그는 취업과 대학원 진학 사이에서 고민하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졸업 후 선택한 건 취업도 진학도 아닌 ‘해외봉사’였다. 이후 그의 삶은 조금 특별하게 흘러갔다.

“대학생 때 해외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전부 개도국이었어요. 베트남, 태국, 네팔, 인도는 두 번이나 갔죠. 스물셋에 떠났던 두 번째 인도 여행에서 구걸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졸업을 두 달 앞두고 KOICA 해외봉사단원에 선발된 그는 “한 번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가족을 설득했다. 이주 여성 센터와 외국어 교육원에서 자원봉사를 한 경험이 있었기에 타지에서 적응하는 일도 그리 두렵지 않았다. “게다가 제가 간 학교는 오래전부터 KOICA 봉사단원이 파견된 곳이었기 때문에 현지인들도 호의적이었어요.”

이 씨는 직업학교인 캔디 테크니컬 컬리지에서 교양한국어 강의를 개설했다. 커리큘럼을 개발하고 4학기 동안 23개 반을 가르쳤다. 자동차, 전기, 에어컨, 알루미늄과에 다니는 학생 200여 명이 그의 제자가 됐다.

흰 피부와 긴 생머리를 가진 한국인 여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단연코 인기 만점이었다. 길을 지날 때마다 “미스 라싸나이(예뻐요)”라는 인사말이 들렸다는 이야기도 자랑스럽게 털어놓았다.

“함께 사는 법 배우는 봉사를 떠나야”

활동기간 중 빈민가를 방문했던 경험은 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한국어 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빈민촌 사람들에 비하면 비교적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스리랑카는 무상교육이고 학교 오면 용돈까지 주는 곳이지만 빈민가 아이들은 학교조차 못 다니는 현실이었죠. 당장 먹을 게 없어서 돈 벌어야 하니까요. 이 아이들이 구조적인 빈곤에서 벗어나도록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크리스마스에 고아원을 찾아가 일일 보육교사를 하며 가장 큰 성취감을 느꼈다. “똥오줌 묻어 있는 이불을 일일이 손빨래하면서도 좋았어요. 인력이 부족해서 현지 선생님들이 엄두도 내지 못했던 천장 청소, 창문 청소까지 싹 했거든요. 물질적인 도움도 줄 수 있겠지만 마음과 행동으로 돕는 것이 그들의 삶에 다가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현지인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간 이 씨를 스리랑카인들도 가족처럼 받아들였다. 학부형들이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현지 음식을 반찬으로 만들어 가져다주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여행도 떠났다. 마지막 수업을 하던 날 학생들이 다가와 감사의 표시로 발에 입을 맞추며 절을 했다. “부족한 점이 많은 나를 진짜 선생님으로 받아주는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이 씨는 봉사에 대한 가치관을 재정립한 것이 해외봉사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고 말했다. “스리랑카에 가기 전에는 내가 뭘 도와줄 수 있을지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타지에서 살다 보니 오히려 제가 도움을 받고 있는 거예요. 봉사는 내 것을 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나도 그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성장하는 것이구나, 서로 변할 수 있도록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 봉사구나 하고 느꼈어요.”
[KOICA 공동기획] “하나를 주고 두 개를 받는 봉사, 참 매력 알고 나니 길이 보였어요”
스리랑카는 2004년 쓰나미와 2009년까지 계속된 내전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다양한 NGO가 현지인의 자활을 돕고 있다. 그 과정을 생생히 지켜봤던 그는 귀국 후 굿네이버스 하반기 공채에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

사회복지학을 배운 적 없는 그가 서류, 영어와 시사·논술시험, 토론과 면접까지 이어지는 빡빡한 전형을 통과했을 때 모두가 놀랐다. 비전공자이지만 MDGS(밀레니엄 개발 목표)와 같은 문제를 풀 수 있었던 건 국제협력에 대한 꾸준한 관심이 실천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봉사를 하면서 NGO의 명암을 모두 봤어요. 무엇보다 현지인들의 욕구를 잘 반영해서 도움을 주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죠. 해외봉사를 경험해봤기 때문에 현지인들이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어서 일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이 씨는 현재 굿네이버스의 ‘e-나눔’ 부서에서 캠페인 기획을 맡고 있다. 온라인 채널을 통해 캠페인을 진행하며 기부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고 기금을 모으는 역할이다. 국내 빈곤 아동을 돕는 ‘희망나눔학교’ 캠페인, 몽골지역 주민들을 위한 적정기술 캠페인 등을 진행했다.

앞으로 그의 목표는 콘텐츠 기획자로서 전문적 역량을 키워나가는 것. 도움이 필요한 곳의 이야기를 정확히 전달하고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국제개발에 대해 이론과 경험을 더 쌓아 스리랑카 지부에서 일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해외봉사가 막연하게 느껴져 망설이는 이가 있다면 젊은 시절에 이만큼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고 꼭 추천하고 싶어요. 하지만 해외봉사를 마치 트렌드처럼 여기고 경력관리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반대예요.

봉사 타이틀을 얻기 위해 가는 것은 본인에게나 현지인에게나 의미 없는 일이거든요. 명확한 목표와 신념을 가지고 가되 그곳에서 함께 사는 법을 배웠으면 좋겠어요. 내 모든 것을 주겠다는 마음보다 일상을 산다는 마음으로 가야 해요. 열린 마음이 됐을 때 봉사도 잘할 수 있거든요.”

이효실 씨는…

부경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한국어교육 연계 전공)
2008~2010년 KOICA 해외봉사단원으로 스리랑카에서
활동 (한국어 교육)
2010년 굿네이버스 입사
2011년 현재 굿네이버스 나눔사업본부 e-나눔팀 근무


글 김보람 기자 bramvo@hankyung.com│ 사진 서범세 기자 joycin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