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외국어 전성시대] 외면받던 아랍어·스페인어 ‘귀하신 몸’ 변신
영어는 기본인 시대다. 이제는 제2외국어가 영어를 능가하는 무기가 되고 있다. 일어, 중국어 이야기가 아니다. 블루오션으로 새롭게 뜨고 있는 중동 지역의 아랍어와 남미 대륙의 스페인어가 그 주인공이다.

아랍어, 스페인어 능통자들은 취직이 문제가 아니라 ‘어디를 어느 정도의 대우를 받고 갈 것인가’가 화두일 정도. 나만의 경쟁력을 키우고 싶다면 희귀언어 배우기에 도전해보자. 취업문이 활짝 열릴 것이다.

아랍어, 스페인어 등 이른바 희귀언어들의 위상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그 변화는 쉽게 찾을 수 있다.

대구시는 국내 지자체로는 처음으로 아랍어 홈페이지(arabic.daegu.go.kr) 서비스를 시작했다. 대구시는 “최근 증가 추세에 있는 아랍권의 의료·관광·투자유치 촉진과 함께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등 각종 국제행사 홍보를 위해서”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또한 2011학년도부터 국내 최초로 울산외고에 아랍어과, 충남외고에 베트남어과가 신설된다. 울산외고 아랍어과는 UAE 원전 수주 이후, 경제 교류 활성화로 아랍어 인력 수요가 크게 늘 것이라는 전망에서 신설되었다.

충남외고 베트남어과 신설도 급속히 증가하는 다문화 가정 중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과 한국과 베트남 간의 교역량이 크게 증가했다는 점이 고려됐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베트남 수출액은 2007년 12위에서 지난해 8위로 뛰어올랐다.

건설 수주·FTA로 국가 교역 청신호
[제 2외국어 전성시대] 외면받던 아랍어·스페인어 ‘귀하신 몸’ 변신
1970~80년대 오일 달러와 건설 수주로 한국 국민소득 1000달러 시대를 열어준 중동. 한국과 중동 국가 간의 교류는 1970년대 이후 꾸준히 증가해왔다.

무역협회와 수출입은행에 따르면 한국의 중동 대륙 경제권 수출은 1971년 1000만 달러에서 2009년 240억 달러까지 증가했으며 중동 지역 투자금액도 2000년보다 6배 이상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신규 법인 수도 2006년 36개에서 2007년 86개로 2.5배 가까이 증가했다.

지난달 23일 기준으로 국내 건설사의 해외 건설 수주실적은 505억 달러를 기록했다.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던 지난해 연간 수주실적인 491억 달러를 이미 넘어선 것이다. 중동 산유국의 플랜트·사회간접자본 투자가 계속되고 세계 경기 회복이 본격화되면서 아시아와 중남미 국가들의 발주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제 2외국어 전성시대] 외면받던 아랍어·스페인어 ‘귀하신 몸’ 변신
아랍어는 UN이 정한 6개의 공식 언어(영어, 중국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아랍어) 중 하나로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22개 아랍 국가, 2억5500만 명(아랍권의 인구증가율은 매년 2%로 비공식적으로는 4억 명)의 인구가 사용하고 있다. 여러 나라에서 사용하는 ‘광역어’로 세계 4위의 언어이며 사용 인구수로는 5위를 차지한다. 1971년 1월 1일 공식 언어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배우기 상당히 어렵다는 아랍어는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어 다가서기가 쉽지 않다.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한아과에 재학 중인 김선정 씨는 “아랍어 자체가 방대하다.

한 동사가 10가지로 분류되고 그 10가지 동사가 성·수·시제에 따라 또 변한다. 그런 것들은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며 “아랍어는 태생적인 어려움을 갖고 있는 언어”라고 말했다.

역시 UN 공식 언어인 스페인어는 아랍어에 비하면 배우기 쉬운 언어라고 한다. 스페인뿐 아니라 거의 모든 남미 국가에서 사용되는 스페인어는 동사 변화가 좀 어렵긴 하지만 발음은 쉬운 편이라고. 하지만 다른 언어에 비해 배우는 이가 드물고 각광을 받지 못했다.

그동안 한국에서 제2외국어는 프랑스어, 독일어, 일어가 대세였다. 물론 스페인어도 있었지만 채택하는 학교는 드물었다.
[제 2외국어 전성시대] 외면받던 아랍어·스페인어 ‘귀하신 몸’ 변신
반면 일본어와 중국어는 한국 주변 국가이고 그만큼 밀접한 관계이기 때문에 제2외국어로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프랑스어나 독일어는 선진국 언어였기 때문에 많이 배웠지만 최근 실용성이 강조되면서 국내에서 배우는 사람이 줄어드는 분위기다.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브라질을 제외하고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중남미 대다수 국가는 정치·경제적인 불안 때문에 한국 수출기업들의 외면을 받아온 것이 사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수출입은행에 따르면, 중남미 신규법인 수는 1995년 32개에서 지난해 86개로 증가했고 투자금액도 1억2569만 달러에서 9억3635만5000달러로 크게 늘었다. 국내에서 스페인어가 중요한 제2외국어로 등극할 날이 머지않은 셈이다.

올 하반기 채용에서부터 ‘제2외국어’ 높이 평가

유창한 제2외국어 실력, 정말 취업에 도움이 될까. 김준성 연세대 직업평론가는 “2010년 가을 채용에서는 제2외국어가 빛을 발할 것”이라면서 “한국과 페루, 칠레 등의 교역이 늘면서 모든 기업이 내부 규정을 정해 우대하기로 했다. 남미시장에 눈뜨게 만든, 최근 한국과 남미 국가들의 FTA 협상 타결이 이번 가을 채용시장에서 제2외국어 가능자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장경오 삼성엔지니어링 해외사업개발부 부장은 “앵무새처럼 언어만 구사하는 사람은 필요 없다. 우선 상대를 배려할 줄 알고 현지 사람들이 어떤 문화 속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아랍어, 스페인어 등 희귀언어로 취업이 가능한 곳은 어디일까. 우선 아랍어 전공자는 대부분 국내 굴지의 대기업과 정부기관으로 입사할 수 있다. 삼성물산, 삼성엔지니어링, 삼성전자 등 지역 전문가에 관심이 많은 삼성 계열사에서 많이 찾는다. 삼성전자에서는 얼마 전까지 아랍어 특채도 있었다고.

삼성뿐 아니라 중동 수주를 많이 따내는 두산중공업, 현대중공업, 포스코와 LG전자, 대우전자, 각종 건설기업들도 아랍어 전공자를 뽑는다. 정부기관으로는 국정원과 외교통상부, 석유공사가 대표적이다. 외교통상부에는 언어특채(서기관 6, 7급)가 따로 있다.
[제 2외국어 전성시대] 외면받던 아랍어·스페인어 ‘귀하신 몸’ 변신
스페인어가 능통하다면 남미 무역회사들은 물론 외교통상부, US챔버 커머스(미국상공회의소), 대한항공, 경찰 외사과, STX, 현대건설 등 다양한 진로를 선택할 수 있다. 한원덕 한국외대 스페인어과 교수는 “요즘 중남미 국가들이 자원 때문에 인기다. 전기 자동차에 리튬이 들어가는데 전 세계 리튬 매장량의 70%가 남미 3개 국가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에 매장돼 있기 때문”이라며 스페인어의 핑크 빛 미래를 전망했다.

동시통역 프리랜서로 활동할 수도 있다.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한 김성규(29·가명) 씨는 “9일 동안 아랍어 국제회의 통역을 하고 보수로 700만 원을 받았다”고 말했다. 국제회의가 많은 4월과 10월의 경우 수입은 최대 2000만 원까지 늘어난다고.


[인터뷰] 이인섭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장

희귀언어 관심 있다면, 끝까지 파고들어야
[제 2외국어 전성시대] 외면받던 아랍어·스페인어 ‘귀하신 몸’ 변신
이인섭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장을 찾아간 이유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희귀언어의 위치, 즉 그 중요도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레바논에 이어 아시아 2번째로 세계 통번역(대학원)협의회에 가입한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에는 영어, 일본어, 중국어를 비롯해 아랍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등 모두 8개 학과가 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아직 멀었습니다. 아랍어 전공 후 정부기관에 들어가도 아랍어로 활동하는 사람이 없는 게 현실이죠. 다들 중동 지역으로 안 가고 선진국으로 갑니다. 제도 자체가 제2외국어를 포기하게끔 만들고 있어요.”

전략적으로 인재를 집중 양성해서 키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아랍어와 스페인어가 그런 상태입니다. 스페인어는 아랍어보다 더 홀대받았어요. 지역적으로 굉장히 머니까요. 요즘에는 광물자원 때문에 각광을 받지만 예전에는 배워도 쓸모없다고 여기니 대부분 스페인어를 버리고 다른 분야로 취직했습니다.”

이 원장은 꾸준히 전략언어(많은 국가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면서 전략언어에 대한 한국 사회의 턱없이 부족한 지원을 아쉬워했다.

“자원은 스페인어권, 석유는 아랍권이죠. 이 나라들을 놓치면 차세대 산업을 육성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이런 지역의 언어를 교육시켜야 해요. 10년을 교육하고 그 후로 또 10년이 지나야 그 언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 원장은 ‘맨파워’를 재차 강조하며 반기문 UN 총장이 총장으로 선출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김종용 주 사우디대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과거 카타르 대사를 지냈던 김종용 대사가 대사 시절과 카타르 유학 시절의 인맥을 동원해 카타르를 설득했고 카타르가 한국을 지지한다고 발표하면서 아랍 국가 간 회의까지 열렸다고. 그러면서 중동의 표가 반 총장에게 쏠렸고 결국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원장은 “국가적으로 큰 인물을 배출해야 그런 외교적 힘도 발휘할 수 있다. 이제는 확실히 투자해서 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김종용 대사처럼 결정권자가 될 때까지 그 사람의 방향을 지도하고 키워주는 것은 물론 다른 데로 눈 돌리지 않게끔 관심을 갖고 정책적으로 배려하는 게 필요하다는 말이다.

“어릴 때 교육받은 사람이 나중에도 그 언어를 이해할 수 있고 거부감이 없어요. 어릴 때 먹어본 음식은 평생 먹을 수 있듯 언어도 어릴 때 해본 사람이 적응 능력이 훨씬 뛰어납니다. 거부감이 없으니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거예요.

아직 부족한 상황이지만 요즘은 고등학교 아랍어 수업 덕분에 아이들이 그 문화를 많이 이해합니다. 그런 게 필요해요. 언어는 단기간에 되지 않는 만큼 국가에서 장기적으로 전략언어 훈련소나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어 양성해야 합니다.”

희귀언어에 관심이 있고 잘하는 사람을 키워 경쟁력 있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 그것이 바로 이 원장의 절실한 바람임을 알 수 있었다. 끝으로 ‘외국어 잘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조언했다.

“학생들에게 늘 ‘현지 사람이 하는 식으로 하라’고 말합니다. 흉내를 내다 보면 나중에는 창작도 할 수 있게 되거든요. 창의성이 생길 때까지 훈련하는 게 중요해요. 현지 사람들이 하는 말을 계속 따라하다 보면 길이 생기죠.”

또한 머릿속 생각을 없애고 바로 현지어로 말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말하기 전에 속으로 한국말로 작문하는 과정을 없애야 합니다. 초급 단계에서는 문장 암기를 많이 하고 문법을 꼭 익혀야 합니다. 문법을 모르면 고급 언어를 구사할 수 없다는 것을 꼭 명심하기 바랍니다.”

한상미 기자 hsm@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 joycine@hankyung.com, 한국경제신문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