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 나의 인생

소설 ‘7년의 밤’ 마지막 장을 덮으며 많은 독자들이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도대체 이 무시무시한 작가는 누구야?’ 탄탄한 스토리와 엄청난 흡인력으로 책을 펼친 순간 독자들을 단숨에 사로잡는 ‘괴물 작가’ 정유정.
그녀가 ‘7년의 밤’ 이후 2년 만에 신작 ‘28’을 들고 독자들을 찾아왔다.
소설 28로 돌아온 작가 정유정, 방황하는 청춘 꿈이 없어서 아닌가요?
2009 년 겨울, 기자는 정유정 작가에게 이메일 한 통을 보낸 적이 있다. ‘내 심장을 쏴라’로 그녀가 제5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한 후였다. ‘올 한 해는 어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녀는 ‘용기’라는 키워드로 답했었다. ‘궁극적인 꿈인 이야기꾼이 되기 위해 도전의 용기와 버리는 용기를 클러치와 브레이크처럼 두 다리에 끼고 가겠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이번에 출간한 ‘28’을 준비하면서도 그녀에겐 두 가지 용기가 모두 필요했으리라 싶다. ‘7년의 밤’의 영광을 버리고 초심으로 돌아가야 했고, 등단 이후 처음으로 찾아온 긴 슬럼프를 이겨내야 했으니 말이다. 출간 직후 ‘28’이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고 얼마 전 그녀가 ‘한국의 젊은 작가’ 1위로 꼽힌 것을 보니 그 용기는 제 몫을 해낸 듯싶다.


인터뷰 오기 전, 그때의 메일을 다시 읽어봤어요. 메일 주소가 ‘유파리공주’예요.
대학 다닐 때 이름 뒤에 ‘팔이’를 붙여 별명을 만드는 게 유행이었어요. 저는 정유정이니까 ‘유팔이’인 거죠. 그 별명을 따서 ‘유파리’라고 하고 뒤에 공주를 붙였어요. 아마 그때는 공주가 되고 싶었나봐요.(웃음)


그때 작가님께서 새 소설 작업에 들어갔다고 하셨어요.
맞아요. ‘7년의 밤’을 시작한 때였죠. 보통 2년 주기로 작품을 내놓고 있거든요. 항상 작업 스타일이 비슷하기 때문에 기간이 비슷한 것 같아요. 자료를 찾고 취재하는 데 6개월이 걸리고, 초고 쓰는 데 3개월 정도가 걸리거든요. 나머지 시간은 수정 작업을 하며 보내죠.


작업 시간이 정해져 있나요?
저는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요. 씻고 일단 음악부터 듣죠. 조용한 새벽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제가 좋아하는 메탈 음악을 이어폰을 꽂고 들어요. 그리고 4시부터는 원고를 쓰죠. 7시에 남편 출근 준비를 돕고 정오가 될 때까지 다시 원고를 써요. 오후에는 오전에 쓴 원고의 수정 작업을 해요. 5시가 되면 운동하러 갔다가 10시에 잠자리에 들어요. 항상 비슷한 패턴인데, 이번에는 슬럼프가 오면서 출간일이 예상보다 6개월 정도 늦어진 거죠.


슬럼프가 꽤 길었네요.
등단 이후 처음 온 슬럼프였는데, 한 글자도 못 쓰겠더라고요. 환경을 바꿔보면 낫지 않을까 싶어 짐을 싸서 지리산으로 올라갔어요. 해발 700m의 분지에서 지냈는데, 그곳을 한 바퀴 도는 게 8km 정도 되더라고요. 매일 새벽과 저녁 시간에 한 바퀴씩 걸었어요. ‘뭐가 문제일까’ 스스로 질문을 던지면서요. 2주 정도 걷다 보니 실마리가 보이더라고요. 처음 소설을 시작할 때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는데 점점 바이러스 이야기에만 집중되고 있었던 거죠. 이건 아니다 싶어 2500매 원고지를 모두 버리고 1500매를 새로 썼어요.


책이 출간돼서 요즘은 한가하시겠어요. 어떻게 지내세요?
9월에 ‘제리’의 김혜나 작가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로 여행을 가기로 했어요. 요즘 그 준비에 한창이죠. 아웃도어 매장에 가서 둘이 똑같은 옷도 샀어요. 또 매일 산을 다니면서 연습 중이에요. 어제도 5시간 동안 트레이닝을 했더니 몸이 새까맣게 탔네요. 첫 해외여행이라 굉장히 설레요.


첫 해외여행지로 안나푸르나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머리를 비우고 싶어 결정한 여행이거든요. 남편은 아들이 있는 일본에서 쉬고 오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는데, 저는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 휴양보다는 몸을 괴롭히는 것이 좋아요. 그래서 평소 가고 싶던 곳을 떠올려봤죠. 히말라야, 알래스카, 산티아고가 가장 먼저 떠올랐는데 산티아고는 코스가 너무 길었고, 알래스카는 몸을 막 굴리기가 힘들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를 선택했어요.


얼마 전 인터뷰를 보니 아직 출간된 ‘28’을 안 읽으셨던데요. 혹시 요 며칠 동안 읽어 보셨나요?
아뇨. 안 읽었어요. 여행 떠나기 전까지도 안 읽을 거예요.(웃음) 읽고 나면 고치고 싶은 부분이 생기거든요. ‘7년의 밤’ 때는 필름을 넘기는 전날까지도 제가 수정할 부분을 계속 보내서 출판사 직원들이 밤샘 근무를 하셨대요. 책을 볼 때마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보이고, 계속 수정을 하게 되니 출판사에서는 얼마나 괴롭겠어요. 이번 작품은 안 읽고 꾹 참는 중이에요.


원래 퇴고를 많이 하는 편이죠?
‘내 심장을 쏴라’는 15번, ‘7년의 밤’은 8번을 퇴고했어요. ‘28’은 5번 했고요. 정해놓은 횟수가 있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퇴고를 하다 보면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는 시점이 와요. 손을 쓸 수 있는 유효기간이 끝나는 거죠. 그 이상 보면 토할 것 같아요.(웃음) 이번에는 5번 보고 나니 그 시점이 오더라고요. 불안한 마음이 크니 더 책을 읽을 수가 없어요.
소설 28로 돌아온 작가 정유정, 방황하는 청춘 꿈이 없어서 아닌가요?
등단까지 11번의 탈락이 있었죠. 그때는 어땠나요?
패배주의에 젖어 있었어요. 제가 콤플렉스를 갖는 성격이 아닌데, 그때는 ‘난 안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당선됐을 때는 거의 벼랑 끝에 서 있을 때였죠.


그런 상황이라면 포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끊임없이 도전한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어요. ‘작가가 되고 싶은 건지, 글을 쓰고 싶은 건지’에 대해서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것은 직업적인 문제였고, 글을 쓰고 싶다는 것은 정체성에 관한 문제죠. 그런 질문을 스스로 해볼 때마다 내 이름 석 자를 알리지 못한다고 해도 글을 쓰는 것 자체가 후회되진 않을 것이란 결론이 나왔어요.


작가가 되기 전 간호사로 일하셨죠?
어릴 때부터 글 쓰는 재주가 있어서 상을 많이 받았는데, 어머니는 제가 작가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어요. 외삼촌께서 글을 쓰다 요절을 하셨거든요. 당신 딸도 불행한 길을 걷게 될까봐 걱정하신 거죠. 그래서 간호대를 나와 취직했지만 저에게는 맞지 않더라고요. 결국 그만두고 작가의 길을 가게 됐죠.


구제역으로 돼지들이 생매장되는 영상을 보고 이번 작품을 구상했다고 들었어요. ‘7년의 밤’도 엘리베이터에 붙은 아이 찾는 전단지를 보고 시작하게 됐고요. 어떤 소재를 보는 순간 ‘이거다’ 하는 감이 오나요?
오는 것 같아요. 인터넷을 즐겨 하지는 않지만 촉은 세워놓고 있어요. 여러 가지 특이한 사건도 많이 보지만 그런 이야기에 모두 눈길이 가는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주변에서 번뜩 오는 경우가 있죠. 저는 소재를 찾을 때 ‘이 이야기를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할까’를 먼저 생각해요. 내가 내놓은 이야기가 읽을 가치가 있는지를 고민하는 거죠. 소설은 작가가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문제인지 고민해야죠.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들이 있어요. 이를테면 병원을 배경으로 한다든가, 동물이 자주 등장한다든가 하는 것이요.
우연인 것 같기도 하고, 의식할 새도 없이 나오는 것 같기도 해요. 병원 응급실의 모습은 간호사 출신이니 A부터 Z까지 꿰고 있잖아요. 아무래도 잘 알고 친숙한 것들이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겠죠. 일부러 피할 생각도 없고 그 부분만 계속 파고들 생각도 없어요. 동물에 대한 관심도 많아요. 어릴 때부터 시골에서 자라 개나 고양이를 항상 키웠거든요. 지금은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고 있어요. 저는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캣맘’이에요. 아파트 주차장에 고양이 가족이 있는데, 경비 아저씨가 밥을 주는 것을 싫어해서 몰래 새벽에 나가서 밥을 줘요.


이번 소설에 등장하는 ‘기준’이 소방관이에요. 남편 분도 소방관이시죠?
맞아요. 하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기준의 성격은 남편과 달라요. 제 막냇동생을 닮았어요. 실제 남편 성격은 순하답니다.(웃음) 소설가들이 굉장히 양심이 없어요. 주변 이야기뿐만 아니라 아는 사람들을 죄다 팔아먹거든요. 저를 집어넣는 것은 괜찮아요. 주변 사람들을 등장시킬 때는 조심해야 해요. 허락 없이 등장시켰다가 상대방이 불쾌해할 수도 있거든요.


소설 속 사이코패스인 동해의 이야기는 굉장히 섬뜩하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사이코패스에 관심이 많다면서요?
뇌 과학과 관련한 책을 많이 보는데 굉장히 흥미롭고 재미있어요. 아무래도 그쪽 분야의 책을 꾸준히 읽고, 계속해서 관심이 가는 것을 보면 조만간 1인칭 사이코패스 소설을 쓰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모든 주인공이 선량할 필요는 없지만, 매력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독자들이 사이코패스 주인공에게 매력을 느끼게 하려면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는 안 될 것 같고 1인칭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가야겠죠.


취재를 철저하게 하는 스타일로 알려져 있어요. 이번 작품은 6개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구성하다 보니 취재 범위가 더 넓어졌을 것 같아요.
네. 하지만 저는 취재를 할 때가 제일 편해요. 글을 쓰기 시작하면 힘들죠. 쉽게 써내려가는 편이 아니거든요. 모르는 분야의 이야기를 취재하면서 새롭게 배우는 과정이 재미있어요. 가끔 취재를 갔다가 거절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세요.


작품의 스토리가 탄탄하다 보니 영화화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누군가 저에게 ‘제일 상처받는 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영화를 염두에 두고 글 쓴다’는 말이라고 할 거예요.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저는 영화를 노리고 소설을 쓰지 않아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편이 낫죠. 소설 속 묘사 방식이 두드러지다 보니 시각적 표현이 되어 그런 말씀을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평소에 영화를 잘 안 본다고 들었어요.
10년 동안 딱 한 작품 봤어요. 친구인 안승환 감독이 시나리오를 썼던 ‘돌이킬 수 없는’이라는 영화죠. 집에는 TV도 없어요. 드라마나 영화를 일부러 보지 않으려고 하거든요. 영상을 많이 보면 좋은 장면들이 머릿속에 남게 돼요. 작품을 쓸 때 그런 장면들에 영향을 받고, 표현에 한계가 생기는 것 같아요. 대신 소설은 많이 읽어요. 다른 소설을 읽는 것은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어요.


아드님이 올해 대학생이 되죠. 요즘 취업난 때문에 부모로서 좀 걱정되지 않나요?
아뇨, 전혀요. 저는 아들에게 ‘하고 싶은 일을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이야기했어요. 고등학교 2학년쯤 되니 ‘컴퓨터 보안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얘기하더라고요. 혼자서 이미 C언어나 관련 프로그램도 익혔다면서요. 자퇴를 원하기에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어요. 검정고시를 보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이번에 대학에 입학해요. 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많은 청춘들이 방황하는 이유가 물론 외적으로 힘든 시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스스로 목표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꿈을 찾기보다는 스펙 쌓기에 더 열중하는 학생이 많아요.
본인의 꿈이 오직 ‘대기업 입사’라면 그럴 수도 있어요. 그게 아니라면 의미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발견하는 것이 먼저죠.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요.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독서도 중요할 텐데, 요즘 학생들이 책을 안 읽더라고요.
엄마가 소설가인 제 아들도 책을 안 읽어요.(웃음) 제가 ‘그렇게 무식해서 어떻게 하느냐’고 자주 말하죠. 요즘 아이들은 영상 세대잖아요. 아무래도 텍스트보다는 영상에 익숙하겠죠. 이해해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소설에도 영상적인 기법이 동원되는 것이 필요할 듯하고요. 독자들의 성장 환경도 고려해야죠. 쓰고 싶은 이야기를 독자와 타협할 수는 없지만 방식은 어느 정도 타협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시각적인 묘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그 이유이고요.


대학생들에게 책 몇 권 추천해주세요.
소설이라면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저)라는 책을 추천해요. 굉장히 재미있는 내용이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거예요.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털 없는 원숭이’(데즈먼드 모리스 저), ‘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 저)를 추천해요. 그리고 자기계발서를 읽는 친구들이 많은데, 그 전에 스스로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아요. 서점에 가면 애니어그램과 관련한 책들이 있어요. 9가지 성격 유형을 분석한 책인데, 그걸 보고 본인의 성격이 어떤지 감을 잡으면 목표를 설정하고 나아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글 박해나 기자│사진 김기남 기자